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추락의 전조(6)
성검의 주인에 관한 소문을 사람까지 써서 수도 전체에 퍼지도록 손써 두었다. 그것은 베를리아가 대놓고 카를로스를 도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그만 화내. 넌 나를 사랑하잖아?’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그게 그에게 독이 되는 셈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리라고 여기지는 못했을 테니까.
‘신물 나. 지긋지긋해.’
일은 제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구는 카를로스에 그녀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게 순전히 카를로스 에덴버가 진실로 어리석어서라기보다는 베를리아의 사랑을 과하게 믿어서라는 사실이 더 기분 나빴다.
“베릴, 몸이 안 좋아요?”
베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메리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차를 타고 거친 산속을 다녀오기 위해 흑마법을 계속해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의원회에도 참석하고, 그 후 소문까지 퍼트리느라 베를리아는 여태 한 치도 쉬지 못했다. 베를리아의 몸에 무리가 갔을까 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괜찮아.”
녹빛 시선이 제게 닿자 그녀가 사르륵 녹아 미소했다. 메리쉬의 행동 기저에 늘 명백하게 깔린 그 사랑과 맹목은 언제 마주해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메리쉬와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짜증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조금은 평온해진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가 파고들었다.
‘이전에도 그랬지.’
카를로스가 메리쉬를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놈이 그러더군, 자신이 너를 대신하겠다고.’
베를리아의 기억에도 없고 그녀로서도 원작에서 읽은 적이 없는 소리였다. 원작에 서술되지 않은 것쯤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원작의 주인공은 카를로스와 안젤라였고 그들이 얽히는 시점부터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러니 원작이 그 이전의 베를리아 리들턴의 서사야 관심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도 없다는 것은 이상했다. 메리쉬는 단 한 번도 베를리아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굳이 비밀로 해야만 했던 사실이 무엇이었을지 알고 싶었다.
“멜, 내가 마녀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혹시 황태자를 만난 적이 있었어?”
베를리아의 말에 메리쉬의 몸이 움찔했다.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시선이 지긋이 그에게 가닿았다.
“……일전에 베릴이 쓰러졌을 때, 황태자를 찾아갔었습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겼다.
베를리아의 몸에 빙의한 이후로 그녀는 쭉 베를리아의 기억에 동화되어 왔었다.
‘…이건 기억에 없어.’
그런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쎄한 느낌이 흘렀다. 그녀가 직접 겪지 않아서도, 진짜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 미쳐 있느라 제 몸 따위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마치 그 부분만 깡그리 도려낸 것처럼 정말로 흔적도 없었다.
베를리아가 당황한 속내를 숨기느라 말이 없자 메리쉬의 표정에 불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힐끔힐끔 베를리아의 눈치를 봤다. 늘 최상위의 포식자 같았던 메리쉬에게서 처음 보는 면모였다.
“…아, 화내는 건 아냐. 그냥.”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기억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네멘 리들턴의 실험으로 인해 신체가 개조된 베를리아는 머리도 좋았다. 웬만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만큼. 그런 베를리아를 알고 있는 메리쉬에게 기억이 없다는 말이 통할지 순간 멈칫하게 되었다.
혹시라도 메리쉬가 진짜 베를리아와 그녀 사이에서 보이는 차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
“…베릴?”
베를리아가 말을 하다 말자 메리쉬가 그녀를 불렀다. 메리쉬는 자신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비밀로 숨겨 버린 탓에 베를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지 눈치를 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의 부름이 마치 재촉처럼 느껴졌다.
문득 굳이 말을 아껴서 메리쉬와 다퉜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저 안젤라와의 대화를 묻는 게 싫었다. 사실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대화 주제로 카를로스를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덕분에 메리쉬의 오해를 사 버렸고.
“그냥… 잘, 기억이 안 나네.”
또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메리쉬와 다투고 싶지도 않았다. 대답이 나간 것은 반사적인 일이었다.
“멜, 네 말대로 쓰러져서 그런가 봐.”
말해 놓고도 걱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다급히 덧붙였다. 그게 영 변명 같아서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배릴이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다행스럽게도 메리쉬는 베를리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게 정말로 안심이 되면서도 그녀는 입이 썼다. 메리쉬에게 베를리아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녀가 베를리아로 있는 이상 그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카를로스 에덴버랑 무슨 일이 있었어?”
그녀가 괜스레 말을 돌렸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손끝에 조심스레 제 뺨을 기댔다. 그는 마치 애교 부리듯이 얼굴을 베를리아의 손바닥에 비비댔다. 가라앉은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그런 베를리아의 마음을 달래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남자다.
천성이 맹수처럼 강인하고 홀로 고고하게 살아가도록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내가 앞마당의 강아지처럼 기꺼이 몸을 낮추고 애교를 부리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해, 멜.”
이 순간만큼은 조금 전까지 궁금했던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틈새를 비집고 나가는 물처럼 사랑이 흘러나왔다.
메리쉬는 감이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특히나 베를리아에 대해서는 짐승의 것에 가까운 눈치를 보였다. 그녀의 주의를 온전히 제게로 돌렸음을 알아차린 메리쉬의 얼굴에서 불안이 가시고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내걸렸다.
“저도 사랑해요, 베릴.”
배부른 짐승같이 느긋한 목소리였다. 베를리아와 시선을 맞추기 위하여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그의 상체가 베를리아를 타고 올라왔다. 쪽. 짧게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황태자를 찾아갔던 건 베릴을 놓아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어요.”
흑마법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네멘 리들턴이 계속해서 연고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실험에 착수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흑마법으로 인해서 망가진 제 몸을 대신할 육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베를리아에 의해 죽게 되었지만.
많은 아이가 몸에 흑마법을 담기 위하여 실험을 당하다가 죽어 나갔다. 네멘 리들턴조차 점차 육체가 무너졌듯이, 흑마법이란 쓰면 쓸수록 좋은 바가 없었다.
카를로스가 황태자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베를리아는 흑마법을 쓰고, 쓰고 또 썼다. 그러니 그녀의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베릴이 흑마법을 사용하면서 종종 아프기는 했지만, 그때처럼 쓰러진 것은 처음이었죠.”
베를리아는 단 한 번도 카를로스의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늘 카를로스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성녀가 나타난 이후로 베릴은 점점 더 무리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선명했다. 마치 안젤라가 대단히 탐탁지 않은 것처럼.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서는 메리쉬가 어떻게 안젤라에게 흔들리게 된 거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베를리아를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았던 메리쉬였다. 아무리 베를리아가 세상에 없었다지만, 원작에서 안젤라에게 호감이 들어 최후의 순간에 멈칫했다면 적어도 현재 부정적인 마음은 품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멜, 성녀님을 어떻게 생각해?”
대화가 중구난방으로 튀는 것을 알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순순히 답을 내어놓았다.
“마음에 안 듭니다.”
그 대답이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내심 놀랐다. 메리쉬가 보인 모습이 있었으니 좋은 반응이 나오리라고 짐작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저런 말도 그녀의 예상 안에는 없던 것이었다. 어쩌면 무관심해서 아무 생각도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째서?”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미묘하게 들뜬 기색이 서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지만 기분이 빠르게 좋아지는 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의 일이었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복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메리쉬의 눈길조차 끌었던 상대다. 그녀의 안에서 안젤라란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베릴을 힘들게 했으니까요.”
메리쉬의 대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그래서 더욱 그 의미가 선명했다. 그의 세상은 베를리아를 기준으로 명확히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녀가 빤히 메리쉬를 바라봤다. 그녀가 베를리아로 존재한다면 메리쉬가 흔들릴 일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적어도 그것만큼은 확인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계속 저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어떻게든 평생 베를리아 리들턴으로 남을 테니까.
“멜, 저번에 리들턴의 저택에 성녀님이 찾아와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네가 물었던 날.”
메리쉬가 움찔했다. 그의 몸이 다시 긴장하는 것이 맞닿은 살갗을 통해서 베를리아에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쭉 주종 간으로만 지내 왔던 두 사람이었다. 메리쉬에게도 베를리아와의 그런 다툼은 처음 있던 일이었다.
“네가 괜한 걸 물은 게 아니야.”
베를리아가 달래듯이 메리쉬의 뺨을 나긋하게 매만졌다. 그가 더해 달라는 듯이 상체에 무게를 실어 그녀의 쪽으로 깊게 기대 왔다. 빠르게 뛰는 서로의 심장 박동이 느껴질 만큼 한 치의 틈도 없이.
“성녀는, 누구라도 사랑할 만한 면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혹시라도 네가 성녀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봐. 그게 무서워서, 그런 성녀가 질투 나서 내가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운 거야.”
그녀가 조곤조곤 제 속내를 까발렸다. 어딘가에 내보이기에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밑바닥의 마음.
그녀는 자신했다. 제가 베를리아로 산다면… 이조차도 메리쉬는 사랑해 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