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9)
그것은 그녀가 소설을 볼 때마다 가지곤 했던 의문이었다.
기사였던, 한 가문의 가주였던,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있던 이들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누리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엇이어서 그렇게까지 하는가.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하나를 가지는 대가로 다른 하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그녀는 황제 같은 자리는 거부했을 것이다. 황제는 절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자리니까.
끊임없이 투쟁하고 끊임없이 타협하며, 끊임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게 황제의 자리였다. 권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가장 커다란 권력에 그에 맞는 대가가 따르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는 안젤라를 진심으로 이해했다.
“…나는 성녀님이 그 자리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득 이렇게 말이 나와 버린 것은.
말하고 나니 떠올랐다. 역병이 창궐한 현장에서 안젤라는 정말 거리낌 없이 레밀튼의 주민들을 치료했었다. 곱게 자라 세상 물정에 어두운 까닭에 남들이 외면하는 음지까지 시야가 닿지는 못했으나 알아차린 이상 외면할 성정은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지켜보면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황후는 평생을 궁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궁에는 수십, 수백 개의 눈과 귀와 입이 있었다. 때문에 언행 하나하나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없었다. 황태자비가 되면 안젤라는 지금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해도 사방에서 예비 황후의 안위를 이유로 온갖 통제를 해 올 테니까.
그나마 지금까지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돌보는 것이 신의 딸인 성녀의 의무였기에 신전의 조금은 갑갑한 보호 속에서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성녀로서 져야 하는 의무와 스스로가 원하는 점이 겹친 것이 안젤라를 숨이 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의무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과연 안젤라가 얼마나 황궁 밖으로 발걸음 할 수 있을까.
안젤라는 남들의 의견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의사만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원작 속의 안젤라가 성녀의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카를로스를 사랑해서 괜찮았던 것인지, 혹은 남은 미련을 애써 접어 두었던 것인지.
안젤라는 그녀에게 더 이상 소설 속의 단순한 인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계속 성녀로 살아가요.”
베를리아는 진심으로 이것이 안젤라를 위하는 말이 되길 바랐다. 안젤라는 정말로 자신이 배운 대로 올바르게 자란 사람이었다. 자신이 받은 것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지 않고 돌려줌에도 큰 주저가 없었다.
그런 안젤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진심으로 잘 어울렸다.
카를로스는 황제가 교황과 권력을 나눠야 한다는 사실도 반기지 않았다. 자신의 비로 제 뜻을 보조는 해도 스스로 나서지는 않을 상대를 원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안젤라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성녀로서 할 수 있는 것보다 그녀의 행동 범위가 필연적으로 훨씬 줄어들 터였다.
“앞으로 성녀님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또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성녀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모두가 배운 대로 자라지는 않고 모두가 자신이 누리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타인에게 나눠 주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성녀 안젤라는 그녀 하나뿐이었다.
베를리아의 말을 들은 안젤라의 시선이 흐려졌다. 오늘따라 왜 이다지도 베를리아에게 속내를 이야기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사랑이 공존할 수 없으면요?”
안젤라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카를로스의 옆에 있으면 다 상관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역병이 창궐한 현장에서 신관들조차 외면하던 이들을 마주한 일이 그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베를리아의 말이 안젤라의 열망을 부추겼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해 줄게. 사랑해, 앤지.’
카를로스는 그녀에게 뭐든 해 주겠노라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안젤라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사랑으로 애써 덮어 놓았던 열망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늘 속에서도 죽지 않던 새싹은 약간의 햇빛을 보자마자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죽이려고 할 만큼 미워하던 베를리아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는 게.
“…성녀님,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안젤라가 어렵게 말을 꺼낸 만큼 베를리아의 대답도 느리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안젤라와 달리 베를리아의 목소리는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베를리아는 언제나 누구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져야 하죠.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안 해요.”
그래서 그녀는 원작을 읽을 때부터 카를로스가 아닌 메리쉬가 좋았다. 황태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베를리아의 뜻을 꺾지 못하는 점이 유독 더 좋았다. 메리쉬는 베를리아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욕망이 될 사람이었지, 그녀의 욕망을 꺾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굳이 공존할 수 없다면… 나는 내가 가진 욕심을 부수려는 쪽을 버릴 거예요.”
그 말은 안젤라더러 굳이 카를로스를 내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나고 성녀님은 성녀님이니, 각자의 답은 다를 수밖에 없겠죠.”
그녀는 처음으로 어떤 의도도 없이 안젤라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 말이 성녀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요. 어차피 선택도, 그에 대한 책임도 성녀님의 몫이니까.”
“…정말 칼같이 선 그으시네요, 리들턴 백작님.”
안젤라가 문득 미소를 흘렸다. 조언을 구했지만 결국 베를리아는 베를리아고 안젤라는 안젤라다. 베를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게 도리어 안젤라를 바로 서게 했다. 베를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후회까지도 결국 온전히 성녀님의 것인걸요.”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후회한다고 한들, 누구도 예전으로 돌려놔 줄 수 없으므로.
“리들턴 백작님, 저 하나만 부탁해도 되나요?”
“뭔데요?”
“언젠가 백작님께서 내키신다면… 그때는 앤지라고 불러 주세요.”
‘저를 앤지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베릴.’
베를리아의 기억 속 그것과는 달랐다. 이것은 상대의 호의를 자신하며 내뱉은 허락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탁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부르면 황태자가 싫어할 텐데요?”
베를리아는 안젤라의 애칭을 부르는 것도, 안젤라가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싫어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서로를 애칭으로 부른다면 카를로스는 단번에 알아차릴 터였다.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도, 그래도…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겨우 말 한마디가 때로는 인간의 안에 콕콕 깊숙이 틀어박힌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만들기도,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카를로스에게는 애석하게도, 지금 베를리아의 말이 안젤라에게는 그랬다.
베를리아는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요, 언젠가는.”
싫었던 사람. 싫어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더 이상은 싫어할 수도 없는 사람. 직감이었다. 언젠가는 좋아질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래서 베를리아는 안젤라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
“베릴,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베를리아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메리쉬가 그녀에게 엉겨 왔다. 그의 팔이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안젤라와 마주치지 못하도록, 성녀가 돌아갈 때까지 메리쉬에게 방 안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명령한 탓이었다. 어떤 상대와 대화를 하든 딱히 그가 끼어들어도 전혀 상관 않던 베를리아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일부러 떨어트려 놓기까지 했으니 메리쉬는 그 대화 내용이 퍽 신경 쓰였다.
“그냥 여자들끼리 할 만한 이야기.”
베를리아가 웃으며 몸을 돌려 메리쉬를 마주 안았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에 쪽 입술을 맞췄다. 누가 봐도 말을 돌리는 것에 불과했다.
“…베릴.”
메리쉬가 그녀를 추궁하는 것도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베를리아와 안젤라 사이의 공통분모.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카를로스뿐이었다. 그것이 더없이 불쾌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든 카를로스 에덴버에 관한 주제가 베를리아의 입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내가 말한 사실은 확인했어?”
불만스러워 보이는 메리쉬의 얼굴을 눈에 담으면서도 그녀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어쩌면 안젤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냥 말해 줘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그가 안젤라와의 대화에 관해서 묻는 일이 탐탁지 않았다. 당연히 궁금해할 수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안젤라’라는 이름에 신경의 초점이 맞춰진 까닭이었다.
[메리쉬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이는 마음이 자꾸만 피어났다. 눈앞에서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노라면.]
베를리아는 무심코 다시 소설 속에 서술된 장면을 떠올렸다. 안젤라는 원작의 절대적인 여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안젤라는 현실이었다.
누구나 사랑할 만한 장점을 가진 안젤라 애거스틴.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사랑하게 될수록, 오늘처럼 안젤라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할수록 불안감은 증식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에게 맹목적이었다. 이제는 그의 곁에 그녀가 있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한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사실보다도, 원작 속에서 안젤라로 인해 베를리아의 복수조차도 잠시 멈칫거렸던 메리쉬의 모습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길래 이토록 제게 말하기 싫어하시는 건가요?”
“멜, 너야말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하게 캐묻는 건데?”
계속 말을 돌리는 베를리아의 행동에 울컥한 메리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은 또다시 되돌아와 그녀를 자극했다. 그녀의 목소리도 덩달아서 커졌다.
메리쉬는 이제 이 정도쯤은 자신이 물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베를리아는 지금까지처럼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메리쉬가 따라 주리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생각이 최악의 타이밍에 부딪혔다. 침묵이 공간을 끔찍하게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