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7)
“…어째서죠?”
성녀는 베를리아의 말을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더라면 교황의 상태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왜 굳이 안젤라에게 알렸단 말인가?
“내가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성녀님께 좋은 일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황태자에게 말할 예정이었다면 성녀님께 말을 전하는 것보다 황궁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겠어요?”
베를리아의 말은 타당했으나 안젤라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믿기 힘들었다. 어쩌면 이미 카를로스에게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여전히 날 의심하네요.”
베를리아의 말에 안젤라의 어깨가 재차 움츠러들었다. 투명하리만치 속내가 보이는 행동이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탓인지, 혹은 약점을 잡혔다는 사실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직도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 들까 봐 그런가 보죠?”
마주 보던 시선조차 내리깔렸다. 안젤라는 숨을 죽인 채 얌전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염려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불안함을 지나치게 감출 수 없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안젤라조차도 끊어내지 못할 깊은 과거가 있는 탓이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안젤라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녀는 지금 같은 상념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달라졌다. 안젤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고 하염없이 베를리아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네, 무서워요.”
안젤라는 스스로가 충만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삶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절실하게 깨달은 적이 없었다. 삶에서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하여 매번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오늘에야 알았다.
자신이 카를로스의 옆에 있는 베를리아를 보고도 그녀에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를.
“리들턴 백작님, 나는 예전까지는 믿고 있었어요.”
베를리아가 자신의 연인인 카를로스를 사랑한다고 해도 안젤라는 그녀가 밉지 않았다. 베를리아의 사랑이 보답 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보다는 안쓰러웠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낼수록 안젤라는 자신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없네요.”
언젠가부터 베를리아 리들턴이 변했다. 그녀가 먼저 등을 돌렸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죽이려고 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미워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뒤돌아선 베를리아의 등을 쫓는 시선이었다. 다름 아닌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보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백작님께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요.”
일견 하소연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을 잇는 안젤라의 얼굴이 지나치게 담담했다. 그녀는 진실을 고하고 있었다.
안젤라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안젤라였다. 그녀는 누구를 흉내 낼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고 든 자리가 티 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를로스에게서 베를리아의 존재감이 이토록 클 줄은 차마 짐작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제가 감히 리들턴 백작님을 동정했어서.”
안젤라는 서서히 인정했다. 베를리아가 자신을 미워했던 것은 그녀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누구라도 보일 수 있는 감정이었을 뿐인데 겨우 그걸 몰라서… 제가 그 앞에서 잘난 척을 했어요.”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매번 발버둥 쳤다. 그것은 안젤라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도 언제든 겪을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것을 몰라서 감히 베를리아를 안쓰럽게 여겼다.
안젤라가 특별히 대단해서도, 베를리아가 남보다 못나서도 아니었는데.
“…성녀님,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입매를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던 베를리아가 문득 말을 꺼냈다. 정말로 안젤라 애거스틴은 이상한 사람이다.
어떻게 베를리아의 앞에서 저토록 솔직해질 수 있는 걸까? 안젤라는 얼마든지 베를리아를 미워할 수 있었다. 물론 올바른 분노의 방향은 변심하는 연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과 행동은 옳고 그름에 따라서만 정해지지는 않는다. 제 연인을 뒤흔드는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은 많은 인간이 범해 온 짓이었다.
그런데도 안젤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가 이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제 행동을 되짚어 보며 사과를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안젤라 애거스틴, 그녀는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원작은 안젤라에 대하여 그렇게 서술했다. 그녀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문장을 비웃었다. 성녀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는 여주인공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젤라 애거스틴은 최소한 미워하기는 힘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녀님, 나는 황태자가 미워요.”
어쩌면 이런 것이 원작에 적혀 있던 여주인공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안젤라가 지나치게 솔직해진 까닭에 베를리아의 목소리에도 힘이 빠져 버렸다. 아무리 가시를 곤두세우고 있어도 상대가 무장을 해제해 버린 채 다가와 결국 그 가시가 소용없음을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솔직해지고 만다.
“그러니까 내가 그 개자식을 사랑할 일은 다시는 없다는 거죠.”
‘그러니 베를리아가 황태자를 흔들리라는 것은 당신의 괜한 기우다.’ 그녀는 안젤라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베를리아는 처음부터 안젤라가 숨긴 진실을 카를로스에게 제 입으로 직접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성녀가 무언가를 숨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카를로스와 안젤라 사이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건 굳이 베를리아가 나서지 않아도 언젠가는 터질 폭탄인 셈이었다.
“제가 성녀님께 사람을 보낸 것은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녀가 성녀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애초부터 다른 것이었다.
“왜 황태자에게 교황의 상태를 알리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저 진짜 베를리아가 황태자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느라 교황의 일 따위 기억하지 못했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교황이 쓰러지는 것은 베를리아가 죽고 메리쉬가 다시 므시아의 세력을 모아 본격적인 악역으로 등장하던 시점이었다.
교황이 의식 불명에 빠진 사건은 왜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만큼 원작에서도 커다란 줄기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그때 카를로스는 이미 성검을 얻은 시점이었다. 원작에서는 일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안젤라가 구태여 교황의 건강 상태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이 죽은 후 황태자는 자신이 성검의 주인임을 드러내며 신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성녀와 기부금 덕에 받았던 지지가 온전히 카를로스의 것으로 옮겨 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기가 바뀌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현재와 원작 속에서 안젤라의 마음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성녀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그녀가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과 달라지더라도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게 왜 궁금하세요?”
“비밀을 입 다물어 주는데 이 정도는 물어도 괜찮지 않나요?”
“…저는 아직 카를로스와 결혼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안젤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의 대답은 단연코 베를리아조차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겪는 시련조차도 주인공들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으니까. 연인을 밀어내는 것조차도 상대를 위함이었지 헤어지고 싶어서는 아니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국 주인공들은 이어질 사이였다. 그들의 행복은 예정되어 있었다. 소설을 읽는 이들 중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녀도 의심하지 않았다. 믿음과는 별개로 안젤라와 카를로스의 사랑이 결실을 맺길 원할 만큼 깊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황태자비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어요. 여러 가지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긴 하지만, 저는 정말로 카를을 사랑하니까요.”
떠올려 보면 황태자와 성녀의 관계가 그들이 결혼할 만큼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성녀를 만났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위험이 사라진 뒤였다. 당시의 그에게는 안젤라를 향한 마음을 품을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을 시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성격이었으니 카를로스는 황태자비를 맞을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성녀의 이해가 없었다면 둘 사이는 틀어졌을지도 몰랐다.
베를리아는 마침내 원작에서 벗어나 황태자와 성녀의 사이를 정확히 보게 되었다. 안젤라가 전적으로 카를로스를 이해해 기다려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로 간의 결실을 안젤라도 아직은 원하지 않던 것이다.
“교황이 죽는다고 해서 황태자가 바로 청혼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베를리아가 떠보듯이 물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녀와 결혼하는 것은 황태자에게 이득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카를로스는 기회를 놓칠 자가 아니었다. 상황이 따라주고 가로막는 것이 없다면 그는 제게 올 이득을 놓치지 않을 터였다.
“저, 그렇게까지 어리석진 않아요.”
안젤라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성녀는 방금 응접실에서 막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게 똑바로 베를리아와 두 눈을 맞춰 왔다.
“왜요, 사랑하니까 결혼할 수도 있죠.”
베를리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드물게 살짝 미간을 찌푸린 안젤라가 잠시 침묵했다.
“…저 알고 있어요.”
성녀가 숨을 한 번 들이쉬더니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 카를이 제가 성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원작의 베를리아도 성녀가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몰랐을 터였다. 오늘 안젤라가 여러모로 그녀를 놀랍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