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55)화 (55/148)

55화. 발밑의 씨앗(9)


 

‘잔인하기도 하시지.’

리리카의 시선이 베를리아에게 머물렀다. 그와 그녀 사이에 그어진 선은 명확했다. 그렇지만 그게 그녀다웠다. 그래서 리리카는 웃었다. 평소처럼, 광대같이.

“대신 약속을 하나만 해 줘요, 베를리아 양.”

리리카가 말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어쩌면 그녀보다도 잘 알았다. 베를리아에게 성검은 꼭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를로스의 손에 성검이 들어가서는 안 됐다.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나를 내치지 말아줘요.”

그러니까 아마 이 정도 요구는 괜찮으리라.

베를리아는 리리카가 말을 참 기묘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안전해진다. 누가? 오직 그녀에게로만 향하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치 그 대상이 리리카 본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알겠어요, 약속하죠.”

그래도 묻지 않았다. 성검이 필요했다. 그녀는 만에 하나의 불필요한 감정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리리카가 자신을 향한 감시를 거둬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만 지내면 된다. 그러니 이 정도야 약속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성검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리리카가 그녀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말을 꺼냈다. 베를리아는 눈을 치켜떴다. 그가 성검의 소재를 알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했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 말 지금 증명할 수 있어요?”

“증명할 수야 있지만, 지금 성검을 보는 것은 베를리아 양의 건강에 좋지 않을 겁니다.”

신성력이 가진 어떤 성질에 따라 베를리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성검은 그야말로 신성의 집합체였으니까.

“그렇다고 리리카 말만 믿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그러나 베를리아는 단호했다. 리리카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순전히 그녀의 직감이었다. 그녀는 겨우 그런 직감 하나로 누군가를 신뢰할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베릴.”

그런 베를리아를 말린 것은 메리쉬였다. 정말로 신성력이 그녀를 괴롭게 만든다면 그는 베를리아가 최대한 그 힘으로부터 멀어지길 바랐다.

“제가 확인하고 올게요.”

메리쉬라면 그녀도 믿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성검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 그가 모른다는 점이었다.

원작에서도 카를로스 역시 그 때문에 성검을 찾는 데 더 고생했다. 성검이 있는 장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이름만 존재할 뿐 그 형태는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신관들도 대부분 성검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정말로 중요한 성물들은 그런 식으로 형태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설령 신전에 침입하더라도 성물인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검이 성검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을 일정 수준 이상 가진 사람뿐이었다. 즉 신관들도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녀가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성검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랬으니 메리쉬를 혼자 보내기에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메리쉬가 저와 함께 직접 확인을 하고 그 장면을 영상구로 담아 베를리아 양이 확인하면 되겠네요.”

주저하는 그녀에게 리리카가 대안을 제시했다. 베를리아가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제 속내를 전부 다 아는 것처럼 구는 게 매우 불만스러웠다. 그렇지만 가장 나은 대안이었으므로 결국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주로 인한 고통은 겪고 겪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어도 베를리아의 몸에는 흑마법을 쓸 수 있도록 거듭나기 위하여 당해 온 실험으로 인한 여파가 남아 있었다.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견뎌내기에는 너무 지독한 고통이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미련했을까.’

그녀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멘 리들턴의 명을 어길 때마다 진짜 베를리아는 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매번 카를로스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명령을 위반했다. 이토록 지독하게 고통 받는 것은 베를리아의 몸에 저주가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중첩되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허락이 내려지자 메리쉬는 그제야 베를리아의 허리에 감아 두었던 팔을 거두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났다.

“다녀올게요, 베릴.”

메리쉬는 잠깐 방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면서 마치 멀리라도 가는 것처럼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유난이라고 욕할 테지만 베를리아의 눈에는 저보다 커다란 체구를 가진 그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다녀와.”

베를리아가 고개를 들어 메리쉬에게 쪽,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이 그녀의 입술에 짙게 머물렀다. 당장이라도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 하는 시선이었다.

베를리아가 모른 척 살랑 손을 흔들었다. 애정 표현도 좋지만, 그거야 성검을 확인하고 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제 주인의 뜻을 확인한 메리쉬가 아쉬움을 달래며 리리카의 뒤를 따라 나갔다.

***

“그렇게 무섭게 쳐다볼 필요 없어요. 나는 베를리아 양과 당신의 사이를 방해할 생각 같은 거 단 하나도 없으니까.”

둘만 남게 되자 맴도는 침묵을 깨고 리리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메리쉬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리리카를 탐탁지 않게 봤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러나 리리카가 덧붙인 말에 대해서는 따지고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런 눈을 하고서 아무런 사심도 없다고 말하는 건가?”

메리쉬가 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메리쉬와 리리카는 눈높이와 체구가 모두 비슷해서 어느 한쪽도 물러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순수한 전투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분명 메리쉬가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그 오만한 황태자조차도 그의 앞에서 주춤했거늘 리리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피곤하게 괜히 내게 날 세우지 말아요. 어차피 나를 어떻게 할 생각 없잖아요.”

리리카의 말투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매우 얄미웠으나 사실이었다. 저주로 인한 베를리아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리리카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저런 말이 탐탁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군.”

리리카의 능청스러운 말에도 메리쉬의 말투에는 도리어 더욱 날이 섰다.

‘베릴!’

그것은 메리쉬가 조금 전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아를 애타게 부르던 리리카의 목소리, 다급하던 얼굴. 그게 어떻게 단순한 감정의 깊이를 가진 사람의 것이란 말인가.

메리쉬의 말대로 리리카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리리카의 시선이 빤히 메리쉬에게 향했다. 메리쉬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리리카의 시선 속에서 한 가지 감정을 읽어냈다.

“하, 지금 네가 나를 원망하는 건가?”

메리쉬가 기가 찬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지금 누가 불쾌함을 느껴야 할 상황인데 리리카가 이런 감정을 드러낸다는 말인가.

“당신은 욕심이 많네요.”

리리카가 작게 읊조렸다. 원망, 체념, 그 외에도 명확하게 알 수 없이 이리저리 얽힌 감정들. 그것들을 띠고 웃는 리리카의 표정은 어쩐지 기괴했다.

“당신은 나를 전혀 경계할 필요가 없어요.”

리리카가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공간과 그의 손 사이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나는 베를리아 양의 행복을 바라고.”

그 빛은 점점 뭉쳐 하나의 형태를 갖춰갔다. 곧 리리카의 손에 검 하나가 쥐어졌다. 성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저 몸체가 얇고 긴 검이었다. 그나마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은 온통 새하얗다는 것뿐.

“베를리아 양은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테니까.”

그 밋밋한 검보다는 리리카의 말에 더 신경이 쏠렸다. 메리쉬가 빤히 그를 쳐다봤다. 리리카의 어조에 담긴 확신이 아이러니했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었으니까.

보석 하나 박혀 있지 않은 그저 새하얀 검. 그것을 리리카가 메리쉬에게 겨누었다.

“검, 안 뽑을 겁니까?”

리리카가 물었다. 메리쉬는 서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딘 날로 나를 베겠다고?”

메리쉬가 코웃음 쳤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메리쉬를 베기에는 듬성듬성 고르지 못한 성검의 날이 너무 우스웠다.

“당신이 그렇게 방심하는 순간….”

리리카의 움직임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가 별안간 앞으로 도약했다. 검날이 메리쉬의 목덜미를 스쳤다.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찰나에 달라진 메리쉬의 기세가 그곳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무것도 벨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검은 리리카의 신성력을 머금는 순간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메리쉬가 피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쾅!

“나와 지금 해 보자는 건가?”

메리쉬가 삽시간에 리리카를 벽에 처박았다. 그의 손아귀가 리리카의 목을 짓눌렀다.

“쿨럭…! 설, 마요.”

목을 눌려 숨을 쉬기 힘든 상황에서도 리리카는 웃고 있었다. 언제 메리쉬를 공격했냐는 듯이. 리리카가 항복하겠다는 듯이 성검을 놓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성검은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당신이 피할 수, 있는 것도, 이 정도로…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으니…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메리쉬가 손을 거두지 않았음에도 리리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말이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러나 리리카의 눈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베를리아 양은 당신을 사랑하니까….”

리리카가 손을 뻗어 메리쉬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광대 같은 웃음을 거둔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매우 어두웠다.

“그러니까 이딴 식으로 방심하지 말고, 살려고 발버둥 쳐요.”

그건 일종의 경고였다.

“넌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메리쉬가 리리카의 목을 더더욱 세게 압박했다. 매번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이 구는 주제에 진실은 말해 주지 않는다. 의뭉스러운 작자였다.

일순간 리리카의 손에서 하얀 빛이 번쩍였다. 메리쉬의 몸이 튕기듯이 뒤로 밀려났다. 이 또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성력의 사용 방법이었다. 그 사이를 틈타 재빠르게 메리쉬로부터 멀어진 리리카가 그 특유의 웃음을 띠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알면서 베를리아 양한테 심술 좀 그만 부려요.”

메리쉬의 말에는 전혀 답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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