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모든 것은 어딘가로부터 시작됐다(1)
“네가? 날?”
“그래. 널 도울 거야.”
베를리아가 재차 물어도 카를로스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녀가 힐끔 데니안을 바라봤다. 데니안의 얼굴은 평온했다. 데니안의 성격을 미루어보아 그가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카를로스를 완전히 용서했을 리는 만무했다. 황태자 또한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데니안이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두 남자 간에는 이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데니안이 거리낌 없이 베를리아를 황태자에게 데려올 수 있었던 듯했다.
비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봐도 좋은 의미인 것 같지는 않았던 터라 카를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런 반응인 거지?”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데니안조차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돕겠다고, 네가?”
베를리아는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내뱉는 순간마다 제 기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카를로스의 목소리를 더 듣는 것도 짜증이 났기에 그녀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적선이 아니라?”
“무슨…!”
“베릴, 그런 게 아니고…!”
베를리아가 비양하자 카를로스가 발끈했다. 데니안이 황태자를 대신하여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끊어내며 말을 토해냈다.
“카를로스 에덴버, 네가 나를 진짜로 도울 생각이 있었더라면 지금에서야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겠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를로스는 진실로 억울한 표정이었다. 애석하게도 베를리아는 그가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이해했다. 황태자는 정말로 그녀를 도울 생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네가 중앙 귀족 회의에서 나에게 소환장을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게 언젠데?”
중앙 귀족회는 중앙 의원들과는 달랐다. 중앙 의원들이 귀족과 황족 내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중앙 귀족회는 철저히 귀족들에 의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중립을 지키고 회의를 주도할 이가 필요했다. 귀족회의 의장은 귀족들을 통솔하고 중재를 할 때 귀족들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아야 했다. 또한,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 귀족들 간의 세력 다툼을 막을 수 있도록 귀족이 아니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중앙 귀족회의 의장은 대체로 역대 황태자들이 맡아 왔다. 이따금 황태자가 귀족 세력 간의 중립을 지켜 주지 않아 종종 문제가 생기기는 했으나 어쨌든 표면상으로는 그러했다.
나중에 귀족들을 이끌어가야 할 차기 황제로서, 중앙 귀족회의 의장을 맡는 것은 황태자에게 능력을 키우기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역대 황태자들은 대부분 의장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귀족들이 모두 반대하고 싶어도 어차피 황제를 제외하고 남은 황족은 카를로스뿐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황태자가 중앙 귀족회의 의장이 되었다.
중앙 귀족회가 언제부터 베를리아를 소환할 계획을 꾸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소환장이 그녀에게 도착하기 전부터 카를로스는 이 사실을 알았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건은 중앙 귀족회가 워낙 기습적으로 행동한 것이라 나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
“그래서 나보다 늦게 알았어?”
카를로스의 변명을 듣고자 하는 마음 따위 없었다. 베를리아가 다시 물었다. 그녀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중앙 귀족회는 일을 벌였다. 바빴던 탓에 여기저기에 심어 놓은 정보원들을 신경 쓰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므시아의 정보원들이 일을 허투루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전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말대로 중앙 귀족회의 행동은 아주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맞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베를리아에게 소환장이 도착하기 전, 카를로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해 줄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회의 의장이었으므로.
“네가 진짜로 나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다면 소환장이 날아오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어야지.”
“하, 어찌 됐든 난 널 도우려고….”
“그러니까 적선이라는 거야.”
카를로스는 마치 그녀가 괜한 억지를 피운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베를리아가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할 때까지 기다린 거잖아, 지금.”
황태자가 조금만 더 빨리 알려줬더라도 그녀에게는 훨씬 더 대비할 시간이 생겼을 것이다. 그랬으면 카를로스가 나설 필요도 없이 일은 빠르게 해결됐을지도 몰랐다. 베를리아의 눈에는 굳이 지금에 와서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이 그런 기회조차 없도록 기다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원작 속에서도 그랬다. 카를로스는 늘 베를리아 리들턴이 귀족들에게 온갖 모욕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황태자로서 귀족들의 주의를 돌려 주고는 했다. 마치 네 처지를 깨달으라는 것처럼.
“다른 말로 해 줘? 내가 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게 정말 아니야?”
그래야만 베를리아가 제 밑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카를로스는 기가 찬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더니 가차 없이 베를리아를 비난했다.
“베를리아, 너는 도대체가 사람이 왜 그 모양으로 꼬인 것이지? 도와주겠다는 말 하나도 제대로 못 받아들여서는….”
황태자는 혀를 차며 그녀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고집불통인 양 굴었다. 그의 태도는 베를리아의 잘못을 확신하고 있었다.
“넌 늘 이런 식이지.”
순간 베를리아의 입에서 무의식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의식이 제멋대로 흘러갔다.
기억이 또 떠올랐다.
카를로스는 안젤라와 가까워질수록 베를리아와는 사이가 틀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자를 향한 베를리아의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기인해 있었으니까.
안젤라는 자신으로 인해 사이가 나빠진 두 사람을 두고 보지 못했다. 그래서 기어코 그녀는 카를로스로 하여금 베를리아를 찾게 만들었다.
‘당장, 나가…!’
그리고 베를리아는 함께 찾아온 카를로스와 안젤라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 버렸다. 그녀가 저택 밖으로 거칠게 안젤라를 떠밀었다. 머리가 좋은 베를리아는 단번에 이해해 버린 것이다. 카를로스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저택으로 직접 찾아오다니, 베를리아가 발치에 매달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 카를로스는 먼저 그녀를 찾는 법이 없었으니까.
베를리아는 알았다. 지금 여기서 카를로스가 그녀에게 유하게 군다고 해도 전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성녀가 원했기에 벌어지는 한 편의 쇼였다.
‘저는 그저 화해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잔뜩 기죽어 있는 안젤라의 가련한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 앞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베를리아에게 카를로스는 화를 냈다.
‘베를리아 리들턴! 좋은 마음으로 너를 봐주려는 상대에게 대체 무슨 짓이야! 넌 도대체가…!’
왜? 성녀를 위한 장단에 그녀가 같이 춤추지 않았으니까.
‘넌 정말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못돼 처먹어서는!’
황태자는 그때도 베를리아를 비난했다. 카를로스에게는 베를리아가 준 열쇠가 있었다.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곧바로 리들턴의 저택으로 이동해 올 수 있는 열쇠가.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그 사실이 베를리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카를, 너는… 너는, 이게… 좋은 거야?’
그러나 카를로스는 그녀의 반박에 오히려 더욱 역정을 낼 뿐이었다.
‘좋게 좋게 넘어가면 너에게도 나쁠 것 없을 텐데, 왜 이리 삐뚤게 굴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좋게 봐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일 터였다. 그는 굳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황태자가 대놓고 막말을 해도 그에게만은 모진 말을 못하는 것이 베를리아 리들턴이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바라는 것을 들어 주는 김에 베를리아의 행동을 넘어가 주는 것쯤이야 카를로스에게는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진짜 베를리아는 카를로스를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카를로스는 어쨌든 좋게 넘어가면 좋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베를리아가 원하는 화해가 어떤 것인지, 아마도 그의 머릿속에는 들어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날, 카를로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젤라를 데리고 휙 돌아가 버렸다. 어차피 끝내는 베를리아가 제게 굽히고 들어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 행동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에덴버, 너는 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무기 삼아 나를 네 아래로 깔아 내렸잖아.”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카를로스 에덴버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늘 그런 방식으로 그녀가 자신의 아래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 게 아니다, 베릴. 카를은 정말로 너를….”
데니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꼬박 리들턴 백작님이라 부르더니 갑자기 애칭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우직한 기사는 아직까지도 제 주인이 어떤 인간인지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그런 네가 내 위에 설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이 있었지. 넌 그걸 싫어했어.”
“무슨 헛소리를. 태어날 때부터 황족인 내가?”
그녀의 말에 곧바로 카를로스에게서 반박이 흘러나왔다.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발끈한 어조였다.
“무늬만 황족도 황족이라면 그렇겠지.”
“그래봤자 뒷골목 평민이었던 네가…!”
베를리아의 빈정거림에 카를로스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녀가 짝, 양 손뼉을 부딪치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 뒷골목 평민이 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서, 네가 해내지 못한 일들을 해낼 때마다… 네가 그랬잖아.”
베를리아가 눈매를 휘며 말을 덧붙였다.
“‘태생은 숨기질 못하는군.’”
그 말을 듣자 데니안도 더는 카를로스를 비호하지 못했다.
‘태생은 숨기질 못하는군.’
그것은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정적들을 므시아의 방식으로 처리할 때마다 그녀를 멸시하며 내뱉었던 말이었으니까. 베를리아 리들턴의 방식이 그 어떤 귀족보다도 효율적으로 카를로스를 지킬 수 있었던 것과는 매우 별개로.
물론 카를로스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도 변했을 뿐이었다.
고마움이 열등감이 될 때까지.
“네 방식이 귀족답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 않나! 겨우 그것으로 혼자 상상해 나를 비하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카를로스는 끝까지 큰소리를 쳤다. 물론 그가 이럴 줄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딱히 기대도 안 했다. 베를리아가 시큰둥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래? 그럼 말해 봐, 넌 날 어떻게 도울 셈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