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11)
한편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의 시선에서 얼른 그녀를 떨어트려 놓고 싶어 대놓고 베를리아를 마중 나왔다.
“리아세 백작.”
그런 메리쉬에게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왔다. 라미르니에 후작이었다. 메리쉬가 대답 없이 후작을 돌아봤다. 메리쉬의 무감정한 시선이 라미르니에 후작을 내리눌렀다. 원로 귀족인 후작 앞에서도 죽지 않는 무거운 기세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귀족의 작위는 겨우 한 단계씩 뿐일지라도 올라갈수록 그 사이의 격차가 커졌다. 따라서 백작이 후작에게 이리 구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후작은 가만히 메리쉬를 바라보았다.
‘리들턴 백작의 옆에 있을 때와는 천지 차이군.’
베를리아가 황궁 연회에 파트너로 데려오기 위하여 친히 법을 바꾸고 그 사랑으로 직위까지 쥐여 준 남자. 이제 리아세의 성을 가지게 된 메리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드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베를리아 리들턴이 황태자를 버리고 택한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라미르니에 후작 또한 남자를 기억해 두었다. 그러나 연회에서는 정중해 보이던 모습과 달리, 베를리아와 떨어져 있을 때의 메리쉬는 차라리 야생 속에 풀어 놓은 맹수를 닮아 있었다.
“그레이슨이라고 하네. 라미르니에 후작가의 가주이지.”
라미르니에 후작이 메리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맹수에게 악수하자고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메리쉬의 시선이 느릿하게 후작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그러나 손을 마주 잡지는 않았다.
‘꼭 저들 같은 것끼리 모였군.’
라미르니에 후작은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후작은 정치판에서도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베를리아 리들턴은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데 베를리아의 수족이자 새로운 연인이라는 눈앞의 사내조차도 자칫하면 목을 물어뜯길 만큼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커다란 뱀과 사나운 송곳니를 가진 맹수. 그 조합이 끔찍하여 차라리 베를리아가 황태자에게 붙어 있을 때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쉬 리아세입니다.”
“알고 있네, 현재 이 수도의 사교계와 정치판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네를 모르면 안 되지.”
메리쉬가 손을 맞잡자 라미르니에 후작이 자못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띠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리쉬의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지만.
‘…쯧, 건방지긴.’
이래봬도 라미르니에 후작은 어디를 가나 마주하는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 원로 귀족이자 반황태자파의 수장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저렇게 뻣뻣한 태도를 보이는 메리쉬가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속내를 티낼 수는 없었다. 리아세 영지가 수도에서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그곳은 예전부터 황금 줄기 위의 땅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리아세 영지는 그 근방의 최대 곡창지대였으며 한편으로는 거대한 숲도 있어서 무수히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다. 라우드 지방이 커다란 강을 두고 에덴버와 네이르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에덴버에서는 일부러 그 주변 지역을 더욱 강화해 왔다. 그 덕에 끊임없이 풍부한 투자가 이루어졌으니 발전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리아세 백작위는 지방 귀족이라고 해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엄청난 곳을 베를리아 리들턴이 제 애인의 품에 턱 안긴 것이다.
그로 인해 이 남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메리쉬 리아세. 어느 파벌에서든 그를 끌어들이고 싶어 할 터였다.
애초에 연인 사이야 언제든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이미 쥐어진 작위야 황제가 아니면 빼앗을 수 없기도 했고.
“나도 자네가 궁금하던 참인데 마침 잘 됐군. 시간이 있다면 나와 대화 좀 나누지 않겠나?”
메리쉬가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시간을 봤다. 마법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발달했으나 귀족들은 여전히 쓸데없이 스스로를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다. 회중시계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귀족 남성들의 필수품 같은 것.
“리들턴 백작이 나오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걸세.”
메리쉬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변했다.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을 보며 라미르니에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황궁의 많은 시선이 저를 구경하는 와중에도, 후작이 말을 걸 때도 표정 변화 하나 없던 남자가 유일하게 베를리아 리들턴의 존재에만 반응하는 것이 퍽 어이없었다.
“리들턴 백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메리쉬가 후작에게 처음으로 한 질문이었다. 남들은 그와 한 번이라도 자리를 가지려고 애쓰는데 이 남자는 겨우 저런 것에만 반응을 보인다. 라미르니에 후작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작은 냉정하게 판단하기를 잊지 않았다.
‘메리쉬 리아세만 끌어들이는 것은 어쩌면 어렵겠어.’
그렇다면 방향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모든 귀족이 황태자를 통해서 꾸준히 봐 왔다. 만약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 그런 존재라면 메리쉬부터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베를리아까지 반황태자파로 따라온다면 라미르니에 후작에게 더없이 이득인 일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황태자가 리들턴 백작에게 다시 관심이 생긴 모양이던데.”
라미르니에 후작이 메리쉬를 도발했다. 죽이려고 했던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새삼 상까지 직접 챙겨 주는 황태자의 꼴이 우스웠다. 물론 거기에 넘어간다면 베를리아의 꼴은 더더욱 우스워지겠지만.
“그에 관해서 내가 자네를 도울 수 있지 않겠나?”
후작이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속닥였다. 메리쉬 리아세는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맹목적이다. 제 주인이라고 목줄을 직접 물어다 주는 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후작은 메리쉬의 입장에서 분명 카를로스의 존재가 거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 도우시겠다고요.”
“그래. 자네와 우리는 아무래도 싫어하는 대상이 같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메리쉬의 물음에 라미르니에 후작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지 않나.”
메리쉬의 시선이 빤히 후작에게 와 닿았다. 깊은 녹색 눈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메리쉬가 대답했다.
“이야기가 짧게 끝났으면 좋겠군요.”
노골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베를리아가 언제 마차에 도착할지 여전히 신경 쓰는 모양새였다.
‘됐다.’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라미르니에 후작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됐다. 어차피 어설프게 꾸며낸 회유가 통할 사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네.”
***
“어서 와?”
베를리아가 반사적으로 카를로스의 말을 따라 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데니안은 황실 기사단장으로서 일이 있어 베를리아를 데려다 놓은 후 가 버렸지만, 데니안이 있었다면 그 또한 황당하게 여겼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카를로스가 되지도 않게 갑자기 친근하게 구니 고운 반응이 나오지 않을 만도 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카를로스가 책상 뒤에서 나오며 소파로 다가왔다. 자리까지 권하는 그 모습에 베를리아는 점점 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시종을 시켜 차까지 준비해둔 모양이 마치 담소라도 나누자는 것만 같았다. 의심으로 그녀의 눈매가 잔뜩 가늘어졌다.
카를로스와 잘 지낼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렇지만 그를 경계한답시고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도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카를로스를 의심하면서도 이 공간을 굳이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베를리아의 태도는 쉽게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무슨 속셈이야?”
베를리아가 곧바로 물었다. 카를로스와 사담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속셈이라니?”
“쓸데없이 말 길어지게 만들지 마. 네가 왜 굳이 나서서 내 포상을 챙기냐고.”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지긋이 쳐다봤다. 베를리아는 메리쉬라는 자가 황궁에 몰래 든 것을 알까? 모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리아의 능력은 마법 쪽 계열이었지 무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분하지만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는 메리쉬가 카를로스보다도 앞섰다. 그랬으니 그자가 작정하고 기척을 숨긴다면 베를리아도 알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메리쉬를 보는 베를리아의 시선을 생각건대, 만약 메리쉬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지금 여기서 자신을 상대해 주고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짐작만으로도 대단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내 백성들을 구했으니 그에 걸맞은 상을 내리겠다고 한 것뿐이야.”
“하, 내 백성?”
베를리아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누구보다도 므시아의 해체를 바랐던 자가 므시아의 사람들을 두고 자신의 백성이라 일컬으니 어찌 웃기지 않을 수가.
“내가 신전에 네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거 아냐? 그런데도 네가 굳이 내 편을 들듯이 나선 게 아무 속셈이 없다고?”
베를리아가 일부러 노골적인 내용을 입에 올렸다. 말이야 대화 상대가 빙빙 돌리고자 한다면 언제까지고 끌고 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카를로스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베를리아와 카를로스는 현재 정확히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베를리아가 신전에 카를로스의 이름으로 기부를 한 후,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잘 알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황태자에게로 돌아왔다.’ 오늘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그 가정에 대한 가능성을 점치느라 다들 분주한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회의장으로 가기 위하여 복도를 걷는 내내 등 뒤로 시선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카를로스는 아무 배경도 없는 4황자로서 어린 날부터 내내 눈치를 보며 이 황궁에서 버텨 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기류를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단언컨대 카를로스는 그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그런데 카를로스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 놨던 것처럼 주저 없이 말을 꺼냈다. 오늘 회의장에서 황태자가 한 행동은 사람들이 품은 의문에 불을 붙이는 짓이었다. 귀족들의 오해를 풀어도 모자랄 판에.
“성녀님이 리들턴 저택에 다녀간 것은? 그것도 듣지 않았어?”
말이 카를로스를 몰아붙이듯이 쏟아졌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베를리아의 추궁 같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를로스가 아주 여유롭게 답을 내어 놓았다.
“맞아. 내가 네 편을 든 거야, 베릴.”
그 대답이 지나치게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