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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47)화 (47/148)

47화. 발밑의 씨앗(1)


 

“뭐… 반쯤은 맞아.”

베를리아는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말했다. 솔직히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뭐 어쨌든 황태자의 얼굴에 붉은 낙인이 떠오른 순간 고통이 찾아든 건 사실이니까.

“….”

그러나 그 말만 듣고서 어디까지 상상했는지 데니안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물론 베를리아는 그의 생각을 정정해 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카를로스 에덴버의 불행이었고, 그것에는 당연히 인간관계에서의 고립도 포함되니까.

“베릴.”

그녀의 의도를 알기에 가만히 있던 메리쉬가 갑자기 다가왔다. 그를 돌아보기 무섭게 베를리아의 뒤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딱히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때 쓰러졌던 건 괜찮은 건가?”

“태자 전하께서 물으실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 목소리에 누구보다 빠르게 답한 것은 베를리아도 메리쉬도 아닌 데니안이었다.

“지금 내게 말한 건가?”

“리들턴 백작님께서 쓰러지신 원인에 태자 전하의 영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 그것을 지금 믿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가장 충직한 기사의 발언에 무심코 물음을 표한 카를로스의 말에도 데니안은 완고했다. 그 완고함에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황태자의 말에 데니안은 답하지 않았다.

굳건하게 황태자를 향하는 그 시선만이 돌아갔을 뿐이었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베를리아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옆을 지키고 있었고 데니안이 그 앞을 가렸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악역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보이는 대치 구도였다.

“베를리아 리들턴, 대체 내 기사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건장한 두 사람이 주변을 꽁꽁 둘러쌌기 때문에 틈 하나 없어 황태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베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리아가 제 앞을 가로막은 데니안을 밀어냈다. 솔직히 그의 보호 따위 굳이 필요 없었다. 그저 카를로스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뿐. 그러니 이 정도면 되었다.

데니안을 비켜서자 카를로스 에덴버가 시야에 들어왔다.

태양 아래에 서 있는 카를로스 에덴버. 그 얼굴에는 아주 애석하게도 어린 날 베를리아 리들턴을 구원했던 그 작은 소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니,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왜? 난 적어도 너처럼 사람을 기만하지는 않았어.”

그녀가 요요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사실 베를리아가 딱히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데니안 론델은 한 번 믿기 시작하면 그 방향을 트는 법을 모르는 우직한 성격을 가졌다. 그런 자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텄고 그것이 자라기 위한 환경은 이미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그러니 어려울 게 없었다.

“내가 언제…!”

울컥한 황태자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던 찰나 또 다른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다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요?”

성녀 안젤라 애거스틴이었다. 안젤라를 발견한 베를리아가 갑작스레 말을 건넸다.

“성녀님, 태자 전하가 왜 절 죽이려고 했는지 아세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거냐.”

카를로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사이를 막아섰다. 베를리아가 속으로 웃음 지었다.

‘불안할 테지.’

황태자는 지금 베를리아의 말이 안젤라를 흔들어 놓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데니안이 변했듯이, 안젤라도 그렇게 될까 봐. 즉, 카를로스는 안젤라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황태자가 가로막은 뒤쪽으로 닿았다. 성녀는 여전히 황태자를 믿고 있을까? 그러나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카를로스가 흔들렸고 안젤라가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난 너한테 말한 적 없는데.”

베를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만면에 요요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카를로스는 안젤라를 더욱 제 뒤로 숨기기에 바빴다.

“성녀님은 안 궁금하신가 봐요?”

“기사 단장.”

또 다시 베를리아가 입을 열자 황태자가 데니안을 불렀다. 베를리아의 입을 막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와 베를리아를 번갈아 보던 데니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데니안 론델!”

제 충직한 기사가 요지부동이자 카를로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이곳에서는 황태자의 힘만으로 베를리아를 막을 수 없었다. 성녀는 무술을 다룰 수 없었고 베를리아와 메리쉬는 각각 마력이 뛰어났다. 그 와중에 데니안까지 카를로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베를리아의 뜻대로 될 것이 뻔했다.

“데니!”

황태자가 데니안을 애칭으로 부른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데니안의 몸이 움찔했다. 그건 오래도록 카를로스를 지켜 온 기사로서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데니안이 그에 따라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저 우직한 기사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황태자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론델 기사단장, 너도 그렇게 생각해? 성녀님이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고?”

그런 분위기를 끊어 놓은 것은 성녀였다.

“그만 하세요.”

카를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에서 빠져나온 안젤라가 당당히 베를리아와 마주했다.

“제게 이야기를 해 주시려는 것은 감사하지만, 만약 제가 카를로스에게 들어야만 할 이야기가 있다면 직접 듣겠어요.”

그러니 더 이상은 관여하지 말라는 셈이었다. 안젤라의 사랑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이럴 때면 베를리아는 악역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 순간은 마주할 때마다 언제나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 너희들은 주인공이라 이거지.’

속이 뒤틀렸다.

“…좋아요. 성녀님께서 그러시다니 굳이 제가 말을 얹을 필요 있나요.”

베를리아가 웃으며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속에서 치미는 새까만 기분을 억눌렀다. 아직은 아니었다. 성급하게 성녀를 다그칠 필요가 없었다.

제국을 통일하고 싶어 하는 카를로스에게 있어 베를리아는 없는 게 훨씬 나았다. 황태자는 베를리아의 저주를 나눠 가졌다. 황태자가 저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베를리아가 사라져야만 했다. 저주의 뿌리가 베를리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가 나눠 가진 저주의 일부분은 결국 커다란 몸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것에 불과했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로부터 가진 권력을 앗으려 함과 동시에 그녀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였다.

이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려면 지금보다 황태자와 성녀 사이가 흔들려야만 했다. 도저히 사랑이 눈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사이가 궁지에 몰렸을 때.

“그렇지만 성녀님께서 궁금하시다면 언제든 리들턴의 저택을 찾아 주시길.”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마주하며 요요하게 웃어 보였다. 뱀은 조급하게 먹이를 뜯어 먹지 않는 법이었다. 먹이를 통째로 삼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녀가 기다려 온 세월이 얼마였는데.

그건 무의식 중에 든 생각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뒤로 물러났다. 당장 황태자에 대한 일이 아니어도 베를리아는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레밀튼 지역의 전염병을 잡는 일이 먼저였다.

***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의 옆을 당당히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그림자 주제에.”

그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얼마 전까지도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던 그림자였던 주제에 저렇게 당당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를리아가 없었다면 저런 자에게 귀족 작위가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를, 카를?”

“아, 앤지.”

카를로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뒤늦게 돌아봤다. 안젤라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했어?”

안젤라도 그의 시선이 어디를 쫓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카를로스의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니 모르려고 해야 모를 수 없었다. 그래도 굳이 물었다.

안젤라조차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카를로스의 솔직한 답을 바랐는지, 혹은 그가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을 보기를 원했는지.

“…아무것도 아니야, 앤지.”

카를로스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안젤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적어도 그가 저런 식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얼버무리기를 바라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카를,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안젤라가 카를로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원래는 이곳에서 하려던 말은 아니었다. 카를로스와 단둘만 있을 때 좀 더 비밀스러운 곳에서 말하려 했었다. 안젤라는 순간 자신이 너무 충동적이었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더는 미뤄 두고 싶지 않은 문제이기도 했다.

“무슨 할 말?”

“여기서는 말고. 자리를 옮겼으면 해.”

카를로스의 질문에 안젤라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닥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로부터 떨어져 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카를로스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에는 그림자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그 자리에 있길 바랐던 상대는 이미 망설임 없이 떠난 뒤였으니까.

뒷모습을 보였던 사람은 언제나 카를로스였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자신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베를리아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뇌리에 맴도는 것은 결코 돌아보지 않던 베를리아의 뒷모습뿐이었다.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지금 제 곁에는 안젤라가 있었다. 그것을 티 낼 수는 없었다. 그가 제 연인에게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지, 네가 원한다면 당연히.”

“…황태자 전하와 성녀님을 호위해라.”

카를로스와 안젤라의 대화를 들은 데니안이 주변의 기사 중 몇을 짚으며 명했다. 그 태도는 분명 황태자와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데미….”

“카를.”

카를로스는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안젤라가 그것을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어도 황태자 전하를 호위할 이들은 많으니, 저는 이곳을 좀 더 지키겠습니다. 수도에서 일어난 역병이니 총력을 다해야겠지요.”

데니안이 일견 여전히 충직한 기사처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수도에서 일어난 역병은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데니안은 황족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황실 기사단장이었다. 적어도 카를로스는 데니안의 태도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는 안젤라와 함께 얌전히 그 자리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와 황실 기사단장 사이의 불화를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무언가 많은 것들이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안젤라와 카를로스가 둘만 남는 순간, 그녀가 꺼낸 말로 인해 최고조에 달았다.

“카를, 황태자비 선발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건 두 사람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져 오던 금기와 같았다. 그런데 안젤라는 더 이상 그것을 참지 않았다.

그 무엇도 카를로스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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