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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83)화 (83/148)

83화. 단편적 진실(6)


 

소란이 뚝 멎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였다.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그 소문을 황태자가 들고 나온 것이다.

‘…저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베를리아가 황태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는 허황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어차피 내 계획상 저 자식 손에 성검이 한 번쯤은 들어가야 할 테지만.’

그렇지만 베를리아가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카를로스가 저렇게 나오니 그녀도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덴버는 신의 축복 아래 세워진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라 불리는 신관들의 목숨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긴 역사 속에서 오랜만에 나타난 성검의 주인을 단죄한답시고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도 백성들에게 이렇게 소문이 퍼진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황위 계승권이 없는 자 중에서 새롭게 황태자 후보를 뽑는 것도 카를로스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정당하지 못한 황위 계승권을 황태자로 내세우고 지지하는 것은 후폭풍을 맞기에 가능성이 다분했으니까.

정치판에 영원한 아군이 어디 있겠는가. 카를로스가 남아 있다면 어느 세력이 어느 때에 그와 손을 잡을지 모를 일이었다. 귀족파든, 황제파든, 반황태자파든 결국 권력을 잡는 것이 목적일진대 서로의 뒤통수를 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러니 카를로스를 제거함으로써 최소한 서로 간에 믿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성검의 주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다들 입을 다무셨군.’

베를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게다가 성검의 주인은 에덴버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에덴버는 성검의 주인이었던 초대 황제와 신의 계시를 받은 성녀가 신의 대리자로서 함께 세운 나라였다. 그 탓에 성검의 주인에게는 황위 계승권이 존재했다.

물론 역사 속에서 황족이 아닌 성검의 주인이 황제가 된 적은 없었다. 황족들에게는 각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 존재했다. 그러니 가진 것이라고는 성검뿐일 경우 어차피 황제가 되기에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성문화된 법에 불과했다.

그러나 황위 계승권이 누구에게도 사라진다면 말은 달라진다. 한 마디로 귀족들과 황제가 애써 카를로스에게서 빼앗으려 일을 벌였던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는 일이었다. 어차피 정통성을 문제 삼아도 성검이 그에게 황위 계승권을 돌려줄 테니까.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 성검의 주인이 되셨다면 두말할 것 없는 황실의 경사겠죠.”

싸늘한 침묵을 뚫고 라미르니에 후작이 입을 열었다. 황제는 성검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카를로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라미르니에 후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회주의자 늙은이 같으니.’

황실은 어차피 황위 계승권자가 단 한 명뿐인 시점에서, 계승권을 상실하지도 않은 카를로스를 외부로 내놓을 수 없었다. 자칫하여 현 황제가 죽게 될 경우 다른 자가 자리를 이어도 카를로스가 들고 일어날 명분이 충분했으니까. 어차피 황제의 생식 능력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황족이 태어나기도 힘들었고, 태어난다고 한들 이능을 가지리란 법도 없기도 했고.

카를로스가 현 황제의 아들이 아닌 채로 황위에 오르면, 현 황제는 자신의 대에서 황가의 적통 핏줄이 끊기게 되는 셈이었다. 제 잇속에는 빠삭한 현 황제가 자신의 이름에 그런 오명을 남기려 할 리 분명했다. 카를로스가 어차피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 황제는 그를 제 아들로 남겨 두려 할 터였다.

“제국의 자랑이거늘, 저희가 진즉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요.”

“후작도 알다시피 내가 최근에 봉변을 당하지 않았나.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성검의 주인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왜 지금까지 밝히지 않았냐는 후작의 말에 카를로스가 담담히 답했다. 봉변. 실종은 스스로 꾸민 일인 주제에 그의 입에 담기에는 상당히 뻔뻔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성검, 지금 보여 주실 수 있는지요?”

결국 베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태자에게 성검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라고 했다가 진실로 그가 가지고 있다면 낭패였다. 라미르니에 후작이 자꾸만 말을 에둘러 말하고 다른 귀족들은 죄다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베를리아에게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진짜든 가짜든 다 그녀에게 있었으므로.

“리들턴 백작, 그대의 저택에 두고 왔다.”

그러나 이어진 카를로스의 발언은 베를리아마저 말을 잃게 했다. 황태자의 이야기에 장내에 있는 귀족들이 시선이 베를리아에게 쏠렸다.

‘미친 놈. 이러려고 아까 친한 척했던 거야?’

귀족들의 눈에 하나같이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올 것이 왔다고 여기는 이도 빤히 보였다.

황태자의 미친개, 베를리아 리들턴. 그녀가 정말로 황태자를 버릴까? 베를리아와 카를로스를 봐 온 모든 이들이 그녀가 황태자에게서 돌아섰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이었다.

“저는 근래 들어 황태자 전하를 제 저택에서 뵌 적이 없는데, 언제 오셨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한 순간이나마 카를로스의 의도를 의심했던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를 제멋대로 이용할 뿐이었다. 잠시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리들턴 백작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카를로스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베를리아에게 져 주는 듯한 어조였다. 그것은 아까 그가 마차 앞에서 보인 태도로 썩 신뢰를 더했다. 그녀를 향한 귀족들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귀족들은 황태자 모르게 정통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비밀을 유지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제대로 문제를 삼기도 전에 황태자가 잠적해 버렸다. 누군가 미리 알려 주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베를리아가 그 역할을 했다고 의심하기에 매우 충분했다.

“어찌 됐든 사고를 겪으면서 잠시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 조만간 되찾아 와야겠지만.”

카를로스는 진실로 제 손에 성검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황태자를 노린 괴한들을 피하다가 부상을 입어 회복하느라 돌아오는 데 시일이 걸렸다는 것이 표면상 카를로스가 내세운 변명이었다. 이래봬도 황실 최고 마법사인 리암이 철저히 카를로스의 소재를 숨겼던 탓에 귀족들도 며칠 동안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증명할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가 잠적해 있던 동안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알 수 없었기에, 정통성 문제를 더욱 빠르게 처리하려고 했던 게 귀족들의 실책이었다. 라미르니에 후작은 황태자의 실종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목숨이 위험했던 난리 통에 잠시 다른 곳에 두었다는데 인제 와서 그것을 뭐라고 책할 수도 없었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이대로라면 완전히 카를로스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이 뻔했다.

“황태자 전하, 괜한 오해를 살 말은 삼가 주….”

순간 베를리아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의 입에서 울컥 붉은 액체가 토해진 까닭이었다.

“헉…!”

“세상에, 이게 무슨…!”

“베릴!”

사람들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를로스도 놀라 베를리아를 불렀으나 각자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려올 리 만무했다.

베를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하고 충격에 빠진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그녀가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베를리아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카를로스를 향해 말했다. 그녀에게 이목이 쏠려 있었던 데다가, 무의식적인 원망처럼 토해진 음성이 아주 작지는 않았던 탓에 주변의 귀족들은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베를리아 주변의 귀족들이 황태자와 베를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순간 쿵, 하고 베를리아의 신형이 쓰러졌다.

***

그 다음부터는 일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마차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혼절 소식을 듣고 기겁하여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황궁에 와서 갑자기 이렇게 됐는데, 베릴을 황궁의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메리쉬가 그렇게 화를 내고 가 버린 덕에 황궁의는 베를리아의 상태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귀족들이 쓰러지며 내뱉은 베를리아의 말에 살을 붙여 상상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봤듯이 베를리아가 황궁 도착한 뒤로 사사로이 접촉한 것은 황태자뿐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멀쩡했다면 그녀에게 손을 썼을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베를리아 리들턴이 누군가에게 무슨 짓을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귀족들이 그녀가 일을 당해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베를리아에게 어떤 짓을 했을 대상이 카를로스였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황궁의 지하 감옥에도 순순히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카를로스 에덴버.

그리고 그런 의심의 시선들 속에서, 베를리아의 혼절을 본 충격으로 굳어 있던 카를로스는 뒤늦게 리들턴 저택으로 향했다. 그가 리들턴 저택의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나온 것은 메리쉬였다.

“네놈, 죽고 싶어서 온 건가? 베릴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메리쉬가 카를로스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그의 두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헛소리 마, 너도 가까이 있었으니 알 것 아닌가! 나는 베릴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카를로스가 울컥하여 반박했다. 그러자 메리쉬가 빠르게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렇다면 멀쩡하던 베릴이 어떻게 갑자기 저주의 낙인으로 인해 쓰러져!”

메리쉬의 말에 카를로스의 몸이 움찔했다. 표정을 굳혔던 그가 메리쉬를 밀며 말했다.

“비켜, 내가 낫게 할 수 있어.”

“너 같은 놈을 무얼 믿고….”

“그럼 네 놈이 대체 지금 베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메리쉬와 카를로스의 사이에 날 선 말이 오갔다. 잠시 매서운 시간이 오갔다. 결국 비켜선 것은 이를 악문 메리쉬였다.

“허튼짓하면 네 놈 하나 처리하는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메리쉬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카를로스는 그 소리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빠르게 베를리아의 침실로 향했다. 리들턴 저택에 한두 번 와 본 것이 아니었으니 걸음을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베를리아의 방 문을 열었을 때, 카를로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베를리아가 아니라 일전에 성검이 담겨 있던 그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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