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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48)화 (48/148)

48화. 발밑의 씨앗(2)


 

“푸핫…! 성녀가 그 자식에게 황태자비 선발에 관해서 물었다고?”

수하의 보고를 받은 베를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내걸렸다. 그녀는 진작 황태자의 주변에 므시아의 사람을 심어 놓았다. 자신이 원작을 변화시킬수록 황태자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해들은 소식이 꽤 흥미로웠다. 베를리아조차도 안젤라가 카를로스에게 그것을 대놓고 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 나올 법도 했지.’

원작에서 서술된 성녀의 성격상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카를로스와 안젤라가 연인 사이인 이상 이는 오래전에 제기되었어야 했을 문제였다.

현재야 수도의 한 구역에 전염병이 터져 온 제국이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염병이 잡히면 곧바로 황태자비에 관한 문제가 다시 거론될 게 뻔하지. 성녀가 초조할 만도 해.’

베를리아야 므시아라는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녀와 황태자는 달랐다.

가뜩이나 정치계에서 귀족 세력이 나눠진 판이었다. 와중에 커다란 전력인 베를리아가 빠짐으로써 카를로스의 지지 기반은 더 약해졌다. 안젤라에게는 신전이 있었으나, 하나뿐인 성녀가 황태자비로서 나서게 되면 신전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즉 두 사람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다시 황태자비와 관련된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늦는다.

“그래서 황태자가 뭐라고 했는데?”

베를리아가 턱을 괴며 뒤로 기댔다. 등에 단단한 가슴이 맞닿았다. 메리쉬가 그녀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줘 베를리아를 깊이 끌어안았다.

보고를 올리던 수하는 메리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메리쉬도 베를리아가 무엇을 하든 얌전히 그녀를 품을 뿐이었다. 므시아는 원래가 이랬다. 베를리아가 원하는 것에 무조건으로 복종했다.

므시아가 이런 집단인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황태자의 개 노릇을 자처한 제 주인에게 반기를 들어도 진작 들었을 테니까.

“황태자가 당황한 탓에 쓸모 있는 대화는 오가지 않았습니다. 대략 황태자비 선발을 무산시킬 거라고는 했지만 결국 자세한 대안은 없더군요.”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네.”

베를리아가 픽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황태자께서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신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가 자신이 카를로스의 주변을 온통 헤집어 놓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황태자는 자신의 입으로 베를리아를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했다. 자신이 직접 버리려고 했던 베를리아를.

베를리아가 본 안젤라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작과 달리 황태자는 그녀에게서 권력을 빼앗지 못했다. 즉 베를리아는 아직 카를로스에게 쓸모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카를로스가 그녀를 황태자비 후보에 거론한 것이다.

‘본인보다 베를리아가 더 쓸모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저버리고 베를리아를 택했다… 성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베를리아가 기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래서 사람이 전적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이야 성녀의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믿음을 지탱하고 있다지만 과연 그게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멜, 잠깐 불쾌한 이를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베를리아가 달래듯이 메리쉬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럴 때 카를로스와 안젤라의 사이를 더 벌려 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베를리아는 그토록 오래도록 황태자를 도와 왔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다. 그런데 또다시 카를로스가 오랜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다녀와서 보상을 주시면 참아 보도록 하죠.”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에 어린 강아지처럼 뺨을 비볐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온순한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진득한 녹빛 시선이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재밌었다. 욕심 많고 질투도 많으면서 제 나름대로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려 애교를 떠는 게. 베를리아가 고개를 들어 메리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건 나한테도 보상일 것 같은데.”

메리쉬의 시선이 낮게 내리깔렸다. 만약 눈앞에 수하가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시선이었다.

“온 힘을 다해서 기꺼이 내어 드릴 겁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온순한 척을 하는 중이었으므로 얌전히 키스를 되돌려 줄 따름이었다.

***

“베릴? 네가 여긴 웬일이야?”

리암이 베를리아를 보며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빙의한 이후로 처음 찾아오는 로베르 후작가였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신경 쓰는 건 리암의 반응 따위가 아니었다. 베를리아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리암이 또 제 주제를 잊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경고는 홀라당 날려 먹은 모양이었다.

“내가 리들턴 백작이라고 부르라 했을 텐데, 리암 로베르.”

명백한 거부의 의사였다. 리암의 안색이 흐려졌다.

“…미안, 잊어먹었어.”

잠시 침묵하던 리암이 느릿하게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여전히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명백하게 멸시하는 어조였다. 리암이 울컥하여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새 베를리아를 가리고 선 메리쉬의 눈빛이 섬뜩했기 때문이었다.

리암은 메리쉬를 알고 있었다. 저자는 늘 베를리아의 그림자로 지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암이 메리쉬를 마주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 한 번만으로도 공포를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리암의 등골로 오싹하게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메리쉬가 평소에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그 존재조차 눈치채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마주한 것은 베를리아가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였다. 제 주인을 잃은 맹수의 눈에는 광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네 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어.’

베를리아가 어디에 갇혔는지 모른다고 말하자, 그는 리암에게 겨우 그 한마디를 한 뒤에 사라졌다. 그러나 리암이 두려움을 겪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베를리아가 있는 황궁의 지하실은 경비가 삼엄할 뿐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길도 기밀로 부쳐졌다. 황족과 그곳을 담당하는 기사들만이 지하실의 위치를 알았다. 메리쉬가 진작에 베를리아를 빼내지 못한 이유였다.

그녀가 그를 부름으로써 그들 사이에 걸린 계약이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메리쉬는 원작에서처럼 베를리아를 잃었을 것이다.

그런 곳이었으니 리암이라고 한들 베를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메리쉬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쉬가 리암의 앞에 나타난 까닭은 분명했다. 리암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베를리아가 죽는 순간 저자의 송곳니가 우리를 물어뜯으리라.

‘므시아를 진즉에 끝냈어야 했는데.’

리암이 이를 악물었다. 저 남자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므시아라는 거대한 세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애초에 리암이 황태자가 므시아를 와해시키려 할 때 무엇 때문에 협조했는데.

“뭐해, 안 앉아? 서서 들을 거면 계속 서 있던가.”

이곳은 분명 로베르 후작저였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리암이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그녀를 돌아보며 움찔했다.

오만한 베를리아 리들턴. 그건 리암이 알던 베를리아가 아니었다. 어쩐지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베를리아가 비소를 머금었다. 리암 로베르가 방금까지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심히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무서워해야 할 것은 그녀였다. 리암을 포함한 그들을 애정했기 때문에 제 독을 숨기고 몸을 낮추고 있던 베를리아 리들턴.

“봐.”

베를리아가 앞의 탁자에 서류 뭉치를 던져 놓았다. 므시아는 에덴버 제국을 뒤흔들 수 있는 내로라하는 암흑 단체였다. 그리고 그녀는 황태자를 비롯하여 자신을 핍박했던 이들을 짓밟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대상에는 눈앞의 리암 로베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들을 저버릴 수 없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니까.

“이게 뭐야?”

리암이 얼떨떨한 얼굴로 베를리아가 가져온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표정은 고급스러운 봉투 안에서 꺼내든 서류를 읽으며 점점 굳어졌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리암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게 깔렸다. 위협을 받은 자들 특유의 반응이었다.

그것이 우스웠다. 감히 어디서 이를 드러내는가. 베를리아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다면 너 따위가 어쩔 거지?”

베를리아가 느긋하게 쇼파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있는 곳은 엄연히 로베르 후작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암이 감히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태도였다.

베를리아의 주변으로 공기가 일렁였다. 무형의 힘이 그녀의 주변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힘은 황실 마법부의 수장인 리암조차 근원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그것을 흑마법이라 정의했다. 리암은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 맹수를 마주한 초식 동물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그제야 생각났다. 데니안의 심장을 찌르고도 그를 죽지도 못하게 하던 베를리아의 그 기이한 힘이.

서류를 든 리암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베를리아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게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제 와 내게 이걸 받아내겠다고?”

리암의 목소리가 아까와 다르게 사근사근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애초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 그들의 같잖은 애정을 갈구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찍어 눌렀어야만 했다.

“황태자는 날 죽이려 했고 너는 그것을 방관했는데 내가 이걸 받아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

리암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습지 않은 게 없었다. 베를리아와 그는 남보다 못한 관계였다. 그들 사이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리암 로베르야말로 도대체 이제 와 베를리아에게 무얼 바라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

결국 리암은 굴복했다.

그의 손에는 로베르 후작가의 채무 증명서가 들려 있었다. 채무자는 리암 로베르, 채권자는 므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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