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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49)화 (49/148)

49화. 발밑의 씨앗(3)


 

‘돈을 빌려 줘.’

처음 리암이 므시아를 찾아왔을 때였다. 어린 도련님이 겁도 없다, 베를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리암 로베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전쟁이 없는 시대에 기사단의 위엄으로 명망을 유지해 왔던 가문의 어린 후계자. 그마저도 선선대부터는 기사로서 재능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것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로베르 후작가는 착실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 가문을 살려 보겠다고 후작 부부가 익숙지도 않은 상행에 나섰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차 사고를 당하여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어린 후계자와 그럴듯한 작위, 그렇지만 힘이 없는 가문. 무려 그 지위가 후작이었다. 친인척들이 없을 리 없었다. 그중에는 썩 힘 있는 가문도 있었다. 그런 자들이 당시의 로베르 후작가를 갈가리 찢어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되겠어?’

그때의 베를리아가 리암에게 말을 건 것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다. 오지랖이 넓기도 하지. 그녀는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렇게 생각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버려진 자들을 줍는 데는 참 재주가 있었다. 메리쉬부터 황태자, 데니안 론델에 리암 로베르까지. 다만 주울 것과 줍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눈이 좀 많이 없었지만.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너, 돈은 쓸 줄 알아?’

후작 부부가 나섰던 길부터가 상인들은 위험하다고 잘 이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베를리아는 부모부터 그럴진대 저 어린 도련님의 잇속이 밝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돈은 새어나가고자 한다면 끝이 없었다. 리암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든 과연 그 일가 친인척들이 끝까지 모를지도 의문이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아이가 버럭 화를 냈다. 리암으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후작가를 빼앗기지 않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리암도 알았다. 후작가를 뺏기는 순간 자신의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으리라.

그런 리암에게 베를리아가 속삭였다.

‘그냥 돈이 아니라 므시아의 신용을 거래해.’

단순히 돈을 거래하는 것과 므시아의 신용을 거래하는 것은 달랐다. 리암의 신용을 므시아가 보장한다. 그렇게 되면 리암은 굳이 므시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므시아는 암흑 단체였지만 이쪽 세계의 신용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한낱 암흑 단체에 그칠 뻔했던 므시아의 규모가 이토록 커진 것은 네멘 리들턴이 신용만큼은 확실히 지킨 까닭이었다. 음지에서는 서로 뒤통수를 치고 맞는다. 그랬으니 다들 적어도 신용이 확실한 므시아를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므시아의 이름이 내걸린 이상 리암이 망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거래의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리암이 건재해야만 했다. 단순히 돈을 빌린다면 리암이 망하더라도 후작가의 작위나 리암을 어떻게 해서든 받아낼 터였다. 그러나 므시아의 신용은 달랐다. 리암이 므시아의 신용을 걸고 일을 벌일 때 거기에 실패가 존재해서는 안 됐다.

네멘 리들턴은 똑똑한 자를 좋아했다. 멍청한 것은 쓸데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후작가의 어린 도련님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것은 네멘 리들턴의 흥미를 끌었고 리암은 거래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리암 로베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그때의 거래 대가였다.

‘지금까지는 베를리아 리들턴 덕에 갚지 않고 잊어버렸겠지만.’

그녀가 느긋하게 리암을 바라봤다. 3대째 망해 가고 있던 후작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돈과 힘이 필요할까? 그 모든 것이 저기에 적혀 있었다.

그 엄청난 대가를 지금까지 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원작의 베를리아가 그것을 리암에게 묻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당장에는 못 갚아.”

리암의 말투에 굴욕이 드러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리암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금 베를리아의 모습이 리암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면 돈과 힘으로 그를 겁박하는 악녀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받을 대가를 받는 것뿐이었다.

“알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리암이 저 채무를 당장 갚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므시아의 신용을 빌린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지금 바로 저것들을 갚는다면 리암은 현재 가진 것들뿐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제 핏줄들의 미래까지 저당 잡혀야 할 것이다.

소설 속의 악녀는 으레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남자 주인공과 약혼한다. 그러나 귀족 간의 약혼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충분히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다. 그런 거래로 이루어진 관계를 깬다면?

응당 관계를 깬 자가 얻은 것과 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란 적어도 권력이 얽힌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주인공이 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황태자나 리암 로베르, 데니안 론델이 베를리아를 휘두른 힘은 하나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애정.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힘을 그들에게 쥐여 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베를리아가 오만하게 말했다. 그것은 명백한 명령이었다.

베를리아가 미리 준비해 온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리암이 이를 악물었다. 그 행동이 마치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가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리암의 손에 직접 건네주었다.

“읽어 보고 잘해.”

베를리아는 웃고 있었다.

***

“시키신 일을 저자가 잘할 거라고 보십니까?”

메리쉬는 리들턴 저택에 돌아오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제는 궁금증도 드러내는 그가 제법 기특했다. 베를리아가 그 감정을 표하듯이 메리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니.”

“그러면 왜 굳이?”

메리쉬의 입술이 떨어지는 그녀의 입술을 쫓아왔다. 그나 베를리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간지럽히듯 핥았다. 무겁게 엉겨오는 몸과 다르게 가벼운 행동이었다. 베를리아는 그게 메리쉬 나름의 애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잇새로 작은 웃음이 흘렀다.

“이간질하려고.”

베를리아의 말이 가진 의도는 명확했다. 수법이 치졸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카를로스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황태자는 원작의 남주인공이었다. 게다가 이미 권력에 발을 담갔다. 원작이 그를 돕는다면 언젠가 베를리아의 기세 역시 뒤집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이유를 다 제치고서라도 그녀는 카를로스 에덴버가 싫었다. 지독히도 싫었다. 정말로 몽땅 망해 버렸으면 좋을 만큼. 그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을 만큼.

“…아.”

메리쉬에게 아랫입술을 깨물린 베를리아가 작은 신음을 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잠깐 놀랐을 뿐이었다.

“가끔은 베릴의 그 마음마저 질투가 납니다.”

메리쉬도 베를리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황실 기사단장이 황태자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성녀와 로베르 후작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리암 로베르를 뒤흔들면 따라올 결과는 자명했다.

카를로스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패인 안젤라를 틀어쥐려 들 것이다. 혹은 늘 절대적인 자신의 편이었던 과거의 존재를 되찾으려 하겠지.

베를리아가 얼마나 황태자에게 맹목적이었는지는 메리쉬가 가장 잘 알았다. 그는 감히 자신했다. 자신보다 그녀를 잘 알 사람은 없으리라고.

그래서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게 증오뿐이라고 해도 투기가 올라왔다. 증오는 이유 없이 오지 않는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감정이다.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기에 질투가 났다.

메리쉬의 혀가 베를리아의 혀에 엉겨들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나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몰랐다. 제 욕심의 범위에 베를리아가 들어올 줄 전혀 몰랐으니까.

“…흣.”

강하게 매여 오는 혀뿌리가 아릿했다. 베를리아에게서 신음이 흘렀다. 메리쉬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왔다. 두 사람 사이 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메리쉬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게 약간은 거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그런 그의 행동을 감내했다. 진짜 베를리아에게는 하지 못했을 메리쉬의 이런 모습들이 그녀는 기꺼웠다.

“하아…. 하….”

그렇지 않아도 도톰한 베를리아의 입술이 약간 부풀어 올라 있었다. 떨어진 좁은 틈으로 얇은 타래가 늘어졌다. 베를리아를 숨이 막히도록 몰아붙인 메리쉬가 그녀를 집요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됩니까?”

메리쉬가 물었다. 그 작태가 퍽 뻔뻔했다. 그는 이미 질투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메리쉬의 말은 지금의 행동을 허락받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럴 테니 계속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베를리아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직 너만이 내게 그렇게 해도 돼.”

그녀의 손이 나긋하게 메리쉬의 뺨에 와 닿았다. 천천히,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쪽. 새가 쪼듯이 가벼운 입맞춤이 다시 내려앉았다. 메리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가 가진 만족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랑해요, 베릴.”

메리쉬의 입술이 쪽, 쪽, 재차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왔다. 베를리아는 그의 행동에 담긴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다.

“사랑해, 멜.”

“더, 더 말해 주세요.”

겨우 한 번 들은 것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메리쉬가 노골적으로 조르는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기꺼이 입을 열었다.

“사랑해, 멜.”

사랑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실이었으므로. 메리쉬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그의 눈이 감기자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전에는 들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을 말할 때마다 생각한다. 너를 사랑한다. 네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무서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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