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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58)화 (58/148)

58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2)


 

그녀가 카를로스에게 묻긴 했지만, 대답할 시간을 줄 생각은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아 주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귀족적인 예법을 잘 몰라서 한 실수다, 겁박은 했으나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자중하게 할 것이다, 혹은 황태자의 선에서 적당한 징계를 내리겠다. 이것들 말고 다른 방법이었어?”

그녀가 나열한 것들은 전부 다 베를리아를 깎아내리거나, 여전히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뜻대로 휘둘린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셈이거나, 끽 해 봐야 황태자의 자비에 기대어 약한 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셋 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적나라한 비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로 돌아섰다. 더는 할 말도 없었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똑똑히 봐, 카를로스 에덴버. 난 같잖은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베를리아가 망설임 없이 회의장을 향하여 발을 내디뎠다. 카를로스와의 대화는 참 쓸데없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것이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애초에 이를 노리고 황태자의 부름에 응한 것이기도 했고.

황궁의 복도를 걷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아까보다 훨씬 가벼웠다. 또각, 또각. 날 선 굽이 복도의 바닥에 닿는 소리가 전보다 작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기필코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해낼 생각이었다.

***

“베를리아 리들턴, 중앙으로 나오라.”

회의실에 모두가 모이자 황태자가 명했다. 귀족들의 좌석이 원형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로 베를리아가 걸어갔다. 보통 고발자의 이름은 신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부쳐졌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에게 받은 것이 없었기에 뇌물죄를 피하면서도, 이렇듯 피해당했다 주장할 수 있는 신관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이먼. 베를리아가 신관들에 보상과 벌을 주었던 첫날, 가장 방종하게 굴었던 죄로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벌을 받았던 신관이었다. 그녀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있어 가장 나태했던 신관들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베를리아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네이먼만이 유일하게 뇌물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두 번의 기회가 없기에 신관들은 절실했다. 므시아를 괄시하고 업신여기는 이들이었다. 재차 기회를 줬다면 세 번의 기회도 요구할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답지 않게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그저 인간의 목숨이 이 세계보다는 가볍지 않은 곳에서 온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굳이 베를리아 리들턴의 악행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원작의 베를리아가 좋아서 인간을 죽였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른다. 지금 그녀가 이렇게 번거로워졌듯이.

“읊어라.”

황태자가 명하자 고발장을 들고 온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요약하자면 베를리아가 역병 현장에서 통솔권을 제멋대로 휘둘렀다는 내용이었다. 고발장에 따르면, 베를리아는 신관들이 세워 놓은 적법한 치료 과정을 무시하였고 그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오히려 제 뜻을 거슬렀다며 절차도 밟지 않고 신관들에게 부당한 처벌을 했다. 고발장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정말 저들 좋은 대로 써놨네.’

백작이 고하는 고발 내용을 듣는 동안 베를리아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에덴버는 신성 제국이었다. 그러니 고발장의 내용대로라면 그녀의 죄는 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의 표정에 초조한 기색 하나 없자 불안해지는 것은 도리어 그녀를 고발할 계획을 짠 귀족들이었다.

고발의 내용을 읊는 목소리마저 멎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가운데로 황태자가 중앙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물었다.

“리들턴 백작, 그대는 사사로운 이유로 신관을 겁박하여 에덴버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전을 모욕했다. 인정하는가?”

귀족들의 시선이 베를리아에게로 쏠렸다. 정치판에 본디 영원한 아군이란 없는 법이었다. 황태자비 후보를 논할 때 그녀는 귀족파의 수장인 아를레나 공작과 손을 잡았었다. 그러나 공작은 이번 일에 침묵했다.

베를리아도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황태자비 후보에 대한 안건이야 각 파벌의 이권이 부딪혔기 때문에 공작과 같은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귀족들은 베를리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디 평민으로 태어난 데다 귀족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후계 구도의 판을 그 평민이 뒤집어엎어 놨으니 어찌 가진 감정이 좋으랴.

그러니 귀족 대부분이 베를리아를 이곳에서 치우고 싶어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그녀의 편을 든다는 것은 다른 귀족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에 십상이었다. 그것을 감수할 만큼의 의리 따위 아를레나 공작과 베를리아의 사이에는 없었다.

카를로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는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 제 도움을 거절하고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베를리아의 고난을 구태여 확인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면서 베를리아는 생각했다.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내게 다시 손을 뻗어 줬더라면 네가 이토록 밉지는 않았을 텐데.’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두 눈은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정말로 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해 있는지 혹은 자신이 보고 싶은 상대만을 담고 있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결국 이번에도 나를 구명하는 것은 나뿐이지.’

베를리아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비식 웃음이 나왔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정합니다.”

파란이 일었다. 모두가 당연히 베를리아의 입에서 부정이나 변명이 나오리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네들에게 그녀가 할 말 따위는 처음부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단, 사사롭다던가… 명예를 실추시켰다, 신전을 모욕했다 등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중요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면 될 일이었다.

“리들턴 백작!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말장난을 하는 것이오!”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베를리아의 말은 모순적이었다. 고발장에 서술된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고 했으면서 방금 덧붙인 말들은 그 인정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제국법 7조 5항!”

지금까지 알려진 성격답지 않게 조용조용히 말을 하던 베를리아가 돌연 목소리를 키웠다.

“제국법에 의하면 국가적 규모의 재난이 발생할 시 책임자는 전쟁 시의 지휘관과 같은 권한을 가집니다.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그녀가 떠보듯이 말했다. 흠흠, 헛기침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베를리아는 귀족들의 뻔한 자존심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평민인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하여 모른다고 나설 귀족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제국법을 여기서 확인해 보기에도 면이 서지 않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물론 그런 법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베를리아는 빙의하자마자 므시아의 보좌관에게 제국법을 전부 훑게 했었다. 바로 이런 때를 위하여.

‘자고로 법치 국가에서 법을 알아둬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자신의 적절한 인재 사용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모든 법을 외울 수는 없어도, 베를리아 리들턴에게는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인재들이 얼마든지 충분했다. 그것이 오늘에야말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고의로 역병을 일으킨 자에 대한 수색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레밀튼 지역에서 일어난 역병을 대처하기 위한 책임 또한 맡게 되었다. 그리고 보통 전쟁 시 군대의 원칙은 간단했다.

“상명하복. 군대에서 그것을 어기면 어찌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님?”

베를리아가 데니안을 휙 돌아봤다. 황실의 기사단장이자 황태자의 최측근이었으므로, 그도 중앙 귀족회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데니안은 이 중앙 귀족회에서 매우 드물게 베를리아에게 거짓으로 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대 처벌 수위로는 즉결 처분이 가능합니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도움을 거절한 이후로 내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데니안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다. 같은 평민 출신이었으니 그도 알았다. 귀족들은 귀족이 된 평민을 용납하기 싫어한다. 그러니 베를리아가 웬만한 이유를 늘어놓아도 귀족회에는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 사태의 책임자로 저를 직접 임명하셨지요. 그리고 전하께 권한을 위임하신 분은 지엄하신 황제 폐하십니다.”

베를리아는 데니안의 염려를 뒤로하고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그가 황태자로부터 도움을 받길 원했던 이유를 모를 만큼 그녀는 아둔하지 않았다. 확실히 카를로스가 끼어들었다면 쉽게 끝났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쉬운 게 그녀가 원하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보여 주고 싶었다. 진짜 베를리아에게 모든 방법의 종착점은 결국 카를로스 에덴버였으나, 그녀는 다르다는 것을.

그녀의 방법 어디에도 카를로스는 없었다. 수단도 종착점도 그 어디에도 그를 끼워 주지 않을 테다. 지금도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지 않소! 그대가 아무리 이 재난의 책임자라고는 하나 부당한 명령을 내렸다면 신관들에게는 당연히 거부할 권리가….”

베를리아가 따지고 드는 귀족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신전의 권위가 이 나라 황족과 귀족들보다 높답니까?”

베를리아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로 어디 한 번 대답해 보라는 듯이 그 귀족을 쳐다봤다. 조금 전 일어났던 파란은 거짓이라는 듯이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응당 이럴 줄 알고 내뱉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발언은 신성 제국인 에덴버가 오래도록 품은 채 해결하지 못한 거대한 문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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