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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46)화 (46/148)

46화. 너는 절대 이길 수 없다(5)


 

“네.”

베를리아가 매우 유감스러운 심정을 담아서 말한 것과는 상반되게 메리쉬의 대답은 싱거웠다. 아주 간단하게도 카를로스를 죽일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메리쉬의 답에 당황한 것은 베를리아였다.

“이유는 안 물어 봐?”

“베릴이 그러시다면 이유가 있겠죠.”

그가 순하게 대답했다. 메리쉬 리들턴, 이제는 메리쉬 리아세. 원작에서 그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악행은 간 보기였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일들을 자행한다.

원작의 메리쉬는 복수 하나에 미쳐 있었고, 모든 것을 걸었다. 베를리아 리들턴 대신 그에게 새로 들어찬 삶의 이유는 오직 복수 하나였다.

원작의 메리쉬가 베를리아가 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악마를 불러내기 위하여 수많은 목숨과 피를 그 앞에 바치는 일이었다.

원작에서 메리쉬는 진짜 악역이라는 말에 어울릴 법한 짓들을 저지른다. 그러니까 단언컨대 메리쉬라는 남자는 절대 순한 남자가 아니었다.

원작을 전부 읽었던 만큼 그녀는 메리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런데도 저렇게 제게만 유순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속아 주게 된다.

아니, 이제는 속아 주는 것인지 정말로 속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원래 사랑은 버젓이 뜬 사람의 눈도 가리는 법이니까.

“내 저주가 황태자와 연결되어 있어.”

베를리아의 한 마디에 메리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느긋하던 방금 전의 태도와 다르게 조급한 태도로 그가 물었다.

“만약 황태자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야기하자면 긴데, 황태자에게는 황실의 이능이 있어. 어린 날의 카를로스가 그 이능을 통해서 내게 걸린 저주를 나누어 받았어.”

꿈은 단편적이었지만 그를 통해서 그녀는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들을 몇 가지 더 떠올렸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저주를 나눠 받은 것은 꿈속의 그 한 번이 아니었다.

“네멘 리들턴을 죽이고 카를로스 에덴버를 황태자위에 올리면서 내가 능력을 사용하는 동안 내내.”

“그럼 황태자가 죽으면….”

“그 자식이 나누어 가져갔던 저주를 내가 고스란히 다 받게 되겠지.”

네멘 리들턴이 연구한 고대 마법은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몸에 커다란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베를리아가 그 힘을 사용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어릴 적에 실험을 통해서 몸을 개조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변화시켜 봤자 베를리아의 신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이었다. 한계란 것이 존재했다. 그래서 베를리아의 몸은 늘 보통의 인간보다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네멘 리들턴이 저주를 더했다. 베를리아가 제가 시킨 것을 실패할 때마다, 제 말을 어길 때마다.

베를리아와 카를로스가 만나게 된 것은 네멘 리들턴의 계획이었다. 그는 제 마법을 흑마법이라 치부하는 다른 마법사들을 증오했다. 네멘 리들턴은 그들을 찍어 누를 수 있는 더한 권력을 바랐다.

네멘 리들턴이 베를리아를 카를로스에게 보낸 이유는, 황족 중 카를로스 에덴버가 가장 힘이 없어 이용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를로스를 사랑하게 된 베를리아가 점차 네멘 리들턴의 말을 거부했다. 베를리아의 몸에 새겨진 무수한 저주의 낙인들은 그때마다 네멘 리들턴이 그녀를 제멋대로 다루기 위하여 새긴 것들이었다. 네멘 리들턴이 건 저주는 그 자신만 풀 수 있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네멘 리들턴의 목숨을 취했다. 그래야만 므시아의 힘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어 카를로스 에덴버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 그 결과, 네멘 리들턴이 풀어 주지 않은 저주는 고스란히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한동안 메리쉬는 말이 없었다. 베를리아가 그의 눈치를 봤다. 이제 와 지울 수도 없는 이 저주의 낙인은 언제까지고 그녀가 황태자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그게 어디 연인의 입장에서 마음 편하겠는가.

“그러면 죽지만 않으면 되겠군요.”

메리쉬의 손이 상냥하게 베를리아의 뺨을 감싸 매만졌다. 마치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달래듯이.

“베릴은 베릴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가볍게 그녀에게 입술을 내린 그가 웃었다. 어느덧 메리쉬의 미소는 꽤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새삼 자신이 저 웃음에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메리쉬는 항상 베를리아를 향해서 웃어 주었으니까.

“당신을 지키는 건 언제나 제 일이었으니.”

쪽, 쪽. 새가 부리로 쪼듯이 가벼운 입맞춤들이 자잘하게 내려앉았다. 베를리아는 자신의 걱정이 정말 부질없었음을 인지했다.

메리쉬의 안중에 황태자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메리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를리아, 자신뿐이었으니까.

“황태자의 목숨만은 붙여 놓는 것도 제가 하면 되니까요.”

가만히 메리쉬를 보던 베를리아가 그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언젠가 황태자에게 복수하고 싶다던 그녀의 말을 메리쉬는 단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베를리아에게는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뒷처리는 자신이 하겠다고. 메리쉬도 분명히 황태자에게 유감이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늘 그렇다. 메리쉬는 베를리아에 한해서는 무엇이라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사랑해, 멜.”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남자에게 사랑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사랑해요, 베릴.”

맹목적인 사랑을 내놓으면서 겨우 말 한마디에 메리쉬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침대 위의 휘장이 자연히 내려왔다. 두 개의 그림자도 하나로 겹쳐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왜 그런 얼굴이에요?”

베를리아에게 정제 포션을 전해 주러 온 리리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베를리아가 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요.”

“굉장히 무언가 불만스러운 얼굴인데.”

베를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리리카의 말은 정확했다. 그녀는 지금 매우 불만스러웠다.

왜냐고?

‘…그만 쉬어야죠. 방금 깨어났는데.’

한참 달아오르던 도중에 갑자기 정신이 든 메리쉬가 그것을 딱 끊어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가 괜찮다며 어르고 달랬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흥분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제 욕구보다 그녀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상대를 두고 베를리아도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됐고 그거나 내놔요.”

베를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달라는 상자는 주지 않고 리리카가 덥썩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뭐 하는 거예요?”

“잠깐만 있어 봐요. 상태 좀 보려는 거니까.”

제 손을 내치려는 베를리아를 만류한 리리카가 말했다. 곧 이질적인 신성력이 그녀의 신체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별 걸 다 할 줄 아는군요.”

사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 낯선 기운은 베를리아의 상태만을 확인하고 바로 거두어졌으니까. 리리카는 순수하게 그녀의 상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올랐다.

‘난 앞으로도 베를리아 양의 편이에요. 당신 안의 무엇이 달라졌든.’

그날 그 말만 홀연히 내뱉고서 설명도 없이 가 버린 남자. 베를리아가 의문을 참지 않고 곧바로 리리카에게 물었다.

“무조건 내 편이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이에요?”

메리쉬는 쓰러졌던 베를리아를 걱정하여 전염병이 얼마나 잡혔는지 대신 확인하러 가서 자리를 비웠다. 지금이 아니면 메리쉬 몰래 물을 기회를 또 찾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흠, 말 그대로의 뜻인데요.”

그가 눈을 요요하게 휘며 웃었다. 생글생글. 어딘가 광대 같아 보이면서도 썩 잘 어울리는 그런 웃음.

“그럼 내 안의 무엇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요?”

“사람은 원래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겠어요?”

리리카는 능숙하게 의뭉을 떨고 있었다. 베를리아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선문답이나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요. 괜히 말 돌리지 말고.”

그녀가 리리카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나 그가 베를리아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또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저 시선. 리리카는 사로잡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렇게 베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궁금해요?”

그 말에 베를리아가 리리카를 지긋이 응시했다. 리리카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마치 제가 내뱉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그게 불편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건 리리카와 단둘이 우물가에 갔던 그 날, 알면서도 그에게 웃는 얼굴이 낫다고 말한 그때와 비슷했다.

제가 원하는 것 이상은 알고 싶지 않은. 지금 궁금하다고 대답하면 베를리아는 리리카에게 자신이 바란 정도보다 더한 것을 알게 될 터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가 대답을 내놓지 않았는데도 그 침묵만으로도 리리카는 대답이 되었다는 듯이 물러났다. 여전히 생글생글 그 광대 같은 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로.

리리카는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어려운 상대였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에도 없고 원작 속에도 서술되지 않은 캐릭터. 그렇지만 눈앞에 이렇게 선명하게 존재하는 사람.

이유를 알 수 없이 처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고, 어쩌면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었을 수도 있는 남자.

“베를리아 양은 걱정할 것 없어요.”

그 속을 알 수 없는 리리카의 까만 눈동자가 베를리아에게 향했다. 깊이도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시선.

“그냥, 당신은 행복해지면 되는 거예요.”

사내는 베를리아가 원하지 않으면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으면서도 그녀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말을 내놓았다. 그러니 그녀는 결국,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죠. 난 행복해질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이기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리리카는 웃었다. 진심으로.

***

“태자 전하의 집무실에서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므시아 사람들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전염병이 퍼졌던 레밀튼 지역에 도착한 베를리아에게 다가온 데니안이 말을 건넸다.

“…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건넨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첫사랑이 죽은 후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던 그를 구원한 새로운 사랑이 성녀였다. 그런데도 원작 속의 데니안은 오직 황태자를 향한 충정으로 안젤라를 포기했다.

그런 데니안 론델이 놀랍게도 지금 카를로스 에덴버를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균열을 확인한 베를리아가 웃음을 속으로 참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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