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12)
베를리아가 또 신전을 뒤흔들어 놓았다. 심지어 이번에는 귀족들까지도. 게다가 안젤라 또한 리들턴의 저택을 찾았다. 그 일들이 한 번에 몰려왔을 때 카를로스가 내린 판단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모든 것을 잡을 수 없다면, 상황을 손아귀에 지고 있는 베를리아를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네가 내게 서운했던 것은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고 돌아 와.”
‘저 미친놈…!’
달그락, 그녀의 거친 손짓에 찻잔이 잔 받침과 부딪혀 소리를 냈다. 아직은 완전히 식지 않은 찻물이 넘쳐 베를리아의 손을 적셨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욕설이 곧장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것이 용했다.
“베릴! 괜찮나?”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로 훌쩍 다가왔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손을 잡고 심하게 데이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진심으로 걱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베를리아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미친놈.”
베를리아는 이번에는 흘러나오는 욕을 참지 않았다. 뻔뻔하기도 저리도 뻔뻔할 수가 없었다. 베를리아를 물로 봐도 유분수지, 지금 뭐하자는 짓이란 말인가.
불쾌함이 온몸을 기어올랐다. 문득 떠올랐다. 그녀가 아는 원작 속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휙 고개를 들어 카를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자신에 대한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랑을 여전히 의심하지 않는다.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것은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카를로스는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했고, 그녀는 황태자를 매번 곤궁에 빠트렸다. 누가 봐도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차라리 이렇게 소름이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봐도 카를로스의 믿음은 정상이 아니었다.
설령 사람들이 끝없이 수군거려 사실에 대하여 긴가민가한 기분이 들더라도 카를로스만큼은 헷갈려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그가 직접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했는데.
카를로스가 눈썹을 약간 찌푸리더니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네 반항은 이 정도면 됐어.”
“미친놈.”
베를리아의 입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욕이 튀어나왔다. 너무 황당하다 보니 머리가 멍해져서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은 탓이었다.
한때는 이와 비슷한 가정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나를 죽였음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얼마나 맹목적이기 그지없는 사랑인가. 그녀는 분명 처음에 그런 흉내를 내서 나중에 카를로스의 뒤통수를 친다는 계획도 세워 보았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그녀가 책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의심이 많았고 베를리아에 대한 그의 감정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런 황태자가 허술한 계획을 신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만 빼면 정말로 말이 되지 않는 계획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싫었다. 소설을 읽을 때부터 카를로스 에덴버가 끔찍하게 싫었는데, 베를리아에 빙의한 후 그를 대하면서 더더욱 미워졌다. 그런 상대를 곱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역겨웠다.
그래서 초기에 가정했던 어설픈 계획 따위 당연히도 폐기했다. 그런데 지금 카를로스의 행동을 보면 그 계획이 진실로 가능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 에덴버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딴 계획이 통한다는 말인가.
그제야 어쩌면 오래전에 떠올렸어야 했을지도 모를 의문이 들었다.
‘베를리아가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고, 죽이려 들어도 여전히 사랑하리라고 생각했다면…. 카를로스는 왜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한 거지?’
베를리아가 가진 것들이 탐이 나서? 악의 세력인 므시아를 척결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모두 퍽 이상한 가정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일지라도. 그런 베를리아였다. 만약 카를로스가 더 이상의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한다면 베를리아가 그 말을 거부했을까?
실제로 베를리아는 귀족들에게 그토록 괄시당하면서도 그들을 처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베를리아에게 귀족이란 카를로스에게 도움이 될 쪽과 되지 않을 쪽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모욕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토사구팽. 그것은 토끼 사냥이 끝나 개가 쓸모없어졌을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단 한 번도 쓸모없던 적이 없었다.
“너,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소설 속에 빙의해서 카를로스를 마주한 이래 처음이었다. 뭔가 마주하지 말아야 할 것을 눈앞에 둔 기분이 들었다.
므시아만 해도 그랬다. 므시아의 일원 중에는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자들이 수두룩했다. 대개 그런 이들에게는 정도라는 것이 없기 마련이었다. 원작 속에서 베를리아의 손으로 해체되었던 므시아가 메리쉬에 의해 다시 결집한 것 또한 그런 까닭이었다. 황태자는 베를리아의 재산과 힘은 손에 넣었지만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데다가 방향 없이 날뛰는 므시아를 휘어잡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런 므시아를 통제하던 것이 베를리아였다. 즉, 베를리아를 죽이지만 않았으면 므시아는 쭉 카를로스의 것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정면에 내세웠던 탓에 정적을 제거하며 벌어진 악행들로 인한 질타는 모두 베를리아가 독차지하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베를리아가 살아 있는 편이 카를로스에게는 나았다.
‘그러면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홧김에…?’
그녀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황태자를 쳐다봤다. 카를로스의 푸른 두 눈이 집요하게 베를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이 세상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었다. 지금까지는 여주인공을 죽이려고 한 악녀를 처단한 남주인공의 행동에 의심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은 소설 속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 눈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보아 온 카를로스 에덴버는 한심했지만 아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베를리아에게 화를 낼 때를 제외하면 상당히 교활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를로스는 제 형제 모두를 죽이고 황태자위를 차지한 자였으니까.
‘그런 놈이 겨우 홧김에, 충동적으로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했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녀의 판단은 원작에 기인했다. 그러니 옳아야 했다. 그런데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 있었다. 있어야만 했다.
‘뭐지? 뭐야? 뭔데? 뭘까…? 내가 대체 무엇을 놓친 거지?’
그녀는 패닉 상태였다. 그 틈으로 카를로스가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베를리아의 뺨을 감싸왔다.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창백한 베를리아의 피부에 닿는 손의 온도가 너무 뜨거웠다.
“베릴.”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베를리아의 온몸에 엉겨들었다. 그 음성이 발끝부터 목 끝까지 숨 쉴 틈 하나 없이 그녀를 조여 왔다. 소름 돋게 끔찍했다. 그런데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너야말로 인제 그만 심술부리고, 내게 바라는 것을 말해. 저번 일에 대한 사과로 특별히 들어줄 테니.”
“너 진짜 미쳤어?!”
그녀가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베를리아가 자신의 뺨에 닿아 있던 카를로스의 손을 내쳤다.
카를로스가 말한 ‘저번 일’이란 마녀사냥을 이용해 베를리아를 단두대에 올리려고 했던 것을 의미할 터였다. 대체 어떤 목숨값이 사과로 해결이 된다는 말인가. ‘특별히’라니. 왜 너는 대체 내게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구는가.
몰이해가 이토록 공포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아… 그만 화내. 넌 나를 사랑하잖아?”
카를로스가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보듯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그저 삐지기라도 한 듯이 굴었다. 도대체 저 절대적인 확신과 자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나는 네게 내 사랑이 없는 네 처지를 알게 해 주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변한 느낌이었다.
“미친놈. 난 갈 거야. 너랑 할 이야기 더 없어.”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미친놈이라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은 흡사 난데없이 광인을 만난 사람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카를로스의 손이 그런 베를리아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다시 주저앉혔다.
“베릴, 우리 이야기 아직 다 안 끝났잖아.”
‘제정신이 아니야.’
베를리아는 단언할 수 있었다. 황태자는 미쳤다. 카를로스는 피곤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쓸데없이 이야기를 길게 끌고 있다는 듯이.
정상이었다면 베를리아의 반응을 보고 저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감정과 말이 통하지 않는 벽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오싹한 긴장감이 그녀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내가 물었잖아. 대답해야지.”
마치 훈련하던 개가 말을 듣지 않기라도 하는 듯한 취급이었다. 기분이 더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똑똑똑.
그 순간이었다. 베를리아와 카를로스 사이에 흐르던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노크 소리가 깨트렸다. 이번에는 상대가 자신의 기척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베를리아도, 카를로스도 문밖의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멜…!”
“쯧, 개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달려왔군.”
카를로스가 혀를 차며 제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매만졌다. 덜컹. 베를리아의 외침에 곧바로 열릴 듯했던 문이 잠잠해졌다. 문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외부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황태자의 집무실만을 전혀 다른 공간에 떨어트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걱정하지 마, 베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달랬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과연 그가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성물로 공간을 차단해 놓았으니 이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거야.”
카를로스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하자.”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