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발밑의 씨앗(4)
꿈을 꿨다.
“…릴! 베릴!”
“…멜?”
베를리아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그녀가 자신을 흔들고 있는 눈앞의 상대에게 초점을 맞췄다. 메리쉬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베를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울어요.”
잔뜩 안타까운 얼굴을 한 메리쉬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훔쳤다. 그의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베를리아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메리쉬의 손을 따라 제 뺨을 만지자 똑같은 물기가 묻어나왔다.
‘나, 울었구나.’
그녀가 느릿하게 깨달았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눈물이 난 걸까.
‘그런데 왜 울었지? 맞아, 꿈을 꿨어.’
베를리아는 자신의 꿈속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꿈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봤던 게 떠올랐다.
누군가의 심장에 칼이 박혀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상대는 죽어갔다. 베를리아는 절규했다.
그러나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그 누군가를 잃었다.
‘…그게 누구지?’
그렇지만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굉장히 슬펐던 것만이 눈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 안 나.”
베를리아가 느릿하게 답했다. 그녀가 메리쉬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베를리아를 달래려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메리쉬만의 체취가 그녀의 코끝에 맴돌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베를리아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꿈 따위 뭐가 중요해.’
그녀는 곧 쉽게 꿈을 떨쳐내 버렸다. 이곳에는 자신을 안아 주는 온기가 있었다. 그러니 무슨 내용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꿈 같은 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여겼음에도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베를리아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베릴.”
그새 미미하게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메리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그래도 가야지.”
베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레밀튼 지역은 전염병에 관해서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병세를 가진 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다른 이들의 손에 맡겨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제가 다녀올….”
“멜.”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메리쉬를 불렀다. 그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더는 말하지 말란 뜻임을 알았다.
‘너랑 안젤라랑 둘이 두기 싫어.’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그녀의 속내였다. 안젤라는 성녀였고 바빴다. 그래서 매일 레밀튼 지역에 올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안젤라와 메리쉬가 단둘이 남게 된다고 생각하면 싫었다.
메리쉬가 지긋하게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는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등을 고요히 눈에 담았다.
그대로 그녀를 여기에 주저앉히고 싶은 마음이 일순 들었다.
똑똑.
“베를리아 님, 일어나셨나요?”
재스민의 목소리가 메리쉬의 상념을 깨웠다. 그가 괜스레 주먹의 힘을 풀었다가 꽉 쥐었다. 메리쉬도 알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겨우 그에 의하여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베를리아는 절대 선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네멘 리들턴을 죽이고 므시아의 주인이 될 수도, 세력이라고는 없던 4황자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릴 수도 없었으리라. 메리쉬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삐뚤어진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조차 그녀의 사랑이라는 자비가 있기 때문임을. 메리쉬가 몸을 돌려 방문으로 향했다.
“베릴은 씻고 있어. 머리가 아프신 것 같으니 그자를 부르는 게 좋겠다.”
베를리아는 누군가에게 절대 잡아먹히지 않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그녀의 선택일 뿐.
***
“리리카?”
메리쉬가 그 사이에 하녀들을 대기시켜둔 모양이었다. 씻고 나오니 이미 하녀들이 모두 다 준비해 둔 뒤였다. 그 후 방으로 왔더니 리리카가 있었다.
“베를리아 양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해서요.”
메리쉬가 말해 뒀나 보다. 아무래도 베를리아가 저번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리리카에 의해 머리가 맑아졌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메리쉬에게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녀가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라는, 가장 커다란 비밀과 무게를 맞춰 주고 싶은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냥 꿈을 꾼 것뿐이에요.”
베를리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꿈속의 자신은 절규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로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니 그것은 단순히 꿈이리라.
그런데 왜 이토록 속이 울렁거리는지.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말에 움찔거렸다. 그녀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리리카는 여전히 그녀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군다. 도대체 저 남자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찌릿, 머릿속이 바늘로 찌른 것처럼 아파 왔다.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요, 그저 꿈이에요.”
순간 리리카의 손이 그녀의 뺨에 가볍게 와 닿았다. 그의 손에서 하얀빛이 빛났다. 베를리아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리리카가 웃으며 베를리아에게서 떨어졌다.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깔끔한 동작이었는데도 그녀의 뺨에서 멀어지는 손끝에 어딘가 미련이 가득해 보였다.
이미 그들 사이의 거리는 충분했는데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베를리아와 리리카 사이의 거리가 족히 세 걸음은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또 다시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똑똑.
“들어와.”
“베릴, 출발 준비가 다 됐어요.”
그 분위기는 메리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쉽게 깨졌다. 베를리아가 리리카를 지나쳐 메리쉬에게로 갔다. 리리카는 결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메리쉬와 리리카의 시선이 마주쳤다. 메리쉬의 시선은 적대적이었으며 리리카는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리리카의 입술 모양을 읽으니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메리쉬가 경계의 기색을 풀지 않은 채 베를리아의 어깨 위로 외투를 둘러 주었다. 메리쉬가 그녀의 뒤에 서자 베를리아의 모습이 온전히 가려졌다. 곧 문이 닫혔다.
“…뒷모습쯤은 보게 놔두시지.”
리리카가 닫힌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웃음은 마치 가면을 벗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혹은 애초에 그곳에 웃음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짧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가 살아서 웃고 있었으므로.
***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베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치료소를 바라봤다. 치료소에 있는 신관들이 몇 없었다. 그나마 있는 신관조차도 제대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늦게 왔다고 이 모양이라니.’
레밀튼은 므시아의 일원들이 터를 잡은 지역이었다. 므시아가 이 나라에서 대단한 힘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이를 이루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이었다. 암흑가에서 힘을 가진 평민. 귀족이나 신관들은 대개 그런 므시아의 일원들을 무시하고 멸시했다.
이게 베를리아가 쉬지 않고 꾸역꾸역 거의 매일같이 이곳에 오는 이유였다. 그녀는 자신이 자리를 비울 경우 이곳이 어떻게 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저들을 힘으로 겁박하여 말을 듣게 만들기는 쉬웠다. 마녀재판조차 취소시켰던 베를리아였다. 신관들을 겁박하는 일이 어렵겠는가.
하려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수도에 있는 므시아의 대다수 인력은 레밀튼 지역에 투입되어 있었다. 외부에서 불러들일 수도 있었지만 다른 지역의 일원들도 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니 가장 효과 좋은 방법을 선택하는 수밖에.
“오늘은 환자가 없는 모양이지?”
베를리아 리들턴의 악명. 그 앞에서는 신관들도 허리를 숙이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지 베를리아는 고위 귀족들과 황족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상대였으니까.
그 방법은 그녀가 전염병이 도는 현장에 있기만 한다면 매우 잘 먹혔다. 베를리아가 치료소 안으로 들어서자 화들짝 놀란 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직 치료되지 않은 환자들이 치료소밖에 줄을 서 있는 것이 분명히 이곳에서도 보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굴던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베를리아가 삐뚜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치료소 앞에 줄 선 자들은 이제 아이와 노인뿐이었다. 치료가 진행될수록 건강한 자들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러나 원체 면역력이 약한 이들은 여전히 위험했다. 그게 베를리아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저들의 선함은 늘 저들이 정한 정의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닿지.’
원작에서도 그랬다. 베를리아의 사후 레밀튼 지역에 본래 살던 이들은 모두 쫓겨났다. 모두가 악당들이 사라졌다며 좋아했다. 터전을 잃은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훌륭한 성군이라는 황태자와 자애롭다는 성녀조차. 그들에게는 당연했을지도 모르지만 베를리아에게는 아니었다.
‘진짜 베를리아가 제 수하들의 미래를 대비해 놓아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므시아의 일원들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돈으로 신전을 압박해 놓기는 했지만 성녀가 카를로스의 연인인 이상 신전은 여전히 황태자의 편이었다. 황태자를 가장 빠르게 쳐내기 위해서는 그를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인 신전을 처리해야만 했다.
에덴버에서 신전이란 존재를 아예 제외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될 수 있으면 신전을 회유할 생각이었다. 베를리아가 굳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제 존재로 신관들에게 압력을 가하기만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분명 그냥 자신이 이곳을 관리 감독함으로써 적당히 저들을 봐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건 베를리아의 방식이 아니었다.
“거기 너.”
“네, 네?!”
텅 빈 치료소 내부와 치료소 밖으로 이어진 환자들의 긴 줄. 그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던 신관이 베를리아의 부름에 바짝 긴장하여 대답했다.
“치료를 맡은 신관들을 전부 다 불러와.”
베를리아가 신관에게 보란 듯이 그들의 명단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치료를 위하여 이곳에 배치된 신전들의 모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물론 너무 바쁘다면 빠져도 좋아.”
베를리아가 요요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일견 달큼해 보였다. 그러나 신관은 어쩐지 그게 뱀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이름을 톡톡히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아, 역시 그녀는 타협보다 협박이 체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