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단편적 진실(4)
안젤라는 카를로스에게 가는 내내 마차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데니안도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도착하여 작은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을 때, 돌아온 반응은 결코 곱지 않았다.
“어쩌자고 여길 와?”
카를로스가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선 남들 눈에 띌까 봐 들어오라고는 했으나 누가 봐도 탐탁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안젤라가 자신을 찾아오면서 뒤라도 밟혔을까 봐 그것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내가 왜 찾아 왔는지를 궁금해하는 게 우선이지 않아, 카를?”
안젤라에게서도 곱지 않은 말투가 흘러나갔다. 서로의 상황이나 기분이 여의치 않으니 마냥 평화롭던 연인 사이도 그저 괜찮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안젤라와 카를로스의 사이에서 처음으로 날 선 분위기가 흐르자 리암과 데니안도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제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 태도에 기분이 상한 안젤라가 표정을 굳혔다.
“…왜 왔는데?”
“교황 성하의 상태가 위중하셔.”
카를로스의 질문에 안젤라가 툭 말을 던졌다. 그전까지는 피곤해 보이기만 하던 그의 표정이 생각하지도 못한 화제에 그제야 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카를로스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베릴이 그걸 알아.”
“뭐…? 아니, 베릴…? 앤지, 너 지금?”
카를로스의 표정이 빠르게 달라졌다. 그가 얼굴을 굳혔다가 다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베를리아가 교황의 상태를 안다는 것도 중요한 이야기였으나, 안젤라가 베를리아를 두고 친근하게 애칭을 사용하는 것 또한 베를리아가 갑자기 돌변한 뒤로는 없던 일이었으니까.
“왜냐하면 베릴이 네게 말하겠다고 해서, 지금 내가 찾아온 거니까.”
카를로스는 갑작스러운 안젤라의 말에 도저히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폭탄을 던져 넣은 안젤라는 비교적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하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건 꽤 오래된 사실이야. 카를 네가 황태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셨으니까.”
“……그것을 지금에 와서야 이야기한다고?”
카를로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숫제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안젤라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지금도 네게 말해서는 안 돼. 이건 신전의 기밀 사항이니까.”
안젤라의 말이 옳았다. 원래라면 그녀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카를로스에게 교황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그 상대가 아무리 안젤라의 연인이며 이 나라의 황태자인 카를로스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신전과 황궁은 엄연히 별개였으니까.
“안젤라!”
카를로스에게서 분노와 당황이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리암도 놀란 듯이 안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언컨대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을 터였다. 안젤라조차도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왜 이 사실을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냐고? 나는 성녀로 살고 싶어, 카를.”
안젤라가 카를로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줄곧 그녀가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었다.
“교황 성하께서 돌아가시게 된다고 하면, 너는 내게 청혼할 거잖아.”
“무슨, 그런…! 내가 네 의견도 묻지 않고 막무가내로 굴 것 같아? 나를 겨우 그 정도로 봤어?”
안젤라의 말이 카를로스에게는 비난 같았다. 그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하지만 안젤라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라고? 너는 늘 신전이 못마땅했잖아. 카를, 네가 항상 이 나라의 유일한 태양이 되길 원했던 거 알아.”
현재 에덴버는 황제와 교황이 그 권력을 나눠 가졌다. 황제는 한 사람뿐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 지도자는 둘인 셈이었다. 그리고 카를로스가 매번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알았다.
“나는 황후가 아니라, 성녀로 살기를 원해.”
두 사람이 결혼할 경우, 카를로스가 황제가 되면 안젤라는 황후가 될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황후의 삶에 얽매여 성녀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앤지. 오히려 네게 좋은 것들을 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어!”
카를로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는 안젤라가 원하는 것들을 해 주려고 애썼다. 딱, 카를로스가 생각한 범위에서.
지금까지 안젤라는 그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제게 굳이 일일이 묻지 않아도 괜찮았다. 애초에 무언가를 해 달라고 조를 성격도 아니었을 뿐더러 어찌 되었든 카를로스가 자신을 위해 해 주는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모르겠어? 나는 네가 허용하는 만큼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없다는 뜻이야! 나는 너만을 위해 살 수 없어, 카를!”
그러나 그것이 영원토록 괜찮을 수 없다는 것을 안젤라도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하, 베를리아라면….”
“카를!”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순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에는 리암과 데니안 둘 다 놀라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안젤라는 그 말을 들어 버린 뒤였다.
“앤지, 나는….”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변명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워낙 무의식적인 와중에 말이 나온 탓에 그에 걸맞은 변명이 즉각적으로 떠오를 리 없었다.
안젤라 또한 한참을 말을 잃은 채로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그 탓에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다.
“카를, 너한테 베릴은 대체 어떤 존재야?”
안젤라가 불쑥 물었다. 데니안과 리암의 시선도 카를로스에게 향했다.
사실은 모두가 궁금했던 질문이었으니까.
“…뭐?”
카를로스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마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이.
왜냐하면 카를로스에게 베를리아는 그냥 베를리아였으니까.
다른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베를리아 리들턴.
“…나는 왜 아무도 네게서 베릴의 빈자리를 지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그 반응을 본 안젤라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휙 돌아섰다.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베를리아가 아니라 카를로스가 문제였다는 사실을.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베릴은 행동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안젤라가 경고했다. 카를로스가 돌아오는 일은 지금 누구보다 베를리아가 바라는 일일 테지만, 어찌 되었든 여기에 가만히 있는다고 한들 그의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구태여 카를로스의 편을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안젤라가 망설임 없이 문을 나서 버리자 데니안이 카를로스를 재촉했다.
“카를, 따라가지 않을 건가?”
카를로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마치 어떤 충격에 빠진 것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데니안이 답답하다는 듯 카를로스를 쳐다보더니 안젤라를 따라 나갔다.
카를로스와 단둘만이 남았을 때, 이상한 공기가 맴도는 공간에 함께 남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리암이 말했다.
“…나는 교황에 대해서 알아보고 올게.”
안젤라의 말이 거짓일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러니 이것은 자리를 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리암은 아닌 척 밖으로 나가 버렸다.
카를로스가 저 혼자 남은 안을 둘러보았다.
‘카를,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베를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베를리아가 그를 찾아온 어린 날 이후로 혼자 덩그러니 있게 된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는 제 말대로 카를로스를 홀로 두는 법이 없었으니까. 제법 머리가 크고 나서는 그게 성가시고 귀찮다는 생각도 꽤 했던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위해 살 수 없어, 카를!’
안젤라가 한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대개 다른 존재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소리가 왜 이토록이나 자신의 안에 박혀 들어오는지 카를로스는 고뇌했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깨달았다. 카를로스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날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난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의 말이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처형 전날에도 그랬다. 갑자기 그녀가 마음을 바꾸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의 명대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베를리아가 죽기를 바랐던가?
허공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표정을 다시 한번 일그러트렸다. 사실 답은 우스울 만큼 선명했다. 베를리아가 빠져나간 것을 안 순간, 왜 바로 그녀를 잡아들이지 않았는지를 생각한다면.
무너진 지하 감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봤을 때… 카를로스는 분명 안도했었다.
***
귀족들이 소집되었다. 실종된 줄 알았던 황태자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아가 붉은 액체가 담긴 약병 하나를 챙겨 들었다.
“…정말 다른 이상은 없는 거죠, 베릴?”
메리쉬가 그것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투명한 병 속의 붉은 액체는 일견 불길해 보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게 베를리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을 금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잠깐의 연극일 뿐이야.”
베를리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메리쉬를 달래며 마차에 올랐다. 생각보다 카를로스가 빠르게 돌아왔다. 신전에 심어둔 수하의 전언으로는 안젤라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였다.
‘…안젤라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수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녀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다는 것은 카를로스와 안젤라의 대화가 적어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와중에 안젤라가 카를로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카를로스는 빠르게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가 중앙 의원회에서 황태자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려는 일에 대해서 대책을 세운 것인지, 혹은 빠르게 돌아와야 할 만한 일이 생긴 것인지 의아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든, 카를로스를 직접 만나보면 알 일이었다. 베를리아가 마차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마부가 황궁에 도착했다는 말을 전해 왔다. 베를리아가 마차에 내리기 전 가지고 있던 붉은 액체를 들이켰다.
똑똑.
그리고 막 문을 열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귀족 간 노크의 횟수는 3번이 정석이었다. 2번은 오직 특정한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베릴.”
2번은 오직 특정한 신분의 사람만이 쓸 수 있다. 황족, 또는 성녀나 교황.
목소리의 주인은 카를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