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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75)화 (75/148)

75화. 추락의 전조(5)


 

회의장에 들어선 베를리아의 시선에 황제가 들어왔다. 카를로스가 황태자 자리에 오른 이후로 좀처럼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으시던 분이 아들을 내쫓을 명분이 생기니 냉큼 달려온 게 퍽 우스웠다. 황제의 속내가 그녀의 눈에는 빤히 보였다. 카를로스는 황제에게 적이었고 무서운 존재였다. 말 그대로 이 자리에 카를로스가 없기 때문에 황제가 있는 것이었다.

베를리아는 힐끔 라미르니에 후작을 바라봤다. 이 계획의 근본은 황제의 생식 능력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여 황제에게 말을 전했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래, 짐이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고?”

모든 이들이 자리하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중앙 의원으로서 참석한 귀족과 황제, 모두가 아는 연극이 시작됐다. 황제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스테먼 남작이 앞으로 나섰다. 베를리아의 기억이 맞는다면 반황태자파 소속의 귀족이었다.

‘역시 라미르니에 후작은 직접 나서지 않는 건가.’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틀어진다면 후작은 스테먼 남작을 버릴 것이다. 물론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떠올라 썩 기분이 별로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스테먼 남작이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였다. 마치 황제의 앞에서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러자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남작의 말을 재촉했다.

“괜찮으니 편히 말하라.”

황제와 스테먼 남작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동안 아무도 긴장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가 남작의 입에서 뱉어질 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황태자 전하께서….”

“큰일 났습니다, 폐하!”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고대하던 남작의 발언은 회의장의 문을 갑자기 벌컥 열고 들어온 시종으로 인해 끊겨 버렸다.

“무슨 소란이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아무리 허수아비 같은 황제라고 할지라도 한낱 시종이 감히 이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제의 서슬 퍼런 기색에 서둘러 몸을 낮춘 시종이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순간 장내에 침묵이 맴돌았다. 베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그와 동시의 일이었다.

***

황태자가 실종됨으로써 라미르니에 후작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수포가 되었다. 당연했다.

거짓으로 짜고 친 것이긴 했지만 카를로스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는 건 아직 수면 위에 떠오르지도 않은 문제였다. 아무리 다 같이 거짓으로 몰아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황태자의 정통성을 두고 하는 논쟁이 그리 간단할 리 없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은 최대한 빠르게 진행한다고 해도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지금의 카를로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황태자였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문제와 실종된 황태자의 안위. 후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카를로스가 탐탁지 않은 자들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다 싶어 황태자파가 들고 일어났다. 그랬으니 카를로스의 정통성에 관한 이야기는 입도 뗄 수 없었다.

심문하려고 해도 당사자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황태자가 실종된 시점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카를로스가 없는 사이에 일을 꾸며 황태자를 모함하려 한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몰랐다.

게다가 황족의 실종은 중대 사안이었다. 발언을 잘못했다가는 심할 경우 카를로스가 사라진 일까지 뒤집어쓰게 될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실종되었을 때 이득을 보거나 원한을 가진 사람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머리 좀 굴렸네, 카를로스 에덴버.”

저택으로 돌아온 베를리아가 불만에 찬 얼굴로 짜증스레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카를로스가 진실로 실종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카를로스가 황궁을 빠져나간 일 또한 베를리아의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 황태자는 성검을 차지하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여 궁을 빠져나왔다. 카를로스가 실종되었다는 말이 먹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워낙 비밀리에 움직인 덕에 황태자가 궁을 나가는 것을 본 시녀나 시종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알려진 바가 없는데, 궁 밖에 있던 카를로스를 누가 노리고 납치라도 했겠는가.

“지금이라도 찾으러 갈까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 물었다. 그의 생각도 그녀와 같았다. 아마도 카를로스는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아니, 어차피 카를로스 에덴버는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거야.”

베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카를로스가 실종으로 시간을 번다고 해도 언제까지 황태자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귀족들이 꾸민 일에 대항하여 그가 머리를 굴릴 틈을 만든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황태자를 마냥 여유롭게 둘 수는 없지.”

베를리아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녀가 상자에 담긴 새하얀 검을 꺼내 들었다.

“이걸 이용하자. 그러면 황태자도 나올 수밖에 없을 테니.”

카를로스가 단기간에 형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성검을 손에 넣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아마 그도 이런 행동을 하면서 성검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을 터였다.

“소문을 퍼트려야겠어.”

베를리아가 읊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쪽도 계획 수정이었다.

***

비밀리에 마련한 거처 안으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작은 오두막 안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카를….”

“리암, 어떻게 된 건지 당장 말해.”

리암을 보자마자 카를로스가 그의 말을 끊고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카를로스의 시선에 리암을 향한 명백한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카를, 바로 황궁으로 오지 말고 내가 말하는 곳으로 와 줘.’

카를로스가 막 수도에 들어섰을 때 리암으로부터 마법 전언이 왔다. 본디 황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카를로스가 다시 수도를 벗어난 이유였다.

그러나 리암이 말하는 곳으로 이동하면서도 카를로스는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당연했다. 성검에 관한 일은 카를로스가 리암에게 직접 지시했던 일이었다. 리암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 사실을 베를리아에게 발설한단 말인가.

“베릴이 네가 성검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어.”

리암이 변명처럼 말했다. 절대 자신이 먼저 나서서 카를로스를 판 것이 아니라고 어필하기 위해 그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네가 명령하기 전부터 베릴이 먼저 움직였던 거야.”

“나한테 그에 관해서 언급했어야지! 그럼 너는 베를리아의 속셈을 알면서 나를 거기에 놀아나게 했단 말이잖아!”

그러나 리암의 말은 카를로스의 분노를 도리어 부추긴 모양이었다.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높아졌다. 가문의 재건을 카를로스와 함께한 리암으로서는 황태자의 파벌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었다. 카를로스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알게 되고 난 후 드러낼 분노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따로 피신시켰건만 전혀 쓸모없었던 모양이었다.

“베릴이 내 가문을 두고 협박했어! 너도 알잖아, 내가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거!”

리암이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카를로스에게는 황제가 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듯이 리암에게는 가문이 제일 중요했다. 카를로스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기는 하나 그에게는 베를리아에게서 리암의 가문을 지켜 줄 힘이 없었다. 그런데 리암에게 뭘 어쩌란 말인가.

“베릴이라면 너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거다!”

리암의 말에 울컥한 카를로스가 외쳤다. 리암의 발언이 내포한 의미를 그도 알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그것이 힘이 약한 자신을 향한 리암의 비난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박쥐 같이 군 주제에 무엇을 잘했다고….”

그렇게 여겨지자 카를로스에게서 날선 반응이 흘러나갔다. 그리고 카를로스의 노골적인 말에 울컥한 것은 리암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베릴이었으니까!”

리암은 베를리아가 될 수 없었다. 아니, 다른 누구일지라도 카를로스에게 베를리아처럼 해 줄 수는 없을 터였다.

“베릴만이 가능했던 것들을 싫다고 내쳐 놓고 이제 와 네가 베릴을 찾는 것도 우습지 않아?”

리암이 현실을 깨달으라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카를,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넌 나를 이해해야지!”

목소리를 낼수록 리암은 점점 더 억울해지고 울컥했다. 그래, 다른 사람은 그의 행동을 비난할지라도 카를로스만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베릴보다 앤지가 필요하니까 베릴을 버린 거잖아!”

리암과 카를로스가 아는 베를리아는 안젤라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그래서 베를리아와 안젤라는 서로 절대 양립할 수 없었다. 오직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해야만 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아닌 안젤라를 택했다. 리암은 결국 제 살길이 가장 먼저인 점이 카를로스나 저나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카를로스는 저를 비난할 수 없어야 했다.

리암의 비난에 카를로스의 입이 다물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리암의 말은 전혀 틀린 바가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잠깐이었다.

“그래서?”

리암과 날 선 공방을 주고받던 방금 전과 다르게 되묻는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침착해졌다.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리암이었다.

“그래도 베릴은 날 사랑해.”

카를로스가 말했다. 그래, 안젤라 때문에 천대해도 베를리아는 늘 카를로스를 사랑했다. 제 주군보다 기사로서의 원칙에 목매는 데니안이나, 가문 앞에서 다른 건 보이지도 않는 리암과는 달리.

리암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리암의 두 눈에 처음으로 카를로스를 향한 경악이 드리웠다.

“로베르 후작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밖을 지키고 있던 리암의 수하가 그를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리암은 실언을 했을지도 몰랐다. 너 미쳤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리암이 카를로스에게서 홱 등을 돌렸다. 어쩐지 지금은 카를로스를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수하가 말을 걸어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무슨 일이지?”

안에 있는 카를로스의 정체는 수하에게도 비밀이었다. 그 때문에 리암은 오두막의 문을 미세하게 열고 수하에게 물었다.

“수도에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희소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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