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추락의 전조(3)
처음부터 이 판은 베를리아가 짜 놓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마차를 달리는 데 필요할 말 또한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 므시아의 일원들은 제국 내 각지에 있었다. 성검이 있는 장소로 가는 길 또한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므시아를 시켜 그 길에 말을 대기시켜 놓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마법을 걸어서 말들의 몸을 강화한다고 할지라도 말이 가진 기본적인 체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를로스가 말들을 혹사해서라도 달렸던 반면 베를리아는 매번 건강한 말들이 마차를 이끌게 했다. 그녀가 그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베를리아는 여유롭게 동굴에서 카를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와 기사들의 기척을 느낀 메리쉬의 신호에 맞춰 카를로스 일행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분명, 네게…… 돌아올 기회를 줬어.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베릴?”
그 고요를 깨고 카를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의 음성이 기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내재한 배신감을 드러내듯이.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믿음을 준 일이 없었으므로.
“상황 판단이 안 돼? 이게 내 대답인 거.”
베를리아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그녀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영원토록 자신을 사랑하리라 굳건하게 믿고 있는 카를로스 에덴버가 정말 싫었다. 싫고 끔찍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굳이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 카를로스를 향한 선명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왜?”
카를로스에게서 곧바로 반문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제 기사들의 앞이란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제 주군의 사적인 이야기에 떨어져 있고 싶어도 눈앞에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있던 탓이다. 베를리아는 흑마법사였고 메리쉬는 그 기백만으로도 강함이 느껴졌다. 기사들은 제 주군을 홀로 둘 수 없어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소름 끼쳤다. 베를리아는 진심으로 제게 저런 질문을 하는 카를로스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애써 스스로를 다스렸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그녀의 기준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저번에 확인했다. 애초에 베를리아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부터 카를로스는 글러 먹었다.
“네가 싫어. 카를로스 에덴버.”
그녀가 담담히 내뱉었다. 베를리아의 몸에 빙의하기 전부터 그녀는 카를로스가 싫었다. 싫기만 했을까?
“경멸스러워. 끔찍해. 소름 끼쳐. 네가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그녀의 입에서 악담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곳에 빙의한 이래 베를리아는 매번 빈정거리고 낮잡아보며 카를로스를 도발하기에 바빴었다. 이렇게 굳이 의도하지 않고 감정에만 집중하여 솔직하게 심정을 토해낸 것은 처음이었다.
“왜냐고 물었어?”
글쎄, 지금도 어째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카를로스 에덴버가 증오스러운지는 그녀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너 같은 걸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데?”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저 남자는 사랑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존재라는 점이었다.
순간 카를로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울컥하여 베를리아의 쪽으로 한 발 다가왔다. 그러자마자 메리쉬가 앞으로 나서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카를로스가 맹렬한 시선으로 메리쉬를 노려봤다.
“레이날드 경, 저놈을 치우도록.”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명령했다. 레이날드는 황실 부기사단장이었다. 굳이 그에게 명하는 것은 기사단 모두에게 그녀로부터 메리쉬를 온전히 떨어트려 놓으라고 지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순식간에 모든 기사가 메리쉬를 향해 검을 겨눴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베를리아가 눈을 번뜩이며 경고했다. 흑마법은 세상의 질서를 어그러트리는 힘. 그녀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오르자 땅이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처음 보고 겪는 현상에 기사들이 긴장한 채 멈춰 섰다.
“베릴……!”
카를로스의 표정에 분노가 차올랐다. 누가 봐도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보호하는 형국이었다. 심지어 네멘 리들턴이 죽은 이후, 오직 카를로스를 위해 사용하던 그녀의 힘을 써서.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곁에서 튕겨 나갔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기사들이 메리쉬에게로 달려들었다.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오려던 메리쉬의 움직임이 기사들에 둘러싸여 막혀 버렸다.
베를리아는 얼른 카를로스를 돌아보았다. 카를로스의 손가락에 끼워진 예의 그 성물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전처럼 그가 공간을 분리해 버렸음을 알아차렸다.
“미친놈……! 이거 안 치워?”
베를리아가 힘을 일으켰다. 그러나 공간은 잠잠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리카의 말대로 신성력과 흑마법이 상극이라 할지라도, 베를리아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 성물이 대체 무엇이기에 흑마법조차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전에도 그랬지.”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카를로스가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았다. 뿌리치기 힘든 강한 힘에 통증이 느껴져 베를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수한 완력만으로는 카를로스를 이기기 힘들었다.
“아프니까 이거 놔!”
베를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안광을 기이하게 빛내고 있는 카를로스는 그녀가 저항할수록 팔을 더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
“저놈이 그러더군, 자신이 너를 대신하겠다고.”
그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원작에서도,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에도 없는.
“너, 그때부터 저놈이랑 그런 사이였던 건가?”
카를로스가 고개를 숙여 베를리아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에 메리쉬에 대한 적개심과 그녀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무슨 소리야. 대체 언제를 말하는…….”
“시치미 떼지 마! 네가 감히 먼저 날 버리게 둘 것 같아? 그러느니 이번에야말로 죽여 버리겠어.”
‘이번에야말로.’ 마치 저번에도 이와 같은 이유로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했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힘을 빼앗으려고 죽이려 했던 게 아니야……?’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카를로스와 대치했던 이후로 생겨났던 의문이 강렬하게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베를리아의 턱을 붙잡고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강압적인 손길에 그녀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말해, 베릴. 나한테 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저놈 때문인가?”
푸른빛의 시선이 칼날에 도는 예기처럼 섬뜩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 단언컨대 그녀로서는 베를리아에게 빙의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살기였다.
“저놈을 사랑해?”
베를리아의 턱을 쥐고 있던 카를로스의 손이 어느덧 미끄러져 그녀의 목을 감쌌다. 베를리아가 대답이 없자 그 손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읏……!”
카를로스의 시선이 느릿하게 공간 밖의 메리쉬를 향했다가 베를리아에게로 돌아왔다.
“그래?”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눈은 지금 당장 누구라도 죽일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 베를리아든, 제게서 그녀를 빼앗아간 원흉이라 생각하는 메리쉬든.
“저걸 죽이면,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려나.”
“……웃, 기지 마!”
“윽!”
그 순간이었다. 칼날이 카를로스의 손목을 베고 지나갔다. 베를리아가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높이 쳐들고 카를로스의 손가락에 끼워진 성물 반지 위로 찍어 내렸다.
“베를리아!”
재빠르게 손을 빼낸 카를로스가 흰자위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 신체 능력은 당연히 검을 다루는 그가 베를리아보다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의 손목과 손가락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상대로 방심한 탓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제 허벅지 쪽에 묶여 있던 단검을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않은 덕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침착했다. 베를리아의 몸에 빙의하기 전에 누군가를 이렇게 공격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녀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이상하리만치 카를로스 에덴버를 공격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고는 없었다.
‘베를리아 양, 이걸 가져가요.’
베를리아가 피가 묻은 단검을 내려다봤다. 리리카가 준 것이었다. 왜였을까? 메리쉬가 곁에 있었고 베를리아는 흑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물론 몸을 지키는 무력 수단 하나쯤 지니고 다니는 것이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쩐지 한 번쯤은 이 단검이 필요하리란 직감이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베릴!”
카를로스가 상처 입어 성물을 다루는 데에 틈이 생긴 모양이었다. 분리되었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황태자의 기사들을 모두 제압한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로 달려왔다. 베를리아의 상태를 향한 녹빛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에 자리 잡은 목과 팔의 푸른 멍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놈, 그걸 어떻게.”
카를로스가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메리쉬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성검의 생김새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리고 메리쉬가 잡은 검에서는 강력한 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성검을……!”
누구보다 성력을 예민하게 느끼는 카를로스였다. 그는 메리쉬의 손에 들린 것이 성검이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분노했다.
카를로스의 시선에 메리쉬의 품에 반쯤 안긴 듯한 베를리아와, 메리쉬의 손에 들린 성검이 동시에 들어왔다. 카를로스에게서 별안간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성력……?!’
눈이 부신 빛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베를리아가 놀라 카를로스를 빤히 쳐다봤다.
“네놈 따위가 내 것들을 탐내?!”
카를로스에게서 피어오르는 빛이 위험하게 넘실거렸다.
‘아니야, 저건 성력이 아니라…….’
성력은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카를로스는 얼마든지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보호하듯 막아섰다. 그녀도 그도 느꼈다. 지금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거야,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의 외침이 다급히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