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발밑의 씨앗(6)
리암은 안절부절못하며 리들턴 저택의 응접실을 서성였다. 자신이 이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함이 밀려왔다. 물론 황실 마법부 수장인 그를 미행할 만한 실력자들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데니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리암이 불안해지기에는 충분했다.
“왜 뭐 마려운 똥개마냥 거기 그러고 있어?”
베를리아가 응접실로 들어서며 꼴불견이라는 듯 리암을 흘겼다. 리암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늘 베를리아를 뒤따르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리암이 그녀에게로 훌쩍 다가갔다.
“악!”
“누구 멋대로 얼굴을 들이밀어?”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종아리를 부여잡아야 했다. 베를리아가 앞코가 뾰족한 힐을 신은 채로 망설임 없이 그의 다리를 걷어찬 까닭이었다. 이곳은 리들턴의 저택이었으니 리암은 마법으로 어찌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를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당연하게 가장 상석을 차지했다. 아파 난리를 피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민망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리암이 멋쩍은 얼굴로 아픔을 참으며 옆 소파에 앉았다.
“베릴, 너 대체….”
“덜 맞았지, 네가.”
익숙한 호칭이 리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베를리아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노려봤다.
‘저건 진짜….’
베를리아는 리암을 두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한때는 그를 적당히 꼬셔서 제 편으로 넘어오게 할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원작 속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때는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지고 놀다 버릴 생각이었다. 그들이 진짜 베를리아가 보였던 마음에 대하여 그렇게 행동한 것처럼 똑같이.
‘그럴 마음이 단 하나라도 생겨야 하지.’
베를리아가 혀를 찼다. 물론 지금이야 메리쉬가 괜한 질투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으니 오래 전에 접은 계획이었다. 그러나 굳이 메리쉬가 아니었더라도 리암은 그렇게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저런 게 왜 서브 남주였을까?’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데니안 론델이라면 몰라도 리암 로베르는 영 아니었다.
“…그, 러니까 너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무슨 고집인지 리암은 기어코 그녀를 리들턴 백작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베를리아는 그와 오래 마주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 문제는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고 있어? 카를이 데니를 제외하고 나만을 부를 거라든가….”
“걔가 가진 의심으로 탑을 쌓았으면 예전에 하늘에 닿았을 텐데, 아직도 넌 걔를 몰라?”
당연한 말이지만 베를리아는 리암의 말에 자세히 답해 줄 생각이 없었다.
“자길 두고 내 편을 드는데 잘도 황태자가 데니안 론델을 믿겠다.”
그녀의 말은 일국의 황태자를 지나치게 가벼운 상대로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암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제 것, 제 편에 집착이 상당히 강했다. 어쩌면 어린 날, 그를 제외한 모두가 적이었던 당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지도 몰랐다.
무려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간이 감정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어쩌면 꽤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에덴버도 결국 허점 있는 인간에 불과했다. 소설 속에서 황태자가 일하는 장면보다 연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그랬다.
‘남자 주인공이라는 것들은 왜 죄다 그 모양인지.’
그녀가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남자 주인공은 대개 권력을 가진 악녀에게 노골적으로 악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만약 그녀들이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본인들이 가진 권력으로 보복하지 않고 넘어갔을까?
카를로스도 그랬다. 그가 정말로 현명했다면 베를리아 리들턴을 치기 전까지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티내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온갖 냉철한 척은 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는 겨우 사랑 하나를 믿고 행동했다. 그 얼마나 감정적이기 그지없단 말인가.
먹이를 놓치지 않고 통째로 삼키고 싶다면 먹잇감을 조심히 몰아야 하는 법이었다. 뒤늦게 눈치챘을 때는 도망갈 구석을 찾아봤자 출구 따위 어디에도 없도록, 그렇게 뱀처럼.
‘게다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일이라면 더욱이 감정적이지.’
물론 카를로스 에덴버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황태자의 자리까지 올라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황태자의 행동을 유추할 수 있었던 까닭이 있었다. 하필 현재 카를로스에게 앞장서 반목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딱히 그녀가 만든 변화는 아니었다. 기억에 의하면 베를리아 리들턴과 관련된 일에서 카를로스는 상당히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성검을 찾고 안젤라와 결혼하기 전에 베를리아를 치려고 한 것부터가 그것을 증명했다.
원작 속에서도 베를리아를 죽이려던 카를로스의 계획은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 그의 권력은 대부분 리들턴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까. 도리어 베를리아가 자신을 죽이려던 그의 행동에 대한 배신감으로 보복하려 했다면? 그랬다면 오히려 당하는 것은 황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계획은 전적으로 그를 너무 사랑하는 베를리아의 마음에 달려 있었던 셈이었다.
베를리아에 대한 황태자의 믿음은 과했다. 제 입장에서는 그게 배신당했으니 데니안이라고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리암도 곧 그렇게 될 터였다.
“…그렇지만 카를이 성검을 찾으리라는 것까지 알던 건 이상하잖아!”
‘황태자가 성검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릴 경우 그에 관한 정보들을 빼내올 것.’
베를리아는 리암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건에 한하여 그녀는 그에게 얼마든지 협조하겠노라 약속하기도 했다. 베를리아가 그날 리암에게 건넨 서류에는 그녀가 협조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 대비는 카를로스가 내릴 명령을 예상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리암은 베를리아의 그 제안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성검은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아무리 카를로스나 베를리아라도 빼 올 수 없는 곳에. 그것을 알고 있는 황태자가 왜 리암에게 성검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그건 명령을 내린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리암은 어느 정도 안도하고 있었다.
‘신전이 성검을 분실했다.’
카를로스가 리암에게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신전에 성검이 없다면 당연히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부터 성검은 누가 먼저 찾아내느냐가 그 주인을 판가름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베를리아가 돈을 댔다지만 카를로스라고 해서 신전에 제 끄나풀 하나 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베를리아가 리암의 의심을 막을 방법이었다.
“황태자조차 성검이 분실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카를로스가 신전에 기부한 것들이 다 누구한테서 나왔는데.”
베를리아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녀는 원작을 읽었기 때문에 카를로스가 성검을 찾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검이 분실된 것은 상당히 오래전 일이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신전의 지하에는 그 어떠한 침입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성검이 에고 소드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어.’
원작에서 훗날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성검은 자아를 갖추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전해지는 에고 소드였다. 그것도 제멋대로 이동까지 할 수 있는. 원작에 따르면 성검은 제 주인의 탄생을 느끼고 스스로 신전의 지하를 벗어났다.
“그리고 카를로스 에덴버가 할 만한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 나 아냐?”
“…그렇네.”
마치 베를리아가 미래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예고한 내용과 카를로스의 행동이 일치했다. 그로 인해 의심했었던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사람이었다. 그건 카를로스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카를로스가 조사해 보라고 한 곳이 어디야?”
원작에서 카를로스가 성검을 찾기 위하여 돌아다닌 곳은 무척 많았다. 그것까지는 그녀가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 어지간히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책 몇 권을 통째로 달달 외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었다.
원작에서 성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베를리아가 죽었기 때문인지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도 성검에 대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그나마 그 장소에 대해 서술되었던 특징을 대조해서 일일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므시아를 움직이려고?”
리암이 멈칫하며 물었다. 베를리아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카를로스가 눈치를 채게 될까 걱정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의 도움 아래 므시아와 얽히게 된 이후로 리암은 쭉 카를로스를 지지해 왔다. 결국 카를로스가 황태자위에 오르는데 성공함으로써 로베르 후작가는 권세가에 속하게 되었다. 즉 귀족들에게 있어서 리암은 뼛속까지 황태자파였다.
그런 상황에서 황태자가 리암을 내친다면 과연 어디서 그를 받아줄까. 리암은 겨우 가진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끝까지 카를로스의 곁에 남아 황제의 최측근이 되길 바랐다. 황태자로서도 단번에 자신을 내칠 수 없다는 건 리암도 알았다. 그러나 내쳐지지 않는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니까, 내가 요구한 것들이나 잘 해.”
베를리아가 코웃음 쳤다. 리암이 욱하여 대답했다.
“나한테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내가 지금 너 때문에 뭘 감수하고 있는데…!”
“네가 나 때문에 무언가를 감수한다고?”
그녀는 기가 막혔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베를리아가 신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리암 로베르가 므시아에 진 빚이 없었다면 과연 베를리아의 뜻대로 움직였을까? 묻지 않아도 알 대답이었다.
“좋아, 그러면 감수할 필요 없이 네가 빌린 걸 지금 당장 갚아.”
베를리아가 다리를 꼬며 오만한 눈으로 리암을 쳐다봤다. 리암이 움찔 떨었다.
“내가 아니면 카를에게서 네가 원하는 정보를 빼 올 수 없을 텐데?”
나름대로 용기를 내 보았지만, 리암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이 바닥에서 므시아의 신용을 잃는다는 건 그에게 돈을 빌려 줄 자들이 더는 없다는 의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상황에서도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것이 므시아이기 때문에, 그런 므시아조차 외면한 리암을 믿을 리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네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강제로 빼내면 어쩔 건데? 내가 너 따위가 없다 해서 원하는 걸 못할 것 같아? 네 주제를 알아, 리암 로베르.”
리암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베를리아는 일부러 그를 쉴 새 없이 몰아 붙였다. 그녀는 리암을 밑바닥까지 떠밀고 있었다.
“내가 시킨 것들을 못하겠어? 말만 해.”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리암 로베르가 밑바닥에서 어떻게 허우적거릴지.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