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발밑의 씨앗(8)
“어째서요?”
“그들의 신성력이 베를리아 양의 저주에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베를리아가 지긋이 리리카를 바라봤다. 그의 말은 단번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방금 나를 신성력으로 치료한 사람이 리리카 아니었나요?”
신성력은 그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는 것은 리리카 또한 베를리아에게서 멀어져야 함을 뜻했다. 그러나 그는 리들턴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렇게 그녀의 방에 들락거렸다. 리리카의 행동과 말이 매우 상반되는 셈이었다.
“베를리아 양이 알다시피 제가 신성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남들과 달라요. 그러나 보통의 신관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베를리아 양의 몸에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아요. 흑마법과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반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신관들은 유독 베를리아를 꺼렸다. 그렇지만 원작 속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은 애초에 대다수가 호의를 표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진짜 베를리아가 성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신관들이 제게 거부감을 보이더라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니까 흑마법과 신성력이 서로 반발한다는 것은 소설에도 적혀 있지 않았고 그녀도 생각조차 못했던 사실이었다.
“신성력이 내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포션 또한 그래야 할 텐데요.”
리리카의 말은 여러모로 의심 가는 바가 많았다. 베를리아에게는 기본적으로 신관들의 신성력이 통하지 않았다. 신성력이 그녀에게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포션을 사용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신관들은 안 되고 리리카나 포션은 괜찮다? 그건 이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신성력이랑 흑마법이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리리카가 어떻게 아는 거죠?”
네멘 리들턴이 사용한 힘이 괜히 흑마법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네멘이, 베를리아가 사용한 종류의 힘을 흑마법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 힘이 신성력이 아니면서 마법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또 마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정의해 온 대로라면 흑마법은 마법과 대립되는 것이었지, 신성력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정의는 곧 원작을 쓴 작가의 정의였다. 한데 리리카는 지금 원작을 거스르고 있었다.
“포션이 베를리아 양에게 효과를 보이는 이유와 제 힘이 통하는 까닭은 결국 비슷합니다. 가장 깨끗한 물에 신성력이 섞이면서 몇 번이고 희석이 되면 그 안에 담긴 신성은 어떤 성질도 띄지 않은 가장 순수한 상태가 되죠.”
그러니까 리리카의 말을 따르자면 포션이나 그는 신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성력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베를리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신관들과 당신의 차이점이 뭔데요? 리리카가 그걸 어떻게 알죠?”
베를리아가 재차 물었다. 그러나 리리카는 일부러 말을 잇지 않았듯이,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데요?”
베를리아가 리리카를 채근했다. 이 시점에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저주가 근래 들어 심해진 것은 역병으로 인해 신관들과 자주 만난 게 원인일 터였다.
역병이 터진 지는 꽤 시간이 지났고, 리리카에게는 그 사실에 대하여 베를리아에게 말해 줄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가 베를리아의 편이 되고 싶었다면 진즉에 이와 관련해 언급했어야 했으며 적대할 것이었다면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리리카의 태도는 이도 저도 아닌 셈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망설이던 리리카가 겨우 내어 놓은 말은 그것이었다. 베를리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가 찬 일이었다.
“대신 베를리아 양이 찾던 것의 행방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찾던 것.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은 그 말에도 그녀는 되묻지 않았다. 그저 리리카가 자신이 찾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한 직감이었다.
이 상황에서 베를리아가 찾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성검.
“좋아요, 그러면 다른 것을 묻죠. 왜 그렇게까지 하죠?”
리리카는 늘 광대처럼 웃고 있었으나 우습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베를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저 나이까지 에루아트의 마지막 자손을 제거하려는 자들에게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적절할 때에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 거래를 해 왔다. 리리카는 똑똑하고 계산적인 남자였다.
베를리아가 여기서 갖는, 가장 큰 의문이 있었다. 그녀는 리리카를 리들턴의 저택에 머무르게 해 주는 것 빼고는 별다른 보호 같은 것은 해 주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하기에 주변에 감시인도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감시인들의 언질에 따르면 리리카는 딱히 리들턴의 저택에도 관심 없었다. 심지어 베를리아는 언제든지 그를 내칠 수 있다는 저의를 숨기지도 않았었다.
성검의 행방은 베를리아뿐만 아니라 신전이든 황실이든 모두가 갈구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성검을 가지고 거래할 상대가 꼭 그녀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리리카는 스스로에게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을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준다. 오직 베를리아가 의심으로 그를 밀어내지 않기를 바라며.
호의적이래도 너무 호의적이었다. 목숨 값을 한 번 빚져서, 혹은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서. 베를리아가 생각하기에 둘 중 어떤 이유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결정적으로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왜 나는 당신이 나를 해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썩 곤란한 일이었다. 베를리아의 신경이 메리쉬에게 닿았다.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리리카에게 무르게 구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베를리아 양께서는 이전의 그 골목뿐 아니라 이미 몇 번이고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리리카의 말에 베를리아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리리카의 시선은 마치 먼 곳에 닿아 있는 것 같았으며 그 웃음은 어딘가 체념을 닮아 있었다. 리리카는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머리가 좋았고 기억력도 비상했다. 네멘 리들턴에 의해 몇 번이나 실험에 동원되고 개조된 몸은 그 두뇌까지도 뛰어났다.
‘내가 진짜 베를리아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저렇게 말할 정도로 여러 번 구해 줬다면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베를리아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녀는 리리카에 대한 단서 하나 얻을 수 없었다.
베를리아는 힐끔 메리쉬를 쳐다봤다. 자꾸 메리쉬가 신경 쓰였다. 자신의 행동이 진짜 베를리아와 달라서 그가 자신을 의심하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래서 그녀는 리리카의 말에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가장 진짜 베를리아다운 행동일지 알 수 없었다.
그 찰나의 시선만으로도 그녀가 자신을 바라봤음을 안 모양이었다. 메리쉬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몸을 움찔거렸다. 메리쉬는 항상 온 신경을 베를리아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런 면이 드러날 때마다 그녀는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은 그를 향한 감정이 욕심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전 괜찮습니다, 베릴.”
메리쉬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숨결과 입술이 살짝살짝 간지럽히듯 피부에 와 닿았다.
메리쉬는 언제든 그녀가 밀어낼 수 있도록 그 이상은 깊게 엉겨들지 않았다. 베를리아에게는 리리카가 필요했다. 성검이 아닐지라도 메리쉬는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자신 때문에 리리카를 내쳤더라면 결국 메리쉬가 만류했을 터였다.
그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니 질투는 났다. 그러니까 이 행동은 메리쉬가 리리카에게 보이는 일종의 과시였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메리쉬는 결정권을 베를리아의 손에 얌전히 넘겼다. 그녀가 밀어낸다면 그는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원망도 보이지 않겠지.
그녀의 시선이 메리쉬를 향했다. 이런 남자였다. 집요하게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 앞에 기꺼이 무릎 꿇는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베를리아의 손이 메리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간지러워, 멜.”
메리쉬의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그가 베를리아에게 더욱 바짝 붙어 뺨을 비볐다. 그녀의 잇새에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베릴에게서 제 향이 나요.”
메리쉬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닥였다. 그가 그 냄새를 더 맡고 싶다는 듯이 베를리아의 목덜미에 코끝을 문질렀다. 그녀는 간지러움에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결코 메리쉬를 밀어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밤을 보낸 이후로 두 사람은 항상 같은 침실을 썼다. 함께 씻을 때도 있었고 하루 대부분을 붙어 있었다. 서로의 향이 배기에는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었다.
타인에게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진한 애정 행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당당한 얼굴로 리리카를 마주했다. 그 행동은 경고이기도 했다. 목숨을 여러 번 구해 준 상대에게 가질 만한 감정을 잘라내기 위한.
그게 현재 그녀가 메리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으므로.
“좋아요. 당신의 말을 믿도록 하죠, 리리카.”
애초에 그녀에게 성검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를리아는 원작을 알고 있었다. 원작 속에서 성검은 카를로스가 이 제국의 황제이자 교황이 되는 것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성검은 원작 속에서 황태자가 제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 수 있던 계기였다. 그러니까 절대 카를로스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해요. 성검은 어디에 있죠?”
베를리아가 리리카에게 물었다. 완벽한 복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