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발밑의 씨앗(7)
베를리아의 태도는 마치 언제라도 리암을 버릴 수 있을 듯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버리고 말고 할 관계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리암은 철렁한 표정이었다. 베를리아가 정말로 모든 돈을 회수해 버린다면 로베르 후작가의 몰락은 예고된 것이었으니까.
“…진짜로 내게 당장 모든 것을 갚으라고 할 것은 아니지, 베릴?”
베를리아의 입에서 픽 실소가 흘러나왔다. 필요할 때마다 베를리아의 감정에 호소하는 저 자식의 습관은 확실히 원작의 베를리아가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었다.
“네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럴 거야.”
이 자리에 대한 지루함이 베를리아의 얼굴에서 물씬 풍겼다. 그녀에게 리암 로베르의 존재는 지극히 가벼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제 말을 잘 들으면 잘 들을수록 그랬다. 어차피 지금 리암이 한 행동만으로도 카를로스의 불신을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했다. 언제든 터뜨리기만 하면 된다. 베를리아의 손에는 그에 대한 카드가 이미 너무 가득 쥐어져 있었다.
“네가 있으면… 그래, 카를로스한테 접근하기 쉽겠지. 일을 좀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없으면? 그냥 있는 것보다는 시간이 들겠지.”
베를리아는 일부러 정확한 사실만을 전달했다. 더 이상 이곳에 길게 있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점점 리암과의 대화가 귀찮아졌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리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베를리아의 태도가 너무 명확한 탓이었다. 그에게 매우 무관심하고, 그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 행동과 표정.
리암은 울컥한 듯했다. 그런데도 화를 내지 못한 것은 베를리아의 행동을 통해 그도 인지한 까닭이었다.
지금 화를 내면 베를리아는 잘 됐다 싶어 그대로 나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귀찮은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처리해 버리겠지.
“…알았어. 성검에 대한 것만 알아 오면 되는 거지.”
“일단은.”
일단. 참 불확실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암 로베르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참 얄팍한 관계지.’
카를로스 에덴버 황태자와 데니안 론델 황실 기사단장. 그리고 리암 로베르까지. 서로 간에는 공고한 줄 알았을 그들의 관계를 베를리아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카를로스에게는 리암의 빚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리암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착복이라고는 모르는 우직한 황실 기사단장인 데니안이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오히려 카를로스에게 베를리아와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는 순간 리암은 의심받을지도 몰랐다. 로베르 후작가가 약점으로 잡혔다. 그리고 리암은 절대 로베르 후작가를 버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원작 속에서 베를리아가 사라졌을 때는 별 탈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과 함께 모두 묻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와 로베르 후작 사이에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까.
바로 카를로스와 리암 사이의 연결 고리가 베를리아였다는 점.
“너무 늦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한테 보여 줄 인내심 따위 더는 없으니까.”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괜히 망설이면서 둘 사이에서 재지 말라는 경고였다. 리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게 퍽 싱겁다고 생각했다.
리암 로베르가 무슨 말을 해도 멍청하게 느껴졌고 입을 열지 않으면 그조차도 한심하게 여겨졌다. 아마도 그건 베를리아가 그를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녀의 눈에 비치는 리암의 모습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
‘……벗어날 수 없어.’
집착 어린 눈동자. 온몸을 옥죄는 알 수 없는 새하얀 힘. 목소리가 귓가에 끈적끈적하게 얽혀들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꼼짝할 수 없었다. 끔찍한 무기력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환하게 빛나는 검이 그대로 내리꽂힌다. 피가 솟구친다. 숨이 끊어져 간다. 목구멍을 긁으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베를리아가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다급하게 쥐었다. 숨이 막혔다. 식은땀이 흘렀다. 고통스러웠다.
“베릴!”
“허윽…!”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목부터 붉은 낙인이 타고 올라와 얼굴 위로 드리웠다. 베를리아의 손이 고통을 참지 못해 침대보를 강하게 쥐었다. 힘이 꽉 들어간 손이 새하얗게 핏기를 잃어갔다.
“리리카를 불러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참담함을 빠르게 인정한 메리쉬가 목소리를 높여 리리카를 불렀다. 베를리아의 방문 밖에 누구라도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곧 복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으윽, 흐….”
붉은 낙인이 빛을 발할수록 고통은 더해졌다. 지독했다. 아픔으로 인해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려 창백한 뺨을 적셨다. 그동안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발버둥 쳐 스스로를 해치지 못하도록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억겁 같았다.
“베릴!”
쾅! 문이 거센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짧은 거리임에도 뛰어서 방 안으로 들어 온 리리카가 메리쉬를 밀쳐내고 베를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리리카의 안색도 마치 베를리아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베를리아의 이마를 짚은 리리카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부드럽게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헉!”
반쯤 정신을 놓은 베를리아가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호흡이 더욱 불안정해졌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메리쉬가 사납게 리리카의 손을 낚아챘다.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힘을 빼내고 있었다.
“이거 놔!”
그러나 리리카는 매서운 얼굴로 메리쉬의 손을 떨쳐냈다. 메리쉬의 살기가 리리카에게로 날아들었다. 메리쉬가 순식간에 칼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베를리아의 숨이 갑자기 고르게 변했다.
“…이제 이것 좀 치워 주면 안 될까요?”
베를리아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한 리리카가 평소처럼 웃으며 물었다. 목에 다가온 검날로 인해 살갗에 붉은 실선이 얇게 생겨났다. 그제야 리리카는 따끔거림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길이 잘 든 칼이 리리카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낼 터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메리쉬가 검을 치우지 않은 채로 물었다. 고통으로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베를리아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상태는 조금 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그렇지만 메리쉬는 리리카를 향한 의심을 쉬이 거두지 못했다. 리리카가 베를리아에게 한 행동은 지금까지 어떤 신관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기존의 방식대로 베를리아 양을 치료하면 통하지 않으니, 방식을 바꾼 것뿐입니다. 나중에 베를리아 양이 깨어나면 물어 보세요. 베를리아 양도 알고 있던 일이니.”
제 목에 검이 드리워져 있음에도 리리카는 침착했다. 메리쉬의 눈매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스러운 점으로만 점철된 남자. 리리카는 그랬다. 메리쉬는 뒤늦게 리리카가 방으로 들어오며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베릴!’
베를리아가 리리카에게 자신의 애칭을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리리카는 자연스러웠다. 몇 번이고 그렇게 불러 본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나왔다고 하는 게 더 말이 될 만큼.
메리쉬의 안에서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다. 리리카는 마치 자신이 모르는 베를리아라도 아는 것처럼 굴었다.
‘저런 자가 베릴에게 사심이 없다고?’
그럴 리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베를리아만 눈에 담고 있던 자가? 메리쉬의 녹빛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난폭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넘실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리리카를 베를리아로부터 멀리 떨어트리고 싶었다.
“…멜.”
그때 베를리아가 작은 소리로 메리쉬를 불렀다. 메리쉬는 언제 살기가 등등했냐는 듯이 빠르게 검을 회수하고 그녀의 쪽으로 다가갔다. 거리낌 없이 무릎을 굽혀 바닥에 대며 누워 있는 베를리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베릴, 괜찮아요?”
방금까지도 누군가를 죽일 것처럼 굴던 남자. 그런 남자가 상체를 굽히다 못해 기꺼이 무릎까지 꿇는 상대. 메리쉬와 베를리아의 사이에는 오로지 그들뿐인 것만 같았다.
리리카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만의 사이에서 그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애초에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입 안이 썼다. 리리카의 눈에 담긴 베를리아와 메리쉬의 모습은 아주 견고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을 바라보던 리리카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멜, 나는 괜찮아.”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가 보란 듯 설핏 웃었다. 온몸을 옥죄던 고통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리리카에게 닿았다. 아마도 저 남자 덕분이리라.
“요즘 따라 저주가 심해지는 것 같아요.”
메리쉬가 굳은 얼굴로 걱정스레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베를리아의 뺨을 감쌌다. 메리쉬는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을 리리카로부터 차단했다. 그녀는 그 욕심을 모른 척 받아 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던 색이 다른 한 쌍의 눈동자. 평소와 달리 그 얼굴 위로 조금은 느릿하게 퍼지던 광대 같은 특유의 웃음. 그리고 그사이에 생긴 간극.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었으니까.
“그자를 갈가리 찢어 버리는 건데.”
메리쉬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베를리아가 네멘 리들턴을 칠 때 도운 사람이 메리쉬였다. 그녀가 저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니 그 최후가 퍽 고왔던 것 같아 속이 끓었다.
“…진짜 괜찮아.”
베를리아가 그런 메리쉬를 달랬다. 그러나 메리쉬는 단 하나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있는 저주는 원작을 읽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최근에 저주가 왜 심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베를리아 양, 할 말이 있어요.”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리리카가 한 발짝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메리쉬는 리리카를 경계하면서도 이번에는 베를리아와 마주할 수 있도록 틈을 내주었다. 매우 탐탁지 않았으나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뭔데요?”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손을 잡으며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찰나를 내어 주는 것조차 지독히도 질투하는 남자를 달래기 위함이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길이 잘 든 맹수는 그것만으로도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리카는 여전히 광대같이 매끄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신관들을 최대한 피하는 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