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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80)화 (80/148)

80화. 단편적 진실(3)


 

좋은 추억이 없어서 연인이 된 사이가 어디 있겠는가. 응당 안젤라와 카를로스도 그러했다. 그들만의 행복한 기억이 있었다. 남에게는 평범해 보여도 서로에게만은 특별한.

‘사랑해, 안젤라.’

베를리아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 안젤라만이 카를로스의 사랑을 곱씹고 있었다. 한참을 베를리아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안젤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는 멈춰 있을 수 없었다.

***

안젤라는 처음으로 성물을 사사로이 이용해 보기로 했다. 매우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으나 의외로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젤라는 자신이 늘 성녀답게 살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이 작은 행위는 그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안젤라는 권력 다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신전의 모든 이들을 공평하게 대했다. 그것이 성녀로서의 자애로운 모습을 만들어 주었지만 이렇게 따로 사람을 부려야 할 때가 오니 믿고 비밀을 당부할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데니안에게 연락했다. 카를로스가 모종의 이유로 숨어 있는 것이라면 비밀을 지켜 줄 상대가 필요했다. 안젤라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데니안뿐이었다.

“…앤지, 네가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안젤라의 말에 기꺼이 요청을 수락하여 밤중에 신전으로 잠입한 데니안이었으나 퍽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젤라는 그 흔한 일탈이나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는 모범생 같은 성녀였기 때문이다.

“미안. 신전 밖으로 비밀리에 나가야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데니.”

안젤라는 성녀였기 때문에 낮에는 늘 그녀를 향한 시선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그녀가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카를로스에게 갈 수 있는 시간은 당연히 밤뿐이었다. 그렇지만 밤에도 신전을 정찰하는 성기사들이 있으니 안젤라 혼자서 빠져나가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데니안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디를 가길래, 이 시각에 신전을…?”

데니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되는 그의 의문은 타당했다. 성녀로서 신전에서 나고 자란 안젤라는 밖을 나가 본 적도 많지 않았으니 굳이 밤중에 꼭 가야 할 곳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카를한테.”

데니안이 멈칫했다. 그도 카를로스에게 사고가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러나 그뿐, 리암은 데니안에게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데니안도 알 수 있었다. 카를로스가 자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데니안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의외였던 것은 마치 이럴 줄 짐작하고 있었던 듯 담담했던 자기 자신이었다.

“내가 가면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겠나?”

데니안이 염려를 담아 물었다. 카를로스는 제게 일어난 일을 데니안에게 비밀로 했다. 그런데 숨어 있는 장소에 그가 가게 되면 카를로스에게서 고운 반응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카를에게 괜한 소리를 들을지도 몰라.”

안젤라가 새삼스러운 것을 인지한 기분에 데니안을 잠시 빤히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카를로스에게 미움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데니안이 염려한 대상은 오로지 안젤라였다. 그녀가 자신의 궁금함을 누르지 않고 질문했다.

“카를이 네게 왜 그러는데?”

“글쎄…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아서?”

데니안이 아주 가벼운 일을 대하듯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마치 어린애가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은 발언이었다.

“일전에 베를리아가 네게 한 행동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전히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듯 의아한 표정을 한 안젤라를 보며 데니안이 말을 덧붙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베를리아가 안젤라에게 패악을 부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안젤라만 보면 악을 쓰고 공격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오죽하면 사교계에서 안젤라를 두고 미친개의 천적이라고 불렀겠는가.

“그렇지만 그 행동에 우리가 일조했음을 이제야 인정했을 뿐이다.”

데니안은 한때 베를리아 홀로 못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짓들을 했다고 여겼다. 같은 상황이어도 모든 인간이 그녀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테니까.

“궁지에 몰린 사람은 밑바닥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하기 마련이지. 그러니 적어도 우리는 베를리아에게 그렇게 굴었으면 안 되는 거였어.”

사람의 밑바닥을 보아야만 그 인간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락을 기는 사람 중에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은 밑바닥을 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게 한 인간에게서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이었으므로.

베를리아는 카를로스를 사랑해서, 데니안과 리암을 친구로 여겨서, 철저히 그녀의 호의로 인하여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들이 단번에 등을 돌리는 상황은 당연하게도 베를리아를 궁지로 몰아갔다. 그러니 적어도 데니안과 리암 그리고 카를로스에게는 베를리아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야 받아들인 거지. 왜냐하면 악인이 하나 있는 편이 살기에는 쉽잖아?”

데니안이 제가 그동안 했던 행동을 자조적으로 평했다. 모든 죄를 뒤집어쓸 절대적인 악인. 그런 상대가 있는 삶은 편하다. 악인이라 낙인찍힌 대상을 향해서 하는 비난은 세상조차도 막지 않는다. 모두가 말하는 절대적인 악인의 행동이 진실로 잘못되었는지, 혹은 옳았던지는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세상에 절대적인 악인이 얼마나 되겠나 말이다.

“…리들턴 백작님이 그리워?”

안젤라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와 데니안, 리암에게 누군가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은 그녀가 이 세 사람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증명되었다. 결국 세 사람이 베를리아가 없어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었던 것조차 그들을 위한 그녀의 안배였던 셈이었다.

“앤지, 베릴은 베릴이고 너는 너야.”

데니안의 말에 정곡을 찔린 안젤라의 몸이 움찔했다. 그의 발언은 안젤라가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놀랍도록 콕 집어 주었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돌아오라고 했다. 안젤라가 인제 와서 자신을 향한 카를로스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적어도 그 사랑보다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카를로스는 저울질에 능한 사람이었다. 만약에 베를리아와 안젤라가 전처럼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면, 과연 그가 누구를 택할 것인가?

안젤라는 이미 두 눈으로 보았다. 데니안이, 리암이, 그리고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어떻게 버리는지를. 이제는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는 것까지도 안젤라는 알아 버렸다. 아무리 추앙받는 성녀여도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은 늘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베를리아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지만.”

변명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베를리아는 데니안과 리암, 카를로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착각했다. 자신들이 그녀에게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미성숙하고 철들지 않은 아이가 제 부모에게 할 법한 어리광이었다.

“계속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는 없지. 우리는 아이처럼 굴 나이가 아니니까.”

데니안이 말했다. 그러니까 베를리아에게 했던 식으로 안젤라에게서 등을 돌릴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어리석게 굴었던 것은 그동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토록 자신을 위해 주던 친구를 잃지 않았던가.

“카를도… 너와 같을까?”

안젤라에게서 재차 흘러나온 의문에 이번에는 데니안도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녀도 카를로스가 어떻게 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결심한 듯이 고개를 당당히 든 안젤라가 그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가자, 데니.”

확신할 수 없다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데니안이 그런 안젤라를 생경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가 달라졌듯이, 그녀도 달라졌다.

“그래, 앤지.”

데니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젤라를 데리고 신전을 나섰다. 베를리아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모두를 변하게 했다. 그 속에서 아직까지 달라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

“성녀가 신전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신전에 잠입해 있던 수하가 돌아와 베를리아에게 보고했다. 안젤라에게 말을 전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할지를 알아야만 베를리아도 자신이 앞으로 할 행동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혹시 누가 있었지?”

“데니안 론델입니다.”

베를리아는 애초에 안젤라가 혼자 신전을 빠져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신전에는 안젤라를 지켜보는 눈도 많았고, 무엇보다 안젤라가 홀로 외출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을 테니까.

“뒤쫓을까요?”

“아니, 좀 기다리는 게 좋겠어.”

수하의 물음에 베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멀리 붙여 두기를 잘했다. 예상대로 안젤라가 도움을 청한 상대는 데니안이었다. 그는 황실 기사단장인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메리쉬가 아니고서야 들키지 않고 데니안을 쫓기란 무리일 터였다. 수하를 내보낸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돌아봤다.

“멜, 구해 와야 할 것이 있어.”

“말만 하세요, 베릴.”

소설로만 알았을 때야 온실 속의 화초에 불과한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했으나, 안젤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그녀가 결심하여 카를로스를 만나러 갔다면 두 사람 간의 사이가 예전처럼 마냥 매끄러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카를로스는 성검을 찾으러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에게 틈을 내어줄 명분이 필요했다.

“네멘의 연구실에 다녀와. 반드시 중앙 의원회가 다시 소집되기 전에 돌아와야 해. 로디메일런을 가져와 줘.”

때를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의 당부에 메리쉬가 곧바로 리들턴 저택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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