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56)화 (56/148)

56화. 발밑의 씨앗(10)


 

‘……쓸데없는 소리.’

심술을 그만 부리라는 리리카의 말에 움찔하던 메리쉬는 그의 말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리리카를 놓고 베를리아에게로 가버렸다. 성검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했으니 리리카에게는 볼일이 끝났다는 태도였다.

“그러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다.”

리리카 홀로 남은 방 안에서 그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 소리를 들은 리리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골로 간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미누엘라?”

“아마도 저번의 그 하녀한테서 들었겠지.”

“그보다 말 돌리지 마라, 릴케.”

“그래, 그러다가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네 몸이 먼저….”

미누엘라의 것과 다른 세 목소리가 쏟아졌다.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자 리리카가 그들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잠깐, 잠깐! 엔테아, 르누미아, 디히스트! 제발 한 명씩 말해. 너희가 동시에 말하면 정신없어서 알아듣기 힘들다고.”

미누엘라, 엔테아, 르누미아, 디히스트. 그 모두가 성검의 이름이었다.

“네가 죽어 버리면 우리는 또 잠들게 되니까 그렇지.”

앞선 목소리들과는 다른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리리카는 익숙한 듯이 대꾸했다.

“리드로턴, 나 걱정하는 거 다 알거든?”

“누가…!”

“새침데기네.”

“새침데기군.”

리드로턴이 당황해 언성을 높이자 성검 속의 다른 존재들이 그를 향해 말했다. 또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리리카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엔테아, 디히스트!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라, 가만두지 않을 테니…!”

발끈하는 리드로턴의 목소리와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를 놀리는 엔테아와 디히스트의 목소리가 섞여 시끌벅적했다. 순간 리리카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만, 나 머리 울려.”

리리카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실제 음성이 아니라 그의 정신을 통하여 들려오는 탓에 머릿속이 사나웠다. 리리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던 탓인지 금세 목소리들이 조용해졌다.

“아까부터 몸이 좋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지.”

미누엘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신성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조차 거둬낸 리리카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네가 우리에게 바란 것이 이미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는 것을 기억해.”

“우리는 분명 경고했었다. 네가 아닌 무언가를 바꾸려 하지 말라고.”

엔테아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르누미아는 리리카를 말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리리카가 픽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들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으리라. 그래서 리리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

“리리카가 성검의 주인…?”

메리쉬가 가져온 영상구의 기록을 살펴보던 베를리아가 놀라 중얼거렸다. 저런 식으로 성검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주인뿐이었다.

리리카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교황이 될 만한. 교황과 에루아트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가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그렇지만 성검의 주인은 그저 신성력을 기준으로만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성검은 에고 소드였다. 검에 담긴 영혼이 상대방을 거부한다면 아무리 신성력이 강해도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놀란 점은 그 부분이었다. 리리카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검의 인정을 받아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에게서 소설 속 주인공의 자리를 온전히 빼앗을 수 있으리라는.

“이거 재밌네.”

베를리아의 얼굴에 선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성검이 이미 주인을 택해 버린 것은 조금 골치 아팠다. 성검은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였다. 성검은 그 자존심이 대단히 높아 자신이 택한 주인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을 죽일 시, 다음 대 성검의 주인이 되는 일은 요원하다고 볼 수 있었다. 리리카를 섣부르게 건드리면 도리어 성검을 다른 쪽의 손에 넘겨주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성검의 힘을 노리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 결국은 리리카를 곁에 두는 자가 성검의 힘을 소유하게 될 터였다.

말 그대로 골치 아팠지만 재밌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리리카는 베를리아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그녀에게 유리한 판이 아니던가.

리리카가 부득부득 베를리아의 곁에 남아 있겠다고 주장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번거롭게 손을 쓰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황태자에게 이 사실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드러내는지. 그녀는 가만히 원작 속에서 카를로스가 성검을 찾아내던 장면을 상기했다. 지금껏 해 온 고생에 대한 보상과 앞으로 주인이 된 그에게 성검이 가져다 줄 찬란한 미래. 그것은 카를로스를 들뜨게 만들기에 차고 넘쳤다.

‘네가 가장 비참해질 순간에 이 사실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

진실로 그러했다. 사실이 드러나는 때, 이것이 황태자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기를 원했다.

똑똑똑.

그러나 그 즐거운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베를리아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재스민이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아 님, 방금 중앙 귀족 회의로부터 전갈이 날아왔습니다. 급한 것이니 빨리 확인을 해 달라고 보내온 하인이 하도 성화여서….”

재스민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탐탁지 않은 이 나라의 귀족들이 제 주인을 닦달하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데?”

베를리아가 반문하며 손을 내밀었다. 재스민이 그녀의 손에 붉은색의 편지지를 쥐여 주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작 속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에 의하자면 그것은 귀족 회의에서 보낸 소환장이었다.

***

기분이 더러웠다. 아주 조금 전까지도 매우 괜찮았던 것과는 상반되게.

“소환장이란 말이지.”

마차에 탄 베를리아의 입술이 뒤틀렸다. 중앙 귀족 회의의 소환장을 받았다면 확인하는 즉시 지체 없이 그 소환에 응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소환장이란 수신자에게 회의의 참석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 대상을 소환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감히 날 또 건드려?’

소환장은 중앙 귀족의 명예를 대단히 실추시킨 자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 건네는 것이었다. 즉 소환장을 받은 이후부터 베를리아는 중앙 귀족 회의에서 그녀의 무죄를 인정해 줄 때까지 죄인이란 뜻이었다.

소환장에는 무슨 사유로 그녀를 불러들이는지 정확히 쓰여 있지 않았다. 대단히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척 봐도 베를리아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하게 하고픈 심보가 빤했다.

‘그래봤자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녀의 손끝이 붉은 편지지의 끝자락을 구겼다. 이 시점에서 베를리아를 건드리기 가장 쉽고, 이 나라가 가장 예민하게 여길 문제, 그것은 하나뿐이었다. 분명 레밀튼 지역에 파견되었던 신관들에게 상과 벌을 내린 사안에 대한 것이리라. 이 망할 붉은 종이를 죄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귀족 회의를 무시한 처사라며 또 다른 방향으로 시비를 터 올 것이 뻔했다. 그러니 참는 수밖에.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베를리아 님.”

마부의 말에 생각을 멈춘 베를리아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걸음이 거칠었다. 또각또각, 높은 힐 소리가 매우 신경질적으로 황궁의 복도를 울렸다. 기분이 더러운 까닭에 평소보다 더 높고 굽이 날카로운 것을 신고 온 탓이기도 했다.

“잠깐, 이쪽으로….”

“뭐야?”

그때 복도의 기둥 뒤에서 튀어나온 데니안이 베를리아를 잡아 이끌었다. 그녀가 눈꼬리를 날카롭게 치켜뜨며 그를 돌아봤다. 도착하자마자 나타난 데니안이 베를리아에게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여기에서 기다렸다는 것은 그녀가 소환될 줄 알았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황태자는 또 무슨 방법으로 데니안을 꼬드긴 거지?’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태자와 데니안의 사이를 충분히 벌려 놨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했길래 데니안이 카를로스의 말을 곱게 듣고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중앙 귀족 회의는 황궁에서 소집된다. 그러니 당연히 베를리아에게 소환장이 날아온 일에 대하여 카를로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황태자와 무슨 상관이기에 저를 따로 부르는지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를리아는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서 카를로스와 귀족들이 작당하여 소환장을 보냈다는 가정도 이미 생각해 봤다. 그놈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법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굳이 무엇 하러 따로 그녀를 부른단 말인가. 베를리아로 하여금 생각할 시간만을 벌어 주는 셈인데.

“그래요, 가 보죠.”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꿍꿍이인지 들어나 봐야겠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니안이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를 황태자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뭐라고 할 줄 알고 안도하는 걸까. 데니안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그가 퍽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저 기사로서 존재할 수 없는 황태자의 측근이 순진한 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불렀어?”

황태자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굳이 카를로스의 말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사족 없이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뜻이었다.

“황태자에 대한 예의라고는 전혀 없군.”

그녀의 태도에 카를로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읊조렸다. 그러나 그 행동은 베를리아로 하여금 코웃음을 치도록 만들 뿐이었다.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해?”

순간 카를로스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애써 눌러 참으며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베를리아.”

“내가 뭘.”

“네가 레밀튼에서 신관들을 겁박하고 있다는 고발이 들어왔어!”

태평한 베를리아의 반응에 카를로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 담긴 내용은 분명 에덴버 제국에서 매우 심각한 내용이었다. 이 나라는 신의 뜻을 받들어 세워진 나라였다. 그런 까닭에 황족과 귀족들에게는 신관과 신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즉 고발대로라면 베를리아는 귀족의 의무를 저버린 셈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당당했다. 아니, 그녀의 어조는 당당함을 넘어서 불편한 심기를 전혀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소환장의 안건은 예상 못한 내용이 아니었으니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베를리아는 지금 매우 불쾌했다.

황태자의 태도가 마치 지금 그녀를 혼내는 듯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왜 불렀는지와 상관없이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애초부터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간섭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것이 베를리아가 레밀튼 지역의 전염병에 관한 일을 모두 위임받은 이유였다. 결국 그녀 덕분에 수도에서 일어난 역병을 쉽게 처리했으면서 이제와 잘난 듯 나서는 꼴이 탐탁할 리 없었다.

자기가 뭐라고. 베를리아는 삐뚤어지는 기분을 막지 않았다. 그녀가 짝다리를 짚고 선 채로 빈정거렸다.

“뭐, 그래서 네가 날 돕기라도 하게? 왜 쓸데없이 부르고….”

카를로스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그러려고 했다면?”

“뭐?”

의외의 답이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 음성에는 불신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난 너를 도울 거다, 베를리아.”

그러나 카를로스에게서 돌아온 것은 그 의문을 확신시켜 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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