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4)
대신관 알마데이르 루이넌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황태자의 이름 뒤에 숨어 기부해 오던 것을 죄다 회수하겠다고 하더니, 다시 베를리아의 이름으로 기부하고 또 이번에는 황태자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겠다고 한다. 좀처럼 베를리아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루이넌 대신관, 베를리아 님을 계속 세워 둘 셈인 겁니까?”
메리쉬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대신관은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관들 사이에, 그뿐만 아니라 신전의 문을 넘어서까지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이 베를리아가 원하던 바였다. 그 때문에 구경거리 보듯 하는 시선들도 내버려 뒀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넋 놓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 메리쉬가 적절할 때에 끊어 준 셈이었다.
“아, 아! 들어가시죠.”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대신관 알마데이르가 앞장섰다. 그는 재빠르게 베를리아를 가장 내밀한 응접실로 안내했다. 일반적으로 대신관과 독대하기를 바라는 고위급 귀족들을 위한 개인 기도실이었다.
기도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도 대신관은 분주했다. 알마데이르는 차를 준비하면서도 시종일관 베를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행보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 큰 몫을 차지했다.
베를리아가 기존에 사용하던 방식은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했다. 힘과 돈, 가진 것을 전부 쏟아부어 밀어붙인다. 그게 대신관을 비롯한 대다수가 아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방식이었다. 그마저도 황태자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았다. 그런데 요즘은 돈을 쓰는 것도, 권력을 쓰는 것도 어느 것 하나 그 방향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뭘 요구할지 무서운가요?”
베를리아가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찻잔이 그녀의 입가를 가리고 있었으나 대신관은 어쩐지 베를리아가 웃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마데이르는 자신이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그 이유를 대신관은 몰랐고 그녀는 알았다.
정치판에 베를리아같이 구는 이들이 그녀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귀족들이나 신관이 그녀의 말에 휘말리는 까닭은 하나였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베를리아 리들턴이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괄시하던 베를리아 리들턴.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던 것이 있었다. 만약 베를리아가 정말로 그토록 단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더라면 그 똑똑하다는 마법사들도 대적하기 힘들어 그저 쫓아냈었던 네멘 리들턴의 손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사실.
베를리아는 그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부했다고 신전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죠.”
지금까지 많은 귀족이 그런 식으로 신관과의 유착을 만들었고 그것은 카를로스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리아가 이제 와 의뭉을 떨수록 대신관은 불안해졌다.
“그러니 대단한 요청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대신관의 입장에서는 아주 어렵지는 않을 테니까.
“조만간 중앙 귀족회로부터 고발장이 날아올 거예요.”
알마데이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대신관이라고 해서 신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알마데이르는 아직 교황도 추기경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레밀튼 지역에 지원을 나갔던 신관 하나가 베를리아를 고발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어쩌면 베를리아가 이 사안을 들어 자신을 경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마데이르가 베를리아의 돈으로 인해 빠르게 대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네이먼, 그 신관을 세세하게 조사하다 보면 신전도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베를리아의 말이 맞았다. 역병 환자들을 치유하는 일에 있어서 네이먼 홀로 방종하게 굴었을 리가 없었다. 줄줄이 엮여 나올 것이 빤했다.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가면 단연코 신전의 손해였다.
“그러니 고발장이 오면… 중앙 신전에서 역으로 중앙 귀족회를 고발하세요.”
“…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알마데이르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이먼 신관에게 고발하라고 부추긴 귀족이 있을 겁니다. 만약 네이먼 신관을 처벌해야 한다면, 그 귀족 또한 함께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텐데요.”
대신관이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신관의 고발 하나로 이토록 빠르게 일이 진행되어 베를리아를 부를 수 있던 이유는 그 고발장을 중앙 귀족회 소속의 귀족이 직접 받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중앙 귀족회에 속한 귀족은 귀족 중에서도 대대로 뿌리가 깊고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었다. 당연히 저들끼리의 감싸기도 심했으니 신전에게 고발을 당한다면 귀족회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개싸움이 될지도 몰랐다. 지지부진하게 결론도 나지 않고 서로 소모전만 될.
“다른 곳에 신경이 쏠리면 역병을 치료한 신관들에 관해서는 관심이 덜해질지도 모르죠.”
자칫 오해를 산다면 중앙 신전에서 자존심을 부린다고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앙 귀족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관이나 귀족 하나만 내줄 것을 굳이 단체끼리 부딪치는 셈이었으니까.
그렇게 서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 보면 원래의 목적에는 초점을 잃기 마련이었다.
“뭐…. 그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죠?”
베를리아가 확신을 주듯이 웃었다. 남들 싸울 때 논점을 흐트러뜨려 놓는 것쯤이야 그녀에게 어려울 리 없었다.
“…하나만 여쭈어도 될까요.”
잠시 침묵하던 대신관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요.”
“황태자 전하의 뜻입니까?”
그녀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알마데이르의 지금 발언이야말로 베를리아가 최종적으로 노렸던 것이었다.
카를로스를 황태자위까지 올린 사람은 베를리아였다. 그 후로도 쭉 황태자에게 대적하는 귀족들은 그녀의 손에 처리되었다. 황태자의 개라고 불릴 만큼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에게 헌신적인 존재였다. 황태자가 기라고 하면 기고, 죽으라고 해도 기꺼이 죽겠다고 나서는 그런 존재. 그러니까 베를리아가 황태자에게서 돌아섰다고 알려졌을 때 모두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언젠가는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제가 황태자 전하의 이름으로 기부했다는 것만 기억해두세요.”
그러므로 황태자와 베를리아를 다시 엮어서 관계 짓는 것쯤이야 어찌나 쉬운 일인가. 특히나 카를로스도 아니고, 그가 죽이려고 했던 베를리아의 입에서 황태자를 위한 말이 나왔을 때는.
어차피 카를로스와 베를리아의 관계는 누가 봐도 그녀의 일방적인 희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던가.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봐 온 이들에게는 새삼스러운 바가 없기도 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뿐이었으므로.
“…알겠습니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더 이상 자세하게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해석은 알마데이르의 몫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되었으리라는 것을.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기부금은 핑계고 카를로스가 일부러 베를리아를 신전으로 보냈다.
즉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었다. 황태자가 먼저 나서서 신전의 편을 들었다. 만약 그럴 경우… 귀족들은 절대 카를로스를 가만히 두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너무 요란하게 중앙 신전에 나타났기에 그 허술함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사실이 알려져서 황태자에게 좋아질 일이 없었으니까. 귀족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니 보이는 그대로 믿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하여금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하여 의심을 지니게 하는 것. 그런 것이 베를리아와 카를로스 사이의 관계성이었다.
***
“백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베를리아가 리들턴의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재스민이 마중을 나왔다. 주인이 없는 저택에 누군가를 들여놨다는 것은 사전에 그녀가 허락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베를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응접실에 있어?”
“네.”
방문자의 위치를 확인한 베를리아가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연 그녀의 걸음이 잠시 우뚝 멈춰 섰다. 눈앞에 들어온 상대는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사람이기도 했다.
“…리들턴 백작님.”
상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덜덜 떨고 있던 다리가 아직도 떨렸다. 입술이고 손톱이고 죄 물어뜯었던지 얼굴도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좋은 상태로 지냈을 리가 없었다. 베를리아의 처벌로 인하여 그는 거의 신전에서 파면 당하다시피 했으니까.
“네이먼.”
베를리아가 신관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네이먼의 몸이 움찔거렸다. 멈칫멈칫하던 신관과 베를리아의 거리가 한 발자국쯤 남았을 무렵이었다.
“백작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쿵 소리가 날 만큼 격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은 네이먼이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그녀는 그 행동에도 멈추지 않고 걸어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신관은 마치 허락을 받지 않고는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는 너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는데.”
사실이었다. 베를리아가 한 행동은 그저 신관이 아닌, 네이먼의 본래 신분인 몰락 귀족으로서는 누릴 수 없던 것들을 고스란히 반납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그랬다. 당장 굶주리는 이에게 금화 한 개를 쥐여 주면 상상도 못할 돈을 얻은 셈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다음에 은화 한 개를 건네준다면? 그것은 부족한 돈이 될 터였다. 더 담고는 살아도 덜어내고 사는 것은 힘들다. 설령 그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할지라도.
“…제가, …제가, 리들턴 백작님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베를리아의 담담한 태도에 네이먼이 다급하게 외쳤다. 마치 자신이 살 길은 그녀뿐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