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51)화 (51/148)

51화. 발밑의 씨앗(5)


 

“…모두 빠짐없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리들턴 백작님.”

신관의 태도가 정중했다. 적어도 웃고 있는 베를리아가 실은 화가 났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 물론, 그녀가 아니라 신관에게.

베를리아가 신관들을 둘러봤다. 확실히 안젤라가 직접 나선 것 답게 파견된 신관의 수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면서 겨우 그 인원만 치료소에 남아 있었단 말이지.’

그녀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저것들을 다 잡아 족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신성제국 에덴버의 수도에 있는 신관들만큼 치유에 능통한 자들을 구하기란 사실상 어려웠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신관들은 앞으로 나오도록.”

베를리아의 말에 신관들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녀가 처벌을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포는 영원하지 않다. 베를리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라를 공포로 다스리던 폭군들이 결국에는 혁명에 굴복하게 되어 있듯이, 인간의 안에서 강제로 죽여 놓았던 불씨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주면 그것이 화마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만약 지금 여기서 그녀가 저들을 두려움으로 다스린다면 베를리아는 몇 번이고 이 짓을 반복해야 할 터였다.

“에밀리 신관, 그대가 지금까지 가장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더군?”

그녀의 호명에 앞으로 나온 에밀리는 벌벌 떨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그것을 모른 척하고 웃으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신관에게 건네주었다.

사람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은 단연 공포였다. 그러나 인간이 죽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건 욕망이었다. 그녀는 그 두 가지 모두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열어 봐.”

베를리아의 말에 눈치를 보던 에밀리가 조심조심 주머니를 풀었다.

“헉!”

다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이곳을 울렸다. 주머니에서 금화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끈을 풀자 주머니에 걸려 있던 마법이 해제되어, 얇은 천이 많은 양의 금화를 감당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건 베를리아가 의도한 일이었다. 그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줄 보상을 새겨 넣었다.

“레스턴.”

베를리아가 다른 이름을 호명하자 이번에는 그 신관이 빠른 걸음으로 튀어나왔다. 벌을 주려던 것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을 받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대는 두 번째로 환자들을 많이 치료했고.”

주머니를 푸는 레스턴의 손길이 조금 다급했다. 그러나 주머니의 끈이 풀려도 이번에는 금화가 넘쳐흐르지 않았다. 주머니 가득 금화가 차 있었음에도 신관은 그에 대하여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따로 받았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미 눈앞에서 그보다 더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베를리아는 차례차례 신관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손에 쥐어지는 금화는 불리는 순서가 늦을수록 적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많은 보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네이먼.”

드디어 마지막 차례였다. 네이먼의 앞에 불린 신관은 겨우 금화 하나를 손에 쥐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네이먼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베를리아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너는 거기 있어도 돼.”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신관을 저지했다. 그녀가 웃고 있는 동안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이 네이먼의 양팔을 붙잡았다.

“네게는 벌을 줄 거니까.”

베를리아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그대로 검은 가면을 쓴 이들과 신관의 모습이 사라졌다. 웅성거림이 퍼졌다.

“잠깐, 이게 무슨…!”

“아무리 당신이라고는 하나 신전 소속의 신관을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습니다!”

곧바로 반발이 터져 나왔다. 돈을 줄 때는 좋다고 받아가더니 금세 존중일랑 없어진 호칭도 들려왔다.

“이런…. 내게서 상을 받아간 그대들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달랑 하나 있는 의자에 홀로 앉은 베를리아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내게 그대들을 처벌할 권한이 없다면, 상을 줄 권한도 없겠지. 그렇다면 그대들은 사사로이 뇌물을 받은 게 아닌가?”

베를리아에게 힘으로 협박당할 줄 알았던 이들은 의표를 찔리자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정말 협박을 당했다면 감히 신전을 상대로 겁박했다며 정식으로 항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베를리아의 말대로라면 신관들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신전이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교리는 신의 앞에서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부금은 받아도 신관이 개인적인 사례를 받은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게 돈이든 값비싼 보석이든 뛰어난 예술품이든, 무엇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관들이 그런 것을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고위 신관들과 귀족들 사이에 그런 거래는 늘 몰래 몰래 끝없이 이어져 왔으니까.

그래, 중요한 것은 ‘몰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모두가 볼 수 있는 광장에서 이것을 나누어 주었다. 베를리아가 베푼 금화들이 그녀가 책임자로서 나눠 주는 보상이 아니라 뇌물로 간주된다면 신관들은 파면을 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뿐이라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베를리아는 마녀 재판을 앞두고서도 살아 남았다. 그녀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뇌물 수수 혐의가 도마에 오를 경우 모든 책임은 신관들에게로 돌아올 터였다. 책임이 무거워져 파면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뒤늦게 그녀가 주는 것을 받지 말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베를리아에 대한 공포와 그녀가 한 의외의 행동에 넋이 팔린 대가였다.

“가장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자에게 가장 많은 보상을 줄 거야.”

더 이상 반박하는 자는 없었다. 베를리아는 그 속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앉은 의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홀로 앉아 있는 베를리아는 누가 봐도 그곳에 군림하고 있었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존재. 그렇게 느낀 건 그녀를 앞에 둔 자들의 본능이었다.

“그리고 가장 적은 환자를 치료한 자, 오직 그 자만을 가장 지독하게 처벌할 것이다.”

베를리아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녀의 냉엄한 시선이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내가 보상을 주는 것에 관하여 장난을 치는 자들 또한 네이먼과 같은 곳으로 보내 주지.”

고위직에 있는 이가 낮은 직위를 가진 이를 착취하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일이었다. 베를리아는 그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그 보상을 갈취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속일 생각 따위 하지 말라는.

“내가 이미 이곳에서 너희들이 한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누가 얼마나, 어떤 사람을 치료했는지는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를 알아낸 건 순전히 베를리아의 능력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이 어디에나 있을 것임을 신관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의 눈에 떠오른 탐욕을 확인한 베를리아가 다시 요요한 미소를 머금었다.

“보상은 일주일마다 이루어질 것이다. 대신, 이전에 가장 많이 환자를 치료한 자보다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한다면… 전에 주었던 보상의 배를 주도록 하지.”

베를리아는 신관들의 앞에 두 가지 선택지를 던져 넣었다. 공포와 욕망. 그 사이에서 인간이 무엇을 잡을지는 너무 뚜렷한 바가 아니던가.

“오늘이야 그 보상이 금화였다지만, 따로 원하는 게 있다면 내게 직접 요구해도 좋아.”

이 나라에서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찾는 게 더 빠를 터였다. 그 말은 어쩌면 보상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침을 삼켰다. 신관들 중에는 베를리아가 대신관을 직접 찾아갔던 일을 아는 자들도 있었다. 그녀가 구태여 요란하게 신전을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그 후 베를리아는 보란 듯이 막대한 금액을 신전에 기부했다. 그만큼 황태자로부터 기부되던 금액은 전과 달리 턱없이 줄어들었다.

국정을 엉망으로 운영했는데 황실의 재정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그 정도의 기부금이 카를로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부금의 규모에 워낙 차이가 컸다. 눈치 좋은 자들은 이전까지 황태자로부터 왔었던 기부금의 출처를 쉽게 짐작해 낸 후였다.

베를리아가 만났던 대신관은 말단에서부터 전례 없이 빠르게 대신관이 된 사람이었다. 그게 대신관이 끌어 오던 엄청난 기부금 덕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신관은 없었다. 높은 직위를 가진 신관을 카를로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베를리아의 방식이었다.

신관들은 생각했다. 그 대상이 자신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등 뒤를 쫓는 공포는 서늘했으나 눈앞에 놓인 욕망은 지나치게 달았다. 공포가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 신관들의 눈에 전에 없던 욕망이 가득 차올랐다.

***

베를리아가 그에게 협박을 해 올 때까지만 해도 리암은 조금 가벼운 마음이었다. 당시 베를리아가 내민 서류에 적힌 내용들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 당장은 없을 일이거나.

“무슨 일이야, 카를?”

그래서 리암은 황태자가 자신을 은밀히 찾을 때만 해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데 그 자리에 데니안이 없었다. 리암은 아직 데니안이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데니안이 이 자리에 없는데도 카를로스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앉아.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

“뭐…? 데니안은?”

황실 기사단장인 데니안과 황실 마법부 수장인 리암은 황태자의 양팔과 같았다. 지금까지 카를로스는 단 한 번도 리암을 부르면서 데니안만 빼놓은 적이 없었다.

“이번 명령은 너 혼자 수행해야 해, 리암.”

리암은 카를로스의 말이 담은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카를로스는 데니안을 믿지 않는다.’

“잠깐만, 카를…. 아무리 데니가 잠깐 베릴의 편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로베르 후작.”

황태자의 목소리는 데니안을 위한 리암의 변명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리암의 입이 다물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들의 친우가 아니었다. 오직 황태자 카를로스 에덴버만이 존재할 뿐.

쭈뼛쭈뼛 솜털이 섰다. 리암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베를리아는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베를리아가 준 서류에는 카를로스가 조만간 리암을 홀로 찾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것을 황태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그 서류에 적힌 대로라면 리암은 황태자가 다음에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물건을 하나 찾아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