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14)
“…베릴이 말리시지 않았다면 제가 황태자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베를리아를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메리쉬는 자신이 카를로스를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황태자가 죽었더라면 그가 나눠 받은 네멘 리들턴의 저주가 베를리아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왔을 테니까.
다만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메리쉬가 일방적으로 카를로스의 목숨을 위협하는 장면이었으니까.
“…알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이에 끼어들고 나서야 알았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태자의 손에 들린 검이 높게 들리고 그것이 메리쉬의 심장을 꿰뚫던 그 끔찍한 잔상 때문에.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생생한 환상을 봤거든.”
베를리아의 손이 메리쉬의 옷 위로 심장 부근을 문질렀다. 그때는 진실로 그에게서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그가 괜찮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시야 가득 피가 낭자했고 피 냄새가 후각을 점령했다. 그 비릿한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조심해요, 베를리아양.’
리리카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 경고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나? 아니면… 메리쉬?’
지금까지는 만만하게만 보고 있었던 카를로스에 대한 경계심이 확 올라왔다.
“황태자를 조심해, 멜.”
객관적으로 지금의 카를로스는 메리쉬에게 적수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그럴 터였다. 소설 속과 달리 황태자는 지금도 미래에도 성검을 얻지 못할 테니까.
“괜찮아요. 제가 더 강해요, 베릴.”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안심시키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그를 붙잡았을 때부터 여전히 베를리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단언컨대 메리쉬도 이렇게 두려워하는 베를리아는 본 적이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방심하는 순간…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메리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리리카의 경고가 떠올랐다. 이 순간 어쩐지 그의 경고가 황태자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직감이 들었다.
“베릴, 라미르니에 후작이 저에게 접근해 왔어요.”
메리쉬는 자신이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베를리아에게 반황태자파측 수장이 접근했다는 사실을 숨길 마음은 없었지만 베릴이 지쳐 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꺼낸 것은 그런 이유였다. 카를로스를 하루빨리 치워 버려야 베를리아도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쪽은… 황태자의 정통성을 의심하더군요.”
“…정통성을?”
베를리아가 되물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생각보다 원작에 더 많이 의지하고 있었음을 인지했다. 원작에서는 누구도 카를로스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카를로스 이후로 제대로 된 황족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네, 그 당시 황제의 생식 능력을 의심하더군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 황제에게는 황후와 많은 후궁이 있었다. 사실 황제가 건드리고 다닌 사람의 수를 생각하면 그 자식들의 수가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실제로 카를로스가 태어난 이후로도 황제의 후궁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귀족들이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끊임없이 사람을 바친 탓이었다. 그런데도 카를로스 이후로 멀쩡한 황족은 태어나지 않았다.
현재의 황태자 이후로 황족들이 적게 태어난 이유도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그들 모두 무사히 자라지 못했다. 임신한 후궁이 사산을 하거나, 아이가 태어나다가 죽거나, 혹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여 이른 나이에 병이 걸리거나,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거나. 모두 그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전 세상의 세계사 중 한 부분이 떠올랐다. 영국의 헨리 8세는 교회의 극심한 반대에도 결국 총 6번의 결혼을 했다. 그 외에도 헨리 8세는 수없이 정부를 두었다. 그런데도 결국 헨리 8세에게는 자식이 몇 없었다.
무수한 역사 속에서 왕의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은 참으로 많이도 내쳐졌다. 그러나 사실 그토록 많은 상대와 관계를 맺었음에도 소수의 자식밖에 낳지 못했다면 확률적으로, 여인들보다는 그들과 잘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가?
그런 시점에서 귀족들이 현 황제를 의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헨리 8세가 유전적인 문제로 자식을 낳지 못했다면 현 황제는 생활이 지나치게 방탕한 것이 문제였다.
황제파조차도 혀를 내두를 만큼 황제는 자유롭게 살았다. 신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태어나는 황족의 이능은 기본적으로 황족들에게 강건한 육체를 부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황제가 골골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엉망으로 생활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육체로 과연 아이를 임신시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심할 만도 했다.
“그런데 카를로스에게는 황족의 이능이 있잖아.”
그 사실은 누구보다 베를리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원작 속에서도 카를로스는 황족의 이능을 사용했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이능을 사용할 줄 몰랐더라면 베를리아의 저주를 나눠 받지도 못했을 터였다.
“모든 황족에게 이능이 발현하지는 않죠.”
가끔 그런 황족들이 있었다. 황족의 이능이 발현되지 않는. 그 경우에는 정통한 황제의 핏줄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황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
“이능을 가진 자식은 이능을 가진 부모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고요.”
그래서 황실에서는 아무나 이능을 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계책을 냈다. 이능을 가진 황족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까.
황태자가 정해지면 성인이 된 모든 황족은 궁을 나가야만 했다. 황족이 국외로 나가 혼인하게 될 경우, 신전은 그 황족에게서 이능을 빼앗았다. 궁을 나가 제국의 귀족들과 결혼을 한 황족의 이능은 당장에는 빼앗지 않았으나 그 또한 시한부에 불과했다. 황제가 안정적으로 황위 계승권을 가진 자식들을 세 명 이상 확보하는 순간 이능을 빼앗기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혹시라도 그사이에 태어난 그들의 자식이 이능을 가졌다면 자식 역시도 똑같았다.
“…설마 그 당시에 나타난 에버든 공작의 손자를 카를로스의 어머니와 엮으려는 건가?”
사실 저 방식은 이능에 대한 황족들의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혹시라도 황제가 이능을 가진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어 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황족들의 이능을 당장 빼앗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능력을 빼앗을 때까지 상당한 기한이 있었기에 종종 허점이 드러나고는 했다.
예를 들어서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황족만이 가져야 할 이능을 가지고 나타나는 경우.
카를로스가 태어나기 4년 전쯤에, 선황의 형제인 에버든 공작의 손자가 나타났다. 에버든 공작과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공작에게 알리지 않고 낳은 사생아 딸의 아들이었다.
황족의 이능은 황족마다 발현되는 종류가 모두 달랐다. 그리고 하필 에버든 공작의 손자는 마법과 비슷해 보이는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에버든 공작가와 그 손자가 작당하여 황실을 속인 탓에 그것이 마법이 아니라 이능임이 알려진 것은 에버든 공작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지 3년 하고도 5개월이 더 지난 뒤였다.
기록에 따르면 사실 카를로스의 어머니와 그 손자가 더 잘 어울리기는 했다. 카를로스의 어머니와 현 황제는 12살이나 나이차가 났고 그 손자와는 나이대가 비슷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그 정도로는 너무 약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의 어머니가 외도했다기에는 너무 근거가 없는… 아.”
카를로스의 어머니는 후궁 중에서도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던 약소국의 왕녀였다. 그런 그녀의 입장에서는 정절을 의심받는 것은 더없이 억울한 처사였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자신의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면서 메리쉬가 하고자 하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애초부터 카를로스의 어머니에게 황제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반황태자파 혼자 계획한 일인가?”
귀족들은 물론이요, 황제도 현 황태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제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황태자. 각자가 지지하던 황위 계승자가 있는 귀족들은 분노했고, 황제는 자신조차 죽일까 봐 제 아들을 두려워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통성이 훼손된다면?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가 카를로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받들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에게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었다면 말이 달라진다.
“황제에게 곧 답을 받아오겠다고 하더군요. 황제가 아니어도 귀족파와도 접촉해 볼 생각인 것 같고요.”
황제와 정말로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황태자를 몰아가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터였다. 게다가 다른 파벌보다도 황제가 더 거래하기 만만한 상대였다. 귀족파의 수장 아를레나 공작은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황제가 자신의 생산 능력을 의심받는 일에 대하여 자존심 상해한다면 문제가 될 터였다. 사실 힘없는 황제보다는 황태자를 싫어하는 다른 귀족들과 합심하는 것이 더 좋기도 했다.
원작에서 카를로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사실 누가 억지로 몰아가지 않고서야 카를로스의 어머니는 그 흔한 염문설 하나 뿌리지 않았으니,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카를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 신전에게서 무려 성검을 빼앗아 온 황태자를 반대할 명분이 있을 리 없으니 정통성으로 괜히 걸고넘어지는 일은 안 하느니만 못했을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황태자의 지위는 위태로웠고 이 상황에서 정통성까지 의심받는다면 나락으로 처박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베를리아는 이것이 썩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리암에게 사람을 보내야겠어.”
그래서 그녀는 이 계획에 날개를 달아 주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