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단편적 진실(2)
베를리아는 그 길로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앤지에게.>
그녀는 약아빠지게도 성녀에게 보내는 방문 요청 편지에 그렇게 적어 보냈다.
“베릴…!”
신전에서 일찍이 안젤라가 마중 나와 있었다. 베를리아가 잠시 멈칫했다. 안젤라가 진심으로 기뻐 보였던 탓이다. 오늘 베를리아는 저 기쁨에 물을 확 끼얹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안젤라와 이유 없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처럼 필요에 의해서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앤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잘 왔어요.”
안젤라가 반갑게 베를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성녀가 앞장서서 베를리아를 신전 안으로 이끄니 신관 모두가 낯선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신전이 소란스럽네요.”
안젤라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닿자 수군거리던 신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카를로스와 함께 있던 때만 봐서 몰랐지만, 신전에서는 제법 위엄 있는 성녀인 모양이었다.
안젤라가 베를리아를 자신의 개인 응접실로 이끌었다. 일전에는 카를로스나 리암, 데니안만이 들어왔을 공간이었다. 베를리아의 기분이 참 새삼스러웠다. 전에는 그토록 성녀가 초대했어도 단 한 번도 제 발로 온 적이 없던 곳이었으니까.
“일단 앉으세요. 차는 어떤 거로 드릴까요? 베릴이 찾아온 것이 처음이라 무슨 차를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서….”
안젤라는 들떠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에서 성녀란 교황과 동등한, 때로는 그보다도 높은 존재였다. 그러니 어릴 적부터 신전에서만 자라 온 안젤라에게 친구가 될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안젤라에게 그녀를 어려워하지 않고 대해 줄 친구가 얼마나 드물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카를로스나 리암, 데니안을 제외하고서는 베를리아가 유일했다. 그러니 안젤라가 여자인 친구를 갖는 일은 사실상 오늘이 처음이었다.
“앤지, 할 말이 있어요.”
베를리아가 직접 차를 우려내기라도 할 것처럼 부산을 떠는 안젤라를 멈춰 세웠다. 듣기 좋은 말을 할 것도 아닌데 대접까지 받기에는 좀 그랬다. 그녀가 안젤라를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혔다.
“교황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밝힐 거예요.”
들떠 있던 안젤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먼저 카를로스한테 그 사실을 언급할 일은 없을 테니까.’
분명 베를리아가 먼저 안젤라에게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베를리아도 자신이 뒤늦게 말을 바꾼다는 자각쯤은 있었다.
“그게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미련이 있어서는 절대 아니에요.”
베를리아가 빠르게 덧붙였다. 혹시라도 안젤라가 그런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랐다. 피차 매우 불쾌한 일일 테니까.
“반대로 황태자가 나를 붙잡았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거죠.”
안젤라는 처음 듣는 듯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역시나 베를리아의 예상대로 카를로스는 데니안을 시켜 그녀를 집무실로 데려왔던 날 있었던 일을 안젤라에게 일절 언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관이 나를 고발해서 중앙 귀족회에게 불려갔던 날, 황태자가 나를 돕겠다면서 데니안을 시켜 집무실로 데려오게 했어요.”
이전과 달리 굳어 있는 안젤라의 얼굴을 보는 것이 베를리아에게도 썩 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없는 사실을 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데니안이 나가자, 내게 그만 고집부리고 돌아오라더군요.”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카를로스를 향한 노골적인 경멸이 어렸다. 그녀는 마치 대단히 역겨운 소리를 한다는 듯이 이 자리에 없는 상대를 향한 빈정거림을 토해 냈다.
“나보고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냐면서.”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앤지, 당신 같으면… 자신이 죽이려고 한 상대를 두고, 그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어요?”
“그건….”
안젤라는 베를리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에 그 순간에 대한 끔찍함과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던 탓이었다. 절대 거짓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강렬한 거부감이었다.
“심지어 멜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거냐면서 내 목을 조르기도 했죠.”
“…리들턴 백작님이, …그냥, 당하기만 했다고요…?”
안젤라의 목소리에 머뭇거림이 가득했다. 그 음성이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말에 대한 의심보다도 제 연인이 그런 짓까지 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에 가지는 의문이었다.
베를리아는 별안간 안젤라에게 연민이 들었다. 베를리아도, 안젤라도 어쩌자고 겨우 그런 남자를 사랑하여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는가.
“황태자가 손에 끼고 다니는 성물 반지에 공간을 분리해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는 능력이 있더군요. 그 공간 속에서는 흑마법도 통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베를리아는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서로 그다지 속이 좋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니 날을 세울 것도 없었다.
에덴버는 신성 제국이었으니 황실에 성물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황태자이므로 당연히 그 성물을 꺼내 오는 것도 가능했다. 게다가 베를리아는 흑마법사였고 카를로스는 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순수한 악력에서 앞서는 그가 베를리아의 목을 조르지 못하리란 법도 없었다.
‘…카를은 레밀튼에서 베릴의 뒤에 있던 그 남자를 매번 싸하게 쳐다보고는 했지.’
안젤라도 눈이 있으니 알고 있었다. 역병의 치료가 한창일 적에,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와 함께 있던 메리쉬를 어떻게 봤는지를. 카를로스와 나란히 서 있었던 안젤라이니 더욱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모른 척했으나 카를로스의 그것은 누가 봐도 명백히 적대하는 시선이었다. 안젤라가 꾹 눈을 내리감았다.
“카를이 그랬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요…?”
‘사랑해, 앤지.’
안젤라가 확연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베를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미련스러웠다.
마치 이전의 베를리아처럼.
“내게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 데니안은 집무실에서 나가 있었고, 내 목을 조를 때 분리된 공간에는 황태자와 나뿐이었으니 카를로스 에덴버가 부정한다면 증명할 길이 없겠죠. 내가 단검으로 그 손을 베었던 상처까지도 이미 포션을 써서 치유했을 거고요.”
그래서 베를리아의 반응은 담담했다. 의심하면서도 믿고 싶은 마음 앞에서 사실은 실질적으로 별로 힘이 없었다. 결국 판단은 안젤라 스스로 하게 될 터였다.
“그런데 제가 뭘 보고 믿을 거라고 생각해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다만 나는 더 이상 카를로스와 이 세상에서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빙의했을 때부터 카를로스를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그를 마냥 우습게만 봤다. 그래서 일을 느긋하게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진심으로 누군가 손을 밀어 넣어 속을 헤집은 듯이 역겨웠다. 지금도 그 푸른 눈을 떠올리면 소름이 쫙 돋았다. 그대로 두면 카를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시라도 빨리 숨어 버린 카를로스 에덴버를 끌어내야 해요. 교황이 쓰러졌다는 말을 듣는다면 황태자도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오겠죠.”
안젤라는 성녀였으니 황태자인 카를로스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신전과 황실은 사라진 황족을 찾기 위한 성물 하나씩 쯤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무나 사용하지는 못했다. 지금 당장 황제가 성물을 이용하여 카를로스를 찾으려 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보통 그런 성물은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러나 안젤라라면 카를로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역대 중에서도 뛰어난 성녀였으니 얼마든지 자신의 성력으로 그 성물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찾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카를로스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베를리아가 세운 계획을 완벽히 성공시키려면 카를로스에게 생각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됐다. 그를 몰아붙여서 이성을 마비시키고 조급하게 해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소문을 퍼트리기 전에 성녀님이 직접 말해요.”
안젤라의 눈이 커졌다. 애초부터 베를리아가 그녀를 찾아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나는 적어도 성녀님한테 나중에 뒤통수쳤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
결국 베를리아가 억지로 이야기하게 만드는 셈이니 안젤라의 입장에서는 도긴개긴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녀는 적어도 안젤라가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를로스 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나에 대해서는 카를로스 에덴버한테 어떻게 말해도 좋아요.”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젤라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나는 딱 삼 일 뒤에 소문을 퍼트릴 거예요.”
그러니까 카를로스에게 말을 하려거든 그 전에 하라는 의미였다. 안젤라가 숨긴 비밀을 그가 소문으로 알기 전에.
“내가 교황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어서, 그 사실을 성녀님께서 먼저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전한다면 화를 조금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베를리아의 말은 한마디로 자신을 핑계로 삼아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그럴 경우 카를로스의 분노는 베를리아의 쪽으로 쏠리게 될 테니까. 그 자식이야 원래부터가 그녀를 탓하는데 특화된 인간이 아니던가.
안젤라는 말이 없었다. 베를리아는 방금 한 말로써 자신이 카를로스에게 하등 좋은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베를리아의 목적이 순전히 현재 숨어 있는 카를로스를 끌어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안젤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베를리아는 이제 카를로스에게 미움 받는 일을 전혀 개의치 않았으니까.
“솔직히 나는 성녀님께서 뭐 아쉬운 게 있다고, 그놈한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도 이해할게요.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안젤라는 카를로스의 앞에서 움츠러들 필요가 없었다. 베를리아는 그 점을 콕 집고 있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성녀님이 어떤 선택을 하실지는 스스로 결정하세요.”
베를리아가 인사를 하고는 성녀의 개인 응접실을 벗어났다. 안젤라가 무슨 선택을 할지는 말 그대로, 그녀가 정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