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13)
그 순간이었다.
쾅!
굉음이 울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황태자의 집무실이 통째로 흔들렸다. 베를리아가 다급히 소파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카를로스도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느라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쾅! 쾅! 쾅!
거대한 망치로 황궁을 송두리째 부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내리치는 소리가 연달아서 울렸다. 카를로스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불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롭게 깜박깜박했다.
“저 정신 나간 놈이…!”
카를로스의 입에서 경악 어린 욕설이 흘러나왔다. 쩌적. 순간 카를로스의 손가락 위에서 성물에 금이 갔다. 작은 반지에서 들려 왔다기에는 지나치게 큰 소리였다. 황태자의 고개가 홱 반지로 돌아갔다. 쩌적, 쩌적. 성물에 점점 더 금이 생겨났다.
콰앙!
밖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몰랐더라면 황궁에 폭격이라도 일어났다고 여길만한 굉음이었다. 결국 반지의 빛이 희미해졌다. 결국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공간을 분리해놨던 힘이 흩어졌다.
까강! 검날이 긁히면서 파이는 소리가 났다. 메리쉬가 내리친 검을 카를로스가 겨우 받아내고 있었다.
“네 놈, 진작 죽일 것을.”
메리쉬의 목소리는 음산했다. 그의 뒤로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서 난동을 피운 자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왔던 기사들이 의식을 잃은 채로 누워 있었다.
“메….”
지끈. 머리가 울렸다. 누군가 뇌 속을 바늘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날카롭고 뾰족하게 헤집는 고통이 베를리아의 머리를 강타했다.
챙, 채앵…. 검이 오가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흐려지는 시야에서 메리쉬는 눈이 돌아가 황태자를 죽이려 들었다. 그조차도 눈앞이 흔들려 그녀는 똑바로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눈살을 찌푸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베를리아의 불안정한 초점 아래 메리쉬와 카를로스의 모습이 하나로 겹쳐졌다.
놓게 치솟는 검. 차디찬 금붙이가 심장이 내리꽂혔다. 피가 튀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네가, 죽는다.’
메리쉬를 구해야 했다.
“안 돼…!”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여전히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 베를리아는 양쪽을 밀어냈다.
“…베릴.”
베를리아가 주저앉은 채로 자신의 이름이 들려 온 쪽을 올려다봤다. 시야가 흔들려 몇 번이고 미간을 찌푸린 후에야 겨우 초점이 맞았다.
“…멜?”
머릿속에 들이닥친 찰나의 고통이 컸던 모양인지 목이 까끌까끌했다. 그리고 뒤늦게 명확한 현재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메리쉬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베를리아의 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뛰어난 검사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죽었을지도 몰랐다.
분명 카를로스의 칼이 메리쉬의 심장에 박혀 들어가는 것을 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았다. 눈앞이 물들 정도로 피가 낭자하지도 않았다.
피가 나는 곳은 검을 쥔 메리쉬의 손뿐이었다. 아무래도 성물의 힘이 둘러싼 집무실의 문을 강제로 열려고, 될 때까지 내려친 모양이었다.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검사일 그가 손에 오러를 두르고도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절박했다는 뜻이었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길을 잃고 흔들렸다. 정신없이 뛰어들어 이성을 차리고 보니 마치 모양새가… 그녀가 메리쉬로부터 카를로스를 보호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베를리아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했나.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비켜라, 베릴. 나는 괜찮….”
“닥쳐, 카를로스 에덴버!”
카를로스의 착각 따위 상관없었다. 그러나 메리쉬가 오해하는 것은 싫었다. 베를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스스로의 음성이 마치 비명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메리쉬의 앞에 주저앉아 있다는 자각조차도 없었다. 그저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를리아가 무릎걸음으로 기어 메리쉬를 붙잡았다. 꼬인 상황과 아직까지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환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멜, 아냐.”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그리고 그녀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메리쉬가 하고 있을 오해를. 그 찰나의 시간이 베를리아에게는 억겁 같았다. 제 모습이 무릎 꿇고 구걸하듯 비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스스로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차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일어나요, 베릴.”
상체를 굽힌 메리쉬의 팔이 쑥 그녀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베를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은 메리쉬가 그대로 그녀를 번쩍 들어 일으켰다.
“베릴이 무얼 했든….”
메리쉬의 손이 섬세하게 베를리아를 살폈다. 주저앉아 있느라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펴 주고 머릿속을 강타하던 고통에 그녀가 제 손으로 헤집어 엉망이 된 머리칼도 정돈해 주었다. 그의 손이 베를리아의 허리를 매만져 곧게 서도록 만들었다.
“설령 당신이 날 죽이더라도, 내게 무릎 꿇지 마세요.”
메리쉬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이것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듯이.
‘카를, 내가 잘못했어.’
언제나 고고하고 오만하던 베를리아였다. 메리쉬는 그런 그녀를 감히 무릎 꿇리는 황태자의 목을 매번 베어 버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곱씹었다. 누구도 감히 베를리아를 그리 대할 수 없었다. 그것이 메리쉬, 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게 명하세요.”
메리쉬의 손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이 베를리아의 뺨을 감쌌다. 기꺼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낮춘 그가 덧붙였다.
“베릴을 무릎 꿇리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내게 그들을 베게 하세요.”
내가 있는 한은 두 번 다시 누구도 당신을 무릎 꿇리지 못하리라.
메리쉬의 시선이 힐끔, 잠시간 카를로스를 스쳤다. 그의 말에는 응당 저자 또한 포함이었다.
“그만 가요, 베릴.”
베를리아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메리쉬는 진즉에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책했다. 가까이 끌어안고 있으니 그녀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의 온기를 나눠 주려는 것처럼 베를리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래, 가자.”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베를리아의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빳빳하게 굳어 있던 목이 뻐근했다.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긴장에 아주 많이 떨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쩌면 메리쉬가 오기 전부터.
“잠깐, 베릴…!”
카를로스의 손이 뻗어졌다. 탁! 매서운 소리가 났다.
“감히 어디에 손 대.”
카를로스의 손이 베를리아에게 닿기도 전에 메리쉬가 그 손을 쳐내버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아… 그만 화내. 넌 나를 사랑하잖아?’
미친놈. 치가 떨렸다. 다시 떠올려도 소름이 돋았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손이 살갗에 닿았다면 경기를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황태자는 미쳤다. 메리쉬가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리아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 순간의 카를로스는 그녀가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빙의한 이후로 원작과 다른 일이 종종 벌어졌지만, 이토록 당혹스러운 일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
황태자는 바닥에 넘어져 있고 그를 제외한 두 사람은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였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돌아가자.”
가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카를로스를 다시 상대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그래요. 피곤하면 한숨 자요, 베릴.”
두 사람의 뒷모습을 카를로스는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메리쉬의 살기는 매우 정제되어 있어서 베를리아는 그의 품에 안온하게 안겨 있었으나, 카를로스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검을 나눌 때마다 카를로스는 적나라하게 깨달았다. 그는 절대로 메리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성검만 내게 있었다면…!’
카를로스가 이를 아득 악물었다. 성검을 하루빨리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카를로스의 시선이 메리쉬에게 안겨 있는 베를리아에게 집요하게 가 닿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치 그 자리에 카를로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
정신이 혼몽했다. 피로감이 너무 강렬해서 고개를 들 힘도 없었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의 진을 빠지게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겨우 카를로스 에덴버 따위를 상대로 그토록 긴장했다는 게.
“…멜, 손은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들어 운을 뗐다. 메리쉬가 시선을 내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황태자 구하려고 한 거 아니야.”
메리쉬에게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자 그녀 안의 부담감이 조금은 덜어졌다. 피로감에 짓눌리는 까닭에 베를리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까 싸우던 메리쉬와 카를로스의 사이로 끼어들던 때와는 달리 보랏빛 두 눈은 뚜렷했다.
베를리아의 손이 가만히 붕대가 감긴 메리쉬의 손을 매만졌다. 어차피 돌아가면 포션으로 금방 치료할 수 있을 테지만,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문을 내리쳤을 메리쉬를 생각하니 애틋하고 안쓰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요?”
메리쉬의 손이 가만가만 베를리아를 보듬었다. 그녀의 지친 기색을 알아차린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상냥했다. 그제야 베를리아는 메리쉬가 마차에 탄 이후 일부러 조용히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지친 그녀를 피곤하게 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이 세계에 들어와서 이토록 지쳐본 것이 처음이기 때문일까? 무언가 울컥하면서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젤라와의 대화 내용을 굳이 고집을 부려 알려 주지 않음으로써 그의 기분이 상하게 만든 것도, 평소와 달리 이상한 황태자의 행동에서 그녀를 구하려고 애쓴 그를 막아섰던 것도 그녀가 아니던가. 그러나 메리쉬는 여전히 베를리아에게만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베를리아 리들턴이라서? 만약 내 정체를 들키게 되면 너는 이런 사랑을 더 이상 보여 주지 않는 걸까?’
그녀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보랏빛 눈을 섬뜩하게 빛냈다. 만약 그렇다면… 절대로 자신이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님을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리쉬를 사랑한다는 것을 자각한 이유로 내내 이어져 오던 갈등이었다. 그러나 메리쉬의 한없이 퍼부어지는 사랑 앞에 그녀의 답은 명확해졌다. 사실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갈등을 끝낸 그녀가 말을 이었다.
“황태자가 너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