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3)
다시 말하지만 정치에 절대적인 아군은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서로 협력을 한다지만, 귀족과 신관이 언제까지고 같은 편일 수 있는 것일까?
베를리아가 내린 답은 ‘아니다’였다. 저 둘은 엄연히 다른 부류였으므로.
만약 그들이 영원토록 공생할 수 있었더라면 소설 속에서 카를로스가 황권과 신권을 통합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실의 뜻으로 책임자가 된 저의 명령에 불복한 신관들에게 벌을 내린 것이 사사로운 행동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엄연히 제국법에 따라 제 지위에 맞게 행동했습니다만….”
아무리 황권이 약해졌다고 해도 귀족은 응당 황족을 받들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황족모독죄가 괜히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황족을 모독했다면 귀족들은 좌시해서는 안 된다.
전쟁 시의 지휘관은 황제가 자신을 대신하여 군대에 관한 권한을 위임한 존재였다. 어찌 보면 제국법 7조 5항에 근거하여 베를리아 또한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분들께서는 신관들이 황실을 모욕하거나 제국법을 어긴다고 할지라도 입을 다물고 계시겠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의 말과 같은 상황에서 신관들이 그 상대라 하여 입을 다문다면 황족보다도 신관을 두려워하는 셈이었다. 기본적으로 제국의 지위는 황족 아래에 귀족이 있었다. 황족보다도 신관을 위로 올리게 되면 당연히 귀족들도 신관의 밑이 되는 것이다.
제국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국법에 따른 베를리아의 행동에 반발했다는 것은 즉 제국법을 어겼다는 뜻이다. 공공연한 범법 행위는 애써 무마한다고 할지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제국법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것은 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베를리아의 말에 누가 시원하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 건, 비약이오, 백작!”
다들 베를리아의 말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농간 같아도 이 부분에서 타협할 수 있는 귀족은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권력 앞에서 귀족들과 신관들은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귀족 대부분은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신관보다 높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귀족의 푸른 피에 자부심이 많은 작자는 더욱이 그랬다. 신관이란 성력이 있다면 평민 또한 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하필 이 중앙 귀족회는 귀족 중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중앙 귀족회는 베를리아를 두고 그저 베를리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엄연히 리들턴의 성을 가진 백작이었다. 이 나라의 귀족, 그들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분류한다면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베를리아는 고발장에 적힌 내용을 자신과 신관 사이의 일이 아닌 귀족과 신관 사이의 일로 만들어 버린 셈이었다.
“하면 리들턴 백작은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대하여 자신하오?”
반황태자파의 수장인 라미르니에 후작이 베를리아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귀족의 푸른 피를 고집하는 대표적인 원로 귀족이었다. 신관들이 귀족의 위에 있다는 것도, 평민인 베를리아가 귀족이 되었다는 것도, 황후의 자식이 아닌 4황자 카를로스가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무엇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역병에 관한 보고서의 기록을 들추어 보면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는지 같은 것은 금방 드러날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베를리아에게 질문하는 의도가 있었다. 아무리 베를리아가 유능하다고 해도 치료의 현장에서는 신관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관들이 저들끼리 작당을 하고자 한다면 어려울 게 없었다. 기록이야 조작하면 되고 귀족들의 비호 아래 하나둘쯤은 뇌물죄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결국 인간은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신관들이 성녀와 사이가 나쁜 것으로 알려진 베를리아의 편을 들겠는가, 그래도 그들의 무리에 속한 네이먼의 편을 들겠는가.
그러니 라미르니에 후작은 꼬투리라도 잡을 작정이었다. 베를리아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어떤 잘못도 없다 자신한다면 그사이에 생긴 틈 하나라도 파고들 생각인 게 뻔했다. 그녀가 그르고 신관들이 옳았다고.
“그것은 제가 건네 드리는 보고서를 보신 후에 판단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이번에도 얄미울 만큼 여유롭게 답을 내어 놓았다. 그녀가 준비해 왔던 서류를 서기관에게 건네자 서기관이 귀족들에게 그것을 나눠 주었다.
“이미 보고서는 받아보았는데.”
“그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그렇다면 객관성이 없지 않은가.”
라미르니에 후작은 베를리아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마 평소 같았다면 그녀가 작성한 보고서 따위 믿어 주지 않았을 테다. 베를리아의 혀가 뱀의 것처럼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황제 폐하께서 권한을 내리신 저의 명도 듣지 않고 제국법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혹은 제국의 귀족인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라미르니에 후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귀족의 작위는 황제의 칙서가 필요했다. 귀족들이 베를리아를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기고 뒤에서 수군거리면서도 대놓고 그녀의 작위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한 번 내려진 작위는 황제의 명이기에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랬으니 베를리아는 귀족이었다. 후작은 그녀를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베를리아가 귀족임을 들먹이는 이상 신관의 편을 드는 것 또한 탐탁지 않을 터였다.
“하여 리들턴 백작, 그대는 죄가 없다?”
이미 분위기는 완전히 베를리아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그녀에게 묻는 카를로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정말로 그녀는 그의 도움 하나 없이도 아주 잘해내고 있었으니까.
“인간인 이상 어찌 완벽하기만 하겠습니까? 귀족회분들께서도 제게 괜히 소환장을 보내기로 결정하셨지는 않았겠지요. 제 처벌이 과했다고 여기시는 분들이 있으신 것도 이해합니다.”
그녀의 어투가 더없이 정중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여전히 느긋하게 좌중을 둘러보는 것이 마치 한 편의 연극이라도 찍는 것 같았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듦과 동시에 중앙 귀족회가 책임을 피할 구멍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요는 나도 실수를 할 수 있으니 너희의 실수 또한 이해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 징계를 내리신다고 한다면 제 혈기 어린 행동에 관한 대가이니 얌전히 받도록 하지요.”
징계를 받겠다는 사람치고 베를리아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혈기 어린 것으로 일축해 버렸다. 즉 다른 말로는 그러니 여기서 적당히 넘어가란 뜻이었다.
애초에 마녀사냥에서도 빠져나온 베를리아였다. 이 문제 하나로 그녀를 완전히 쳐내고자 하는 어리석은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저 베를리아가 너무 세를 키우니 한순간이라도 죽여 놓고 싶었을 확률이 높았다.
베를리아와의 전면전을 원할 귀족은 없다는 의미였다. 굳이 여기서 더 나가는 것보다는 그녀가 숨통을 적당히 트여줄 때 뒤로 빠지는 것이 서로에게도 이득이었다.
결국 그날의 회의 결과는 베를리아가 약간의 벌금을 무는 것뿐이었다. 물론 리들턴의 재산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할 돈이었다.
그리고 회의의 끝자락에서 베를리아가 또 다른 파란을 던져놓았다. 발언권을 얻기 위하여 손을 든 그녀를 모두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발언하라, 리들턴 백작.”
황태자 또한 망설였으나 탐탁지 않은 기색을 띠면서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 귀족회에서 귀족인 베를리아가 발언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중앙 귀족회에 정식적으로 신전에 대한 고발을 요청합니다.”
그 말에 누군가는 경악을, 누군가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자고로 베를리아는 당하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
신전에 대한 고발은 쉽게 할 수 없었다. 귀족과 신관들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보통 그들 사이의 일은 중앙 귀족회와 중앙 신전을 거쳐 진행되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를 위해 중앙 귀족회를 열어줄 리 만무했으므로 그녀는 고발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중앙 귀족회가 열린 시점에서는 달랐다. 베를리아는 기왕 이렇게 된 것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를 망하게 하려면 귀족이든 신전이든 우선 어느 한쪽의 세력은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단언컨대 귀족들은 카를로스와 노선을 달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현재 정세가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 귀족파, 황제파로 나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후계는 카를로스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황위 후계를 끌어내리는 것과 황태자와 반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매해 엄청난 기부금을 내온 사람이 베를리아라는 사실이 밝혀지고서도 신전이 카를로스와 그녀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는 까닭이었다. 황태자의 핏줄은 불변하는 것이었고 그의 연인은 성녀였으니까.
‘성녀는 지금 황태자와 반목할 생각이 없지.’
카를로스를 죽일 수도 없고, 새로운 황위 후계도 없는 지금 베를리아에게는 그를 억누를 신전 세력이 가장 필요했다.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신전 내에서 성녀를 대신할 만큼 세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황태자에게 대적할 만한 존재를 편으로 끌어들인다던가, 혹은 황태자가 귀족들과 신전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던가.
중앙 귀족회와 중앙 신전이 서로에 대한 고발장을 주고받는 지금만큼 후자의 계획을 실행하기에 좋은 기회는 드물었다. 카를로스는 귀족들과 신전 중에서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면 아마도 어느 쪽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본디 그런 모습이 불신을 주기에는 더욱더 좋은 법이었다.
그래서 황궁을 나온 베를리아는 곧장 중앙 신전으로 향했다.
***
“베릴.”
미리 연락을 취한 덕에 신전의 입구에는 메리쉬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리들턴의 문양을 단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신관들의 웅성거림이 적나라하게 들렸다. 신전 입구를 점령한 검은 마차들에 대신관이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바라보며 베를리아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기부를 할까 합니다만, 대신관.”
“예…?”
“황태자 전하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