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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82)화 (82/148)

82화. 단편적 진실(5)


 

‘…카를로스가 지금 날 마중 나온 거야?’

베를리아가 당황스러움에 문을 열지 못한 채 멈칫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다정해서 소름이 돋았다.

“…베릴, 어떻게 할까요?”

메리쉬가 마차 문의 손잡이에 얹어진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성검을 찾으러 왔을 때, 그리고 그녀가 본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 떠올랐던 카를로스의 모습들이 그녀를 매우 꺼림칙하게 만든 탓이었다.

“나가자.”

베를리아가 심호흡을 하며 메리쉬와 시선을 마주했다. 카를로스가 무슨 꿍꿍이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황궁의 정문 앞으로 직접 그녀를 데리러 왔는지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베를리아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베… 또 그놈과 함께 왔군.”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카를로스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베를리아에게 내밀어졌던 손이 허공에서 어중간하게 멈춰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무시한 채로 메리쉬의 손을 잡고 내렸다.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내 연인이랑 함께한다는데.”

베를리아의 냉담한 목소리에는 전혀 조심성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카를로스는 황태자였다. 주변에서 다른 귀족들이 보고 있으니 그녀를 책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가 굳이 트집 잡힐 거리를 만든 것은 카를로스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구태여 남들 앞에서 자신에게 친한 척을 하고 있었으니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속셈이었다.

“…연인, 이라.”

그런데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의 그런 태도보다도 그녀의 말에 꽂힌 듯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그것을 들은 메리쉬가 살벌한 기색으로 카를로스를 내려다봤다.

두 남자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모두가 베를리아와 카를로스, 메리쉬를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카를로스가 별안간 미소했다.

“그래, 그쯤이야.”

카를로스는 자신이 대단한 관대함이라도 베푸는 듯한 어조였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수록 베를리아는 마치 괴이한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그자는 회의장 안으로 못 들어가. 그러니 나랑 가, 베릴.”

카를로스가 아까 주춤했던 것과 달리 다시 한번 제대로 손을 내밀었다. 귀족이라고 모두가 중앙 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메리쉬가 리아세의 성을 달았다고 한들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황태자 전하, 저는 누군가 옆에 없다고 해서 혼자 회의장도 못 찾아갈 만큼 멍청하지 않답니다.”

메리쉬에게서 떨어져 홀로 고고히 선 베를리아가 정중히 말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그녀가 카를로스에게 선을 긋는 상황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베를리아이 눈매를 휘며 가는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없는 네가, 뭐라도 될 줄 알았어?’

카를로스가 제멋대로 베를리아에게서 받은 흑마법 열쇠를 이용하여 리들턴 저택에 찾아왔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의 연장선이었다.

카를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베를리아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도 알았다. 카를로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베릴.”

카를로스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뻔뻔하게 자신이 봐주겠다는 식으로 나오던 저번과는 달리 마치 정말로 잘못을 뉘우치기라도 하는 태도였다.

“내가 네게 너무했어. 그러니 돌아와, 베릴.”

‘베릴, 내가 잘못했어.’

눈꼬리를 늘어트린 카를로스의 위로 어떤 환영이 겹쳐졌다. 어린 소년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왜 하필 이 순간에 저런 장면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발 그만 좀 해.’

그녀가 속으로 진절머리를 냈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기억은 오늘따라 유달리 그녀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괜찮아, 카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음성이었다. 어린 날 카를로스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대라고는 베를리아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종종 소년은 소녀에게 과하게 굴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소년에게는 소녀가, 소녀에게는 소년이 유일한 존재였다. 결국 소년은 곧 제 잘못을 시인하고 풀이 죽고는 했다. 소녀는 항상 쉽게 그런 소년을 용서해 줬다.

어쩌면 소녀는 그러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소녀 또한 겉으로는 어른스러운 척 구는 소년이 제게만 보여 주는 면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때의 소년은 적어도 베를리아에게는 아주 솔직했다.

“베릴?”

베를리아에게서 아무 대꾸가 없자 메리쉬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카를로스에게 덧씌워지는 소년의 환영으로 인해 자꾸만 미간을 찌푸렸다.

“베릴, 우리가 누구 하나 때문에 달라질 사이는 아니잖아.”

카를로스의 시선이 메리쉬를 향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의 말이 마치 안젤라까지도 포함하는 것처럼 들렸다.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메리쉬로 특정하지 않고 ‘누구’라고 말한 점이 더 그랬다.

[‘카를.’]

진짜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울렸다. 카를로스를 그리워하는 음성이었다. 일순 그녀가 바라지 않는데도 카를로스를 상대로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대단히 불쾌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카를로스나 진짜 베를리아나 둘 다 참으로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하게도 서로를 놓지 않는다.

그녀가 입 안의 살을 강하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에 맴돌았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볼 안쪽이 얼얼했다. 그제야 환영과 함께 들려오던 음성이 사라졌다.

‘내가 또 휘둘릴 줄 알고.’

한동안 얌전하던 진짜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왜 또 나타났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질 생각 따위 없었다. 그게 카를로스든,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이든.

“누군가로 인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황태자 전화와 제가 ‘우리’라고 불릴 사이는 아닌 것 같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사이는 서로에게 연인이 생겼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계기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관계가 변하도록 만든 것은 그와 그녀였다. 그러니 베를리아와 카를로스는 더 이상 ‘우리’라고 불릴 수 없었다. 서로의 손으로 관계를 끝장냈으니까.

베를리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메리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카를로스를 지나쳤다. 그 걸음에 망설임은 일절 없었다.

그녀는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과는 달랐으니까.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저는 현 황태자 전하의 정통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스테먼 남작은 지난번과 달리 연극조로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카를로스의 실종은 이미 한 번 귀족들이 작당했던 일을 어그러트려 놓았다. 그러니 혹시라도 있을 일에 대비하여 빠르게 문제를 드러내고 결론을 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스테먼 남작?”

황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카를로스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황제가 버젓이 있건만, 카를로스는 이제 황제를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행동에 황제의 얼굴에 불쾌함이 선명히 드러났다.

아들을 치고자 제 핏줄임을 알면서도 모략하는 아버지였다. 어차피 이번 계획만 실패한다면 황제는 카를로스를 내칠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설령 모략이 성공한다 해도 카를로스는 온전치 못할 테니 그는 더 이상 황제에게 몸을 낮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입니다.”

카를로스의 태도가 매우 당당하자 잠시 머뭇거린 스테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그대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목을 내놔야 할 것이다.”

카를로스가 경고했다. 감히 황족을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일이 실패할 경우 스테먼 남작은 자신의 목뿐 아니라 가문 전체를 내놓아야 할 터였다.

“당시 에버든 공작의 손자인 하이덴 에버든과 황태자 전하의 어머니이신 이즈레나 에덴버 후궁 마마께서 밀회를 즐기셨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스테먼 남작이 준비한 서류를 내놓았다. 물론 귀족들에 황제까지 카를로스 하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모두 작당하여 만든 것이었다.

“황궁의 담은커녕, 자신의 궁 밖으로 걸음을 해 본 적도 드문 내 어머니께서 부정을 저질러 나를 낳으셨다?”

카를로스가 삐뚜름한 조소를 머금었다. 사실 대단한 억지이기는 했다. 약소국의 왕녀였던 카를로스의 어머니는 그 성정조차 상당히 유약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 황궁은 너무 혹독했고 그래서 그녀는 황궁에서 늘 숨을 죽이며 살았다. 그러니 어디 한 번 궁을 자유롭게 활보해 보기라도 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외도라니, 당사자가 무덤에서 일어나 억울해할 일이었다.

“하이덴 에버든은 종종 공작을 따라 황궁에 입궁했고, 황궁이야 워낙에 넓고 사람도 많으니 눈을 피하는 것쯤이야 어렵겠습니까.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는 폐하보다 하이덴 에버든을 닮으셨지요.”

공교롭게도 황제와 카를로스의 어머니가 가진 머리칼은 갈색이었다. 카를로스의 금발은 선선대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작당을 모의하며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하이덴의 금발과 같다 몰아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제법 증거라고 할 만한 것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황제의 생식 능력에 관한 의문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부터, 카를로스의 어머니가 자신의 궁에만 있었기에 도리어 그녀가 제 궁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입증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후궁의 시녀들이야 어차피 제 주인을 따랐을 테니 그들의 발언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약간은 허술한 면들도 다수가 몰아가니 그럴듯해 보였다.

쾅!

“정말 못 들어 주겠군.”

그것을 어쩐 일인지 듣고만 있던 카를로스가 별안간 제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카를로스를 궁지로 몰아갈 내용들을 늘어놓던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한데 모였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일순 베를리아에게 닿았다. 그 찰나 후에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허면 그대들은 성검의 주인인 내가 부황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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