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8)
소설은 카를로스와 안젤라의 만남을 마치 운명처럼 서술했었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운명이라는 것은 사실 말이 될 수 없었다. 우연히, 운명처럼 만나서, 처음 본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하필 적절한 시기에 그 상대와 재회해 못다 한 사랑을 이룬다. 그 얼마나 작위적이란 말인가.
“오히려 백작님은 몰랐던 모양이네요.”
베를리아는 성녀의 말을 처음 알게 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카를로스의 속내보다 그것을 안젤라가 알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만.
안젤라는 자신의 말이 가지는 파급력과 달리 의연한 기색이었다.
“물론 카를이 제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알고 제게 다가온 건 아니겠죠.”
베를리아가 네멘 리들턴의 명령을 받아 자신에게 접근했음을 알게 되고 카를로스가 몰래 자신의 궁을 나가 버린 날, 그는 성녀와 처음 만났다. 하필 수도의 인근 마을에서 축제가 있었고 축제를 구경 나온 성녀가 자신의 호위를 잃어버린 순간에 두 사람은 부딪히게 되었다.
황태자와 성녀 모두 마법으로 외형을 바꾸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지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와 안젤라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것이 원작 속의 내용이었다.
‘베릴, 나 오늘…!’
잔뜩 화를 내며 나갔던 카를로스가 들떠서 들어왔던 순간은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평소처럼 베를리아에게 말을 걸던 그는 베를리아와 눈을 마주치자 그대로 표정을 굳히고 홱 고개를 돌려 버렸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얼굴에는 미미한 홍조가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카를로스를 속인 자신은 죄인이었으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남들 몰래 함께 축제를 즐긴 시간만으로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안젤라와 카를로스가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은 그 후로 한참 후의 일이었으나 주인공들은 서로를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재회 후 첫 만남 이후의 그리움까지 더해져 빠르게 관계를 진전시켜갔다.
‘…그 모든 게 의도적이었다고?’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 속, 안젤라를 사랑하는 카를로스의 모습이 진짜 베를리아에게는 너무 뼈아팠다. 차라리 전략적인 사랑이었더라면 진짜 베를리아가 황태자와 성녀의 모습을 두고 그토록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으리라.
“카를은 신성력을 느낄 수 있어요.”
안젤라가 말했다. 간혹 에덴버의 황족 중에는 신성력에 기민한 자들이 태어났다. 이런 자들은 대체로 황족의 이능을 강하게 타고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자신이 신성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대부분 역대 황제들은 모두 신성력에 예민하고 이능이 강한 자들이었으니 존재만으로도 다른 황위 계승 후보들의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야 카를로스와 아주 어린 날부터 함께 했으니 당연히 그녀의 기억 속에 그 사실이 남아 있었다. 카를로스도 자신의 체질과 이능에 대해 처음부터 능숙하게 숨기지는 못했다. 그럴 때마다 베를리아는 사람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카를로스를 지켰었다.
“황태자가 말해 주던가요?”
그렇지만 안젤라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 의심 많은 카를로스가 기꺼이 말해 줄 정도로 현재 성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안젤라가 고요한 어투로 단정 지었다.
“카를이 신성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리들턴 백작님은 알고 계셨군요.”
안젤라의 말투는 조곤조곤했으나 베를리아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젤라는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그녀의 입매가 굳어 있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그래요. 어릴 때부터 같이 지냈으니까요.”
베를리아는 안젤라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러는 성녀님께서는 황태자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죠?”
베를리아가 다시 물었다. 연인인 카를로스에 대해 베를리아는 알고 안젤라는 듣지 못한 사실. 아마도 그것이 성녀의 기분을 날카롭게 만들었으리라.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카를로스에게 베를리아는 과거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 버렸으니 괜찮지 않을 수밖에.
“말해 주기 싫으면요?”
안젤라가 말했다. 베를리아를 미워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괜히 까칠하게 나오는 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안젤라도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제가 성녀님을 그걸로 협박할 것도 아니고.”
베를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제는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별로 미련 없어 보이는 모습에 안젤라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변해 버렸다.
“…그냥, 이번에 역병 현장에서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안젤라는 베를리아와 더 이상 적대적으로 지내길 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녀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안젤라는 자신의 선에서 최대한 신성력이 강한 신관들을 현장에 골라 보냈다. 안젤라가 알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태까지는 신관들이 그렇게 다 같이 신성력을 쓸 일이 별로 없었어서 몰랐지만, 신관들이 그럴 때마다 카를이 어쩐지 예민해진다는 것을요.”
그것은 마치 청각이나 후각이 유독 과민하여 많은 소리나 냄새가 섞인 곳은 기피 하는 사람의 반응과 비슷했다. 안젤라는 성녀였으니 차근차근 그 이유를 추측해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베를리아는 다른 생각을 했다.
‘…아, 내가 아니었다면 역병의 현장에 이렇게 신관들을 보낼 일도 없었겠지.’
결과적으로 베를리아의 행동이 원작의 내용을 바꾼 셈이었다. 원작 속에서는 역병이 터진 지역이 모두 불타오른 뒤에야 황태자와 성녀가 나서니까. 그리고 카를로스가 계속 해서 숨기고 있던 비밀은 또 다시 안젤라와의 사이에 미세한 틈을 만들었을 터였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들 비밀 하나 없을 수는 없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각자가 지켜야 할 자기 자신이 존재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서운해진다. 연인이라는 게 그랬다.
“카를과 처음 만났을 때의 저는 지금보다 신성력을 갈무리하는 게 서툴렀어요. 그래서 신전 밖을 나갈 때면 그것을 막기 위해 아티팩트를 지니고 나갔죠.”
안젤라는 날 적부터 성녀였다. 심지어 신전에서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진. 지금이야 신성력을 다루는 데 매우 능숙해졌다지만 그 당시에는 달랐다.
“그리고 축제에서 길을 잃으면서 그 아티팩트도 잃어 버렸어요.”
현재는 완벽히 신성력을 다룰 줄 앎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젤라의 몸을 옅은 광채 같은 것이 둘러싸고 있었다. 안젤라의 존재감은 늘 그런 식으로 증명됐다. 그랬으니 그날 카를로스가 자신의 정체를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성력을 느끼는 체질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신성력으로 인하여 빛까지 보이는 안젤라를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스스로의 능력에 관해 서투른 어린 날이 더 예민했으면 예민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동안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베를리아는 성녀의 말을 곱씹느라 말이 없었고 안젤라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도 상관없어요?”
베를리아가 말했다. 무심코 나온 질문이었다. 그저 순수한 사랑인 줄 알았을 때와,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기분이 어떻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안젤라가 베를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안젤라가 웃었다.
“리들턴 백작님은 저를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요.”
성녀는 참 여러모로 자신의 입을 닫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매우 애석했으나, 그녀는 정말로 안젤라의 말 하나에 모든 것을 이해해 버렸다.
생각해 보면 안젤라가 카를로스에게 어떠한 사실을 숨겼다고 해도, 그녀가 성녀인 이상 당장에 안젤라와 헤어지지는 못할 터였다. 어리석게도 너무 쉽게 베를리아를 버렸다. 이미 그런 선택을 한 카를로스에게 남은 패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젤라는 곧바로 리들턴의 저택으로 달려왔다.
그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카를로스가 한 행동은 어떤 사람이라도 달갑지 않을 짓이었다. 만약 황태자가 누구에게나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굴욕과 수치, 모멸과 울분의 나날들을 베를리아 리들턴이 어떻게 버텨냈던가.
‘사랑. 고작 그게 무엇이라고.’
그녀의 입매가 뒤틀렸다. 안젤라를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해서 맹목적으로 굴었던 것이 황태자의 행동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카를로스의 일에 한해서만큼은 베를리아의 탓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이 지독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알아요. 카를이 제게는 무한정으로 상냥하게 대하는 것과 달리 실은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안젤라는 구태여 카를로스의 개인적인 성정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베를리아에게 대하는 것만 봐도 끝까지 모를 수 없었다. 안젤라는 어릴 적부터 성녀로서 온실의 꽃처럼 살았다. 그래서 세상의 물정에는 어둡고 대부분의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제게도 그럴 수 있다는 가정을 전혀 못 열어 둘 바보는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품고도 카를로스를 사랑했다.
“지금 당장 카를로스와 다투기 싫었어요.”
현재 신전에는 작금의 교황을 대체할 만한 다음 대 후보가 없었다. 추기경은 여럿 있었으나 다들 나이가 지긋했고 교황이 되기에는 신성력이 약간씩은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이 죽고 나면 신전의 구심점은 당연히 안젤라가 될 터였다. 사실 지금도 백성들이 목소리를 높여 의지하고 지지하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성녀가 아니던가.
그러니 성녀와 결혼하게 되면 황태자는 신전을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있게 될 터였다. 교황을 잃고 성녀가 힘을 쓰지 않으면 카를로스가 안젤라와 혼인하겠다고 나서도 신관들이 황태자를 막을 수 있는 확률은 크게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결국 카를로스의 청혼에 대한 안젤라의 대답만이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
안젤라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기 싫었다. 굳이 반대하여 카를로스와 맞서게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카를에게 교황 성하의 상태를 숨겼어요. 저와 결혼하면 카를의 위치는 공고해지겠죠. 카를로스는 손익 계산이 빠른 사람이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안젤라는 어쩌면 진실을 숨기는 자신이 사실 이기적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재 카를로스가 황태자이기는 했으나 그의 지위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그런 카를로스가 성녀와 결혼하면 괜찮아질 것을 그녀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안젤라가 카를로스에 관하여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를은 신전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황제의 권력을 견고하게 만들고 싶어 하죠.”
안젤라의 시선은 더 이상 베를리아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그동안 자기 안에 담아놨던 것을 토해내듯 홀로 계속 읊조렸다.
“그런데요, 리들턴 백작님. …저는 아직 카를보다 제 스스로를 더 사랑하나 봐요.”
그 모든 것을 품고도 카를로스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라는 자신을 더 사랑했다.
“저는 아직 성녀로 살고 싶어요.”
그게 안젤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