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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66)화 (66/148)

66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10)


 

먼저 입을 연 것은 메리쉬였다. 두 사람이 관계에서 약자는 늘 메리쉬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 한마디가 다였다. 메리쉬의 시선이 낮게 아래로 깔려 있었다. 베를리아의 앞에서 제 기분을 억지로 갈무리하려고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으나 어느덧 떨어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메리쉬의 기분이 얼마나 상했는지를 증명했다. 그 순간 그녀는 어리석게 군 것을 후회했다.

애초에 메리쉬에게 솔직하게 굴라고 한 것도 그녀가 아니었던가. 메리쉬가 물은 것이 단순히 안젤라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흥분했다. 그저 사실을 말해 주면 될 일이었는데.

이제 겨우 그것으로는 메리쉬의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모두 그녀가 과하게 예민하게 군 탓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한 까닭까지도 설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어찌 말하겠는가.

네가 사랑하는 진짜 베를리아가 아닌 나와, 누구나 사랑할 만한 안젤라 애거스틴. 그 사이에서 겁이 나서 공격당한 고슴도치처럼 먼저 가시를 세웠노라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커다란 비밀 하나가 그녀의 목구멍을 콱 틀어막았다. 그래서 다른 말들 또한 감히 틈새를 비집고 나오지 못했다.

“…미안해, 억지를 부려서. 그러니까….”

“아니에요. 베릴이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는 건데, 저야말로 억지를 부렸어요.”

메리쉬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정말로 괜찮다는 의미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베를리아의 말을 끊은 것이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이게 제 속이 상했음에도 더 이상 베를리아의 기분을 거스리지 않기 위한 메리쉬의 최선이었으리라.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툰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것을 안으로 숨기는데도 서툴렀고 그러다 보니 나온 기계적인 대답이었다. 마치 두 사람이 주종 관계였을 때처럼 철저하게 베를리아에게 맞춘. 대놓고 하는 비난보다 그게 더 뼈아팠다. 예상대로 그는 그녀의 뒤늦은 설명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말해 줬으면 되는 건데.’

그녀는 재차 후회했다. 스스로의 앞뒤 구분 없는 행동이 당황스러워서 머리도 굴러가지 않았다.

안젤라와 메리쉬의 사이가 불안하다거나, 혹여라도 메리쉬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 봐 안젤라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전혀 납득 갈 만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메리쉬와 안젤라가 원작 속에서 어떻게 얽히는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메리쉬가 카를로스를 대적하면서 얽히게 된다. 즉 베를리아가 처형당하기 전에 그녀가 베를리아에게 빙의하여 전개를 바꾸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메리쉬와 성녀의 사이에 일말의 접점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에 저런 소리들을 듣는다면 메리쉬가 얼마나 어이없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쉴 새 없이 고민하는 사이에, 그녀의 침묵은 메리쉬에게 점점 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한 번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해 헤매면 점점 더 실이 엉키고 꼬이는 것과 같았다.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침묵이 마치 자신을 책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쉬세요, 베릴.”

결국 메리쉬가 돌아섰고 그녀는 그를 잡지 못했다. 메리쉬가 나가면서 탁, 방문이 닫혔다. 베를리아와 밤을 보낸 이후로 메리쉬는 거의 매일같이 베를리아의 방에서 함께 지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하나 나갔을 뿐인데 방이 지나치게 휑해 보였다. 서늘함이 맴돌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굳어 버린 것처럼 서 있었다.

***

천연두 환자를 모두 치료했고, 어제부로 혹시 잠복기가 있을지도 몰라 시행한 레밀튼 지역 주민들의 격리도 모두 끝났다. 그 덕에 중앙 위원들이 모두 황궁의 회의장에 모여 있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지만, 이번만큼은 메리쉬도 쉽게 베를리아를 뒤쫓을 수 없었다. 말다툼 이후로 베를리아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은 것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황태자가 있는 곳에 그녀를 혼자 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메리쉬는 기척을 죽인 채 그녀를 따라와 회의장의 한 편에 숨어 있었다.

귀족들이 모두 들어서자 이어서 황태자가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메리쉬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의 시선이 가장 상석에 가서 앉는 황태자를 향했다.

카를로스 에덴버.

메리쉬는 그 존재가 사사건건 거슬렸다. 애초에 단 한 번도 황태자를 좋아한 적이 없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놈의 존재를 지워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참고 있는 이유는 오직 베를리아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그녀의 저주를 나누어 지고 있는 이상 메리쉬는 카를로스를 죽일 수 없었다.

베를리아와 다툰 일에 대하여 메리쉬도 처음에는 화가 났으나 그는 곧 분노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메리쉬는 애초에 자신이 오래도록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카를로스만 아니었더라면 처음부터 베를리아와 다툴 일도 없었을 터였다.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 너무 큰 존재였고 너무 위험했다. 메리쉬는 여전히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리고 황태자가 그녀를 어떻게 죽이려 했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카를로스 에덴버만 없다면.’

그 순간 메리쉬와 카를로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아무리 베를리아여도 중앙 위원석에 누구 하나를 들이는 일은 티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 작위 하나를 사는 것쯤이야 남들도 하니 그냥 넘어간다지만, 중앙 위원석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괜한 질타와 시기를 살 필요는 없었으니 메리쉬도 베를리아도 그가 리아세 백작이 된 것에 만족했다.

그래서 메리쉬는 현재 황궁에 숨어들어 온 터였다. 귀족의 성을 달았으니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으니까.

그런데도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착각은 아니었다. 어쩌면 황태자를 향한 메리쉬의 적대심 때문에 알아차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메리쉬를 보는 카를로스의 시선은 분명 음습하고 어두웠다.

‘…하, 감히.’

메리쉬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카를로스의 눈에 떠오른 감정이 제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너만 없었다면.’

두 남자의 시선이 얽혀 서로를 지독히도 저주했다.

“이로써 레밀튼 지역의 재난 사태를 종료한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 황태자가 귀족들에게 선언했다. 물론 카를로스가 메리쉬가 여기 있음을 언급해도 메리쉬는 유유히 빠져나갈 테지만, 카를로스는 마치 메리쉬를 없는 존재인 것처럼 모른 척했다. 황태자는 황제를 대신하여 황좌에 앉은 채 오만하게 좌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다시 메리쉬의 쪽을 힐끔 보더니 베를리아를 불렀다.

“리들턴 백작.”

“예, 태자 전하.”

“이번 역병의 책임자로서 레밀튼 지역의 천연두를 완벽히 종식시켰으니 그대에게 상을 내리고 싶은데.”

카를로스의 말이 장내에 떨어지자마자 귀족들에게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하!”

“전쟁에서 지휘관이 승리를 거두면 포상을 내리듯이, 재난 상황을 해결한 책임자에게도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카를로스의 말이 옳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하나같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베를리아가 지금보다 더 세를 키우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나서서 포상을 받겠다고 하는 귀족은 없었다. 실리적인 자들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풍족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귀족의 미덕이었다. 제 입으로 대놓고 무언가를 갈구한다면 스스로의 처지가 곤궁하다 광고하는 바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돈이나 땅의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치적인 문제였다. 게다가 베를리아 리들턴이 부족한 게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그냥 넘어간다면 그녀가 굳이 자존심을 구겨가며 상을 내놓으라 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황태자가 그것을 망쳐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카를로스의 말이 옳았으니 귀족들은 속으로 분을 삭일 뿐 황태자에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내가 신전을 찾아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토록 요란하게 중앙 신전에 행차했는데 카를로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에게 도움이 될 행동을 하다니, 무슨 속셈인지 의심스러웠다.

어찌 됐든 황태자가 베를리아에게 줄 포상에 대한 주제를 꺼낸 덕에 그녀가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메리쉬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베를리아가 시키는 것은 뭐든 다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했다. 기실 카를로스가 황태자로서 내리는 것들이야 베를리아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를로스가 보란 듯이 제가 있던 방향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이 대단히 불쾌했다.

‘저따위가 여전히 베릴에게 뭐라도 되는 듯이.’

베를리아가 원한다면, 메리쉬는 평생토록 그녀의 개로 살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권력이 있어야만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메리쉬는 권력이 필요했다. 그의 녹빛 시선이 번뜩였다.

***

“리들턴 백작님, 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를 걷고 있자 데니안이 나타나 말을 걸었다. 베를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카를로스 에덴버, 이 얍삽한 자식.”

그녀는 튀어나오는 빈정거림을 참지 않았다. 카를로스와 리암, 데니안 중에 그나마 베를리아가 거부감을 덜 보일 상대가 데니안임을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매번 카를로스 개인적으로 그녀를 부를 때마다 데니안을 보내는 것이겠지.

“좋아, 가.”

베를리아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가 싫은 것은 둘째 치고 그놈의 속셈이 궁금했다.

황태자의 집무실로 가는 길은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도, 빙의한 후의 그녀에게도 익숙했다. 베를리아가 먼저 앞장서자 데니안이 안도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리들턴 백작님,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데니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카를이 그런 의도인 줄 알았더라면… 소환일에 백작님을 카를에게로 데려가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로 저는 백작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럼 오늘은 왜 나를 부르러 왔는데?”

“…카를의 의도를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그녀는 데니안이 그냥 하는 사과라면 비웃어 주려고 했다. 데니안은 황실 기사단장이었고 카를로스는 황태자였다. 모시는 사람의 명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명을 따르면서 생겨나는 제 마음의 불편함까지 베를리아에게 덜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가만 보아 주기 싫었다.

“내가 안 궁금하다면?”

“이대로 돌아가신다고 해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런데 데니안은 리들턴의 저택을 찾아온 이후로 시종일관 베를리아에게 정중했고, 외면하던 것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태도는 비웃을 수 없었다.

“됐어요, 기사단장님 말대로 궁금하니까 가요.”

베를리아가 괜스레 말에 심어 놨던 가시를 거뒀다. 가장 탐탁지 않은 놈은 따로 있는데 여기서 힘을 빼 봐야 뭐하겠는가.

황궁의 길은 침입자를 대비해 복잡하게 설계되었으나 어린 날부터 카를로스를 보러 자주 황궁에 드나들었던 베를리아는 지름길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 덕에 그녀는 황태자의 집무실에 금방 도착했다.

“어서 와, 베릴.”

그리고 문이 열리자 카를로스는 마치 그들의 사이가 좋았던 때처럼 베를리아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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