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추락의 전조(4)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를로스가 홱 베를리아를 돌아봤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일렁이던 빛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빛이 워낙 위험하게 느껴졌던 탓에 그녀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쯤 라미르니에 후작이 널 위해서 어떤 일을 벌여 놓았을 거거든.”
원래는 지금 드러낼 패가 아니었다. 되도록 늦게 알아야만 카를로스가 그에 관하여 대비할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그렇지만 방금 카를로스에게서 보인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후작이 무슨….”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명실상부하게 황위 계승권이 남아 있는 황족은 카를로스뿐이었다. 그러니 기실 그를 위협하고 싶어도 그럴 방도가 없었다. 그 누구도 카를로스를 대체할 수가 없었으니까.
“너 이후로 멀쩡한 황족이 태어난 적이 없잖아?”
“다들 실성이라도 한 건가?”
베를리아의 말을 단번에 이해한 카를로스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그가 그럴 리 없다고 여긴 부분을 정확히 부정하고 있었다.
“내 정통성을 의심한다고? 그렇게 되면 자칫하다간 내전이야!”
황제란 특별한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모두가 원하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황위 계승권이 있는 것이다. 돈과 힘이 있는 자 모두가 황제의 자리를 노렸다간 끝이 없을 테고 그 가운데서 죽어 나가는 것은 약자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황족들의 황위 계승 과정이 깨끗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적어도 물 밑의 일이었다. 그러나 황위 계승권자가 없어지면 황족과 혈연이 가까운 이들이 죄다 기회를 지니게 된다. 고위 귀족 중에 황족과 피로 묶인 자들이 한둘이던가.
“아무리 라미르니에 후작이라도 그런 일을 혼자서 벌일 수는….”
카를로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전은 누릴 것을 전부 누리고 있는 지금의 권세가들이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왜 혼자서 벌인다고 생각해?”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말을 끊어냈다. 그녀가 삐뚜름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덧붙였다.
“너를 못마땅해 하는 자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카를로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황제까지.”
카를로스에게 작금의 황제는 피만 받았다 뿐이지 아비가 아니었다. 그는 곧 그것이 황제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황제는 카를로스가 혹시라도 자신까지 죽이고 황위를 찬탈할까 봐 늘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반황태자파인 라미르니에 후작과 귀족파인 아를레나 공작, 그리고 황제의 충신인 이아난 공작까지 합세한다면 카를로스가 단연코 불리했다. 특히나 베를리아가 황태자파에서 빠져 버린 지금은 더더욱.
“어차피 적법한 황위 계승권자가 없다면 가짜라도 데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황제의 사생아가 불현듯 황궁에 나타나는 일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나타난 모든 자가 황위 계승권을 가지진 못했다. 누군가는 이능이 있고, 누군가는 이능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너만 없으면 이능을 가진 황족은 더 이상 없는 셈이잖아?”
베를리아의 말을 알아들은 카를로스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카를로스가 자신의 정통성을 잃게 되는 순간, 그는 황제를 기만한 죄로 최소 사형이었다. 사형을 선고 받은 그를 빼돌려 숨만 붙여 놓는 것쯤이야 베를리아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나눠 가진 저주 또한 문제 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카를로스가 사라지면 이능은 더는 황위 계승권의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게 된다.
“판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지.”
베를리아가 팔을 과장되게 벌리면서 연극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각자 앞으로 황태자로서 밀 대상의 정당성에 관한 결함을 문제 삼지 않기로 모두가 짜고 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무나 다음 대 황제가 되겠다고 나서서 내전이 일어나지도 않을 테니까.
“이런 건방진…!”
“그 건방진 것을 황제가 허락했으니 네가 어쩔까.”
카를로스가 순간 울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말이 옳았다. 자칫하면 귀족 모두 반역죄로 목이 뎅강 날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황제의 뜻이었고 모두가 그에 침묵했다. 카를로스가 그들의 계획을 문제 삼는다고 해도 다 같이 모른 척을 하면 그만 억지를 부린 셈이 되는 것이다.
“당장 돌아간다!”
카를로스가 팔에 핏줄이 설 만큼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홱 돌아섰다. 여전히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붙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뒤를 따르는 기사는 없었다. 모두 메리쉬에 의해 베를리아와 그의 뒤편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혼자 퇴장해 버린 카를로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멜, 황태자의 앞에서 오늘 일에 대한 언급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카를로스가 사라지자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돌아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별안간 보인 힘에 대해서 몰랐다. 천만다행이었다. 카를로스가 가지게 된 힘에 대해 알 때까지 자신은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알았다면 카를로스는 제 호위들이 메리쉬에 의해 모두 나가떨어지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그가 자신의 힘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카를로스가 보인 초조함은 그녀가 자신의 가정에 확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카를로스에게 새롭게 생긴 힘은 이곳에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새로운 패였다.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그가 저렇게까지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카를로스의 정통성에 대해 말을 꺼내기 전에 그가 선수를 치면 그만이었다. 적어도 그 힘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될 때까지 귀족들은 몸을 사리게 될 터였다. 그러면 최소한 카를로스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럴게요, 베릴.”
메리쉬가 다가와 포션을 베를리아의 목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발라 주었다. 그녀의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의 몫으로 가져온 포션이리라.
“나도 포션 챙겨 왔….”
“미안해요, 베릴. 황태자랑 둘만 둬서.”
베를리아가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메리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잔뜩 굳어 있는 어깨와 악다문 턱이 메리쉬의 심정을 말해 주었다. 안타깝고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카를로스의 목을 쳐 버리고 싶었으나 계획상 그럴 수 없이 곱게 보내 주어야만 했다.
“나야말로 미안해, 다쳐서.”
“그런 말 말아요.”
“맞아, 우리가 자책할 필요는 없지. 이건 모두 카를로스 에덴버 탓이니까.”
베를리아의 사과에 메리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괜찮다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메리쉬에게 훨씬 효과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메리쉬가 졌다는 듯이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포션으로 인해 이미 사라진 멍이 있었던 자리를 안타깝게 매만지고 있었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와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목적은 다 이뤘으니까.”
아마도 돌아가면 한 차례 또 난장판이 벌어져 있을 것이다. 그곳에 참전하려면 베를리아와 메리쉬 또한 걸음을 서두르는 게 좋았다.
***
“베를리아 님, 중앙 의원회로부터 서신이 와 있었습니다.”
베를리아가 돌아오자마자 재스민이 말을 전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법으로 황태자가 계획 일부를 알게 되었단 사실을 전했더니 라미르니에 후작이 일을 앞당긴 모양이었다.
카를로스는 아마도 아직 수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베를리아야 계획을 세울 때부터 돌아오는 길까지 준비해 놨으나 그는 황궁을 급하게 뛰쳐나왔을 테니까. 게다가 메리쉬와의 전투로 카를로스의 수발을 들어 줄 기사들까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갈 때보다 오는 길이 더 오래 걸릴지도 몰랐다.
“곧바로 황궁에 가야겠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줘, 재스민.”
베를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재스민에게 말했다. 마차를 타고 쉼 없이 달려왔는데 도로 나가야 했으니 피곤하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카를로스가 없을 때 먼저 일을 쳐 놔야 그가 돌아와서 수습하기 더 어려울 것이다.
“네, 베를리아 님.”
재스민이 베를리아의 명에 따라 옷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메리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베릴, 제가 갈까요?”
중앙 의원인 베를리아의 위임장이 있다면 메리쉬가 그녀를 대신하여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일쯤이야 가능했다. 네멘 리들턴이 베를리아의 신체를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지만 기본적으로 흑마법은 시전자의 몸에 무리를 주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네멘 리들턴이 베를리아에게 새긴 저주까지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메리쉬는 급하게 외출을 하고 돌아오느라 흑마법을 계속 써야만 했던 베를리아가 걱정됐다.
“아니야, 내가 가는 게 좋아. 이 상황에서 내가 빠지게 되면 이래저래 다들 나에 대한 억측을 일삼을 테니까.”
카를로스가 적이 많냐, 베를리아가 적이 많냐를 다투어 봤자 정말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카를로스를 공공의 적으로 둔 지금 귀족들은 일시적으로 그녀와 손을 잡고 있었으나 언제든 그것을 놓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적이 많았기에 베를리아의 몸 상태는 외부에 철저히 비밀이었다. 그런데 하필 카를로스를 치려는 이 중요한 순간에 베를리아가 몸을 사리고 메리쉬를 내보냈다가는 온갖 말이 돌 것이 뻔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쉴 수도 없는 이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베를리아의 말이 옳았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반기를 들어 굳이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똑똑똑.
“베를리아 님,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들어와.”
재스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를리아가 허락하자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하지 않았으나 메리쉬가 갈아입을 복장 또한 함께였다.
잠시 후 황궁에 가기에 완벽한 옷차림을 한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리들턴 저택을 나서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