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너는 절대 이길 수 없다(4)
“쓸모없는 것.”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뱀처럼 서늘하게 생긴 사내는 마치 사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생긴 사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몸이 움츠러든 것과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차마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곧 죽을 듯한 꺼져가는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의 것 같았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몸이 어린 소녀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눈앞의 사내가 베를리아 리들턴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면서도 처음으로 사랑했던 인간, 네멘 리들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취향 한 번 최악이구나, 베를리아 리들턴.’
그녀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린 소녀는 네멘 리들턴을 사랑했다. 이 사내가 결코 제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궁창에서 자신을 구해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간의 정신이란 어찌 이리 나약한가? 제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이 사람인데도, 네멘 리들턴의 실험을 이겨내고 나면 주어지는 보상은 달콤했다. 베를리아가 한때 살았던 시궁창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마침내 네멘 리들턴에게 아버지라 부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우습게도 마치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에도 빠져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무수한 아이들이 네멘 리들턴의 실험실로 끌려 왔으나 그 속에서 살아남은 건 베를리아뿐이었다. 네멘 리들턴의 ‘딸’이 된 것은, 리들턴의 성을 받은 것은 베를리아뿐이었다.
“기억해라, 베를리아. 내가 시킨 것을 해내지 못하면 네게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이야.”
네멘 리들턴의 손이 다가왔다. 저 손이 제게 닿으면 고통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소녀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생에 처음으로 가져 본 아버지라는 존재, 저를 시궁창에서 건져 낸 사람. 그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질 자신.
네멘 리들턴의 손이 베를리아의 머리에 닿았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에 붉은 낙인이 타올랐다.
“…!”
전신을 뒤흔드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아이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이런 것쯤 익숙했다. 그리고 네멘 리들턴은 이런 고통조차 버티지 못하는 나약함은 용납하지 않았다.
베를리아에게 고통만을 남겨 놓은 네멘 리들턴은 무정하게 다른 실험을 하기 위해 가 버렸다. 애초에 소녀에게 정이란 것이 없었으니 말 그대로 무정했다.
주변이 고요했다. 네멘 리들턴의 ‘딸’이 되었어도 실험은 계속되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진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딸’이 아니라 그저 ‘실험 재료’에서 ‘특별한 실험 재료’가 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네멘 리들턴은 제 볼일을 마치고 나면 베를리아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녀는 그에게 순종했고 어차피 소녀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가 ‘힘’을 일으켰다. 네멘 리들턴은 이것을 ‘고대 마법’이라고 불렀다. 소녀는 카를로스를 만난 뒤에야 그것이 금지된 흑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으리라는 사실도.
그래도 소녀는 네멘 리들턴의 보호 아래에 있었다. 그것이 귀한 재료를 아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끝내는 받아들였지만.
‘…가야 하는데.’
소녀가 생각했다. 어디를?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소녀는 그녀였지만 동시에 그녀가 아니었다.
‘…카를.’
곧 소녀의 머릿속에 곧 한 소년이 떠올랐다. 자신이 아니면 그 외로운 냉궁에서 홀로 망연히 누군가를 기다릴 카를로스 에덴버를.
곧 무형의 힘이 소녀의 존재를 감쌌다. 그리고 곧 소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베릴!”
왜냐하면 소녀가 보고 싶었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늦었… 너 또 아파?”
외로웠던 소년이 곧바로 소녀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꺼냈다. 작은 투정을 부리려던 소년은 곧 소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챘다.
“바보야, 아프면 쉬어야지 여길 왜 와…!”
소년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작은 손이 작은 손을 잡고 제 침대로 이끌었다.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불의 마법석을 베를리아의 주변으로 죄 끌어온 소년이 소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또 저주의 낙인을 새긴 거야?”
“괜찮아, 카를.”
“안 괜찮아! 이런 건 사람에게 새기라고 있는 게 아니야!”
어린 카를로스는 잔뜩 속상한 얼굴이었다. 자신 때문에 속상한 얼굴을 해 주는 유일한 사람. 그게 이 소년이었고 그래서 소녀는 그것만으로도 소년이 좋았다.
소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 시궁창에서 살아남을 만큼 영리했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네멘 리들턴에게 자신은 ‘딸’이 아니란 것을.
그러나 알아도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처음으로 가져본 ‘아버지’와 춥고 더럽지 않은 집은 더욱 소녀가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 소녀의 결여를 소년이 채워 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괜찮아. 그래도 난 아버지의 딸이고, 살아 있잖아.”
베를리아는 살고 싶었다. 시궁창에서도, 네멘 리들턴의 실험실 속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야 했다. 소녀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네멘 리들턴의 덕이니까.
“…너는 왜 그렇게.”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네멘 리들턴이 베를리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흑마법으로 저주의 낙인을 새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소년은 분노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소녀에게는 몇 번을 화내도 소용이 없었다.
소년이 생각하기에 소녀는 어리석었다. 어리석을 만큼 맹목적이었다. 왜 그 맹목적인 마음이 하필 겨우 그딴 자에게 향하는지 그것이 너무 싫었다.
“…내가 널 덜 아프게 해 줄게.”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던 소년이 문득 말을 꺼냈다. 네멘 리들턴의 고대 마법은 마탑의 마법사들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 잘난 신관들조차.
“응?”
소녀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답보다 빠르게 소년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와 소녀를 물들였다.
“미안해, 넌 매일 이렇게 날 찾아와 주는데 내가 해 줄 건 이거밖에 없어서.”
곧 새하얀 빛이 불길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소녀는 소년이 제 저주를 가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만, 카를…!”
소녀가 소년을 말리려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소년은 꼭 부여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새하얀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소녀는 제 몸이 가뿐해졌음을 알았다. 그리고 소년은 피를 토하며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게 카를로스가 처음으로 제 황족의 이능을 사용했던 날이었다.
***
“…베릴, 정신이 듭니까?”
조금 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에 자신을 향한 녹빛 시선이 들어왔다.
‘…꿈이었구나.’
그제야 베를리아는 자신이 방금 어린 날의 베를리아 리들턴과 카를로스 에덴버의 모습을 보았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선명했다. 스스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제 손을 놓지 않던 그 작은 손. 그 온기.
베를리아 리들턴은 그렇게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하게 되었다.
심장이 옥죄어오는 느낌이었다. 고통과 슬픔이 온몸에 들어찼다. 베를리아 리들턴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한 번 정하면 그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이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버림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했고 그런데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었기에 고통스럽고 슬펐다. 그게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랑이었다.
“베릴.”
갑자기 몰려드는 감정들의 해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그녀를 불렀다. 애타게 자신을 바라보는 녹빛 시선.
그것이 베를리아 리들턴의 몸에 남은 기억 속에서 한없이 헤맬 것 같던 그녀를 현실로 끌어다 놓았다.
“…멜.”
그녀가 조용히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연이어 다시 멜, 하고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베릴. 저 여기 있어요.”
메리쉬는 기꺼이 자신이 가졌던 모든 의문과 물음들을 내려놓고 베를리아의 부름에 답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을 잠기게 했던 감정들 속에서 끌어올려 졌다.
“나의 멜. 내 연인, 내 사랑.”
“네, 베릴.”
그녀가 가만히 메리쉬를 바라보다가 팔을 뻗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메리쉬가 당연하다는 듯이 순종적으로 답하며 그녀를 안아 주었다.
닿아도, 닿아도 부족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꿈과 현실의 경계 어딘가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팔다리가 메리쉬를 옭아맸다. 그게 답답할 텐데도 그는 오히려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몇 번이고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난 네가 아니야, 베를리아 리들턴.’
그녀는 제게 남은 감정의 잔재를 밀어냈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하던 베를리아 리들턴은 죽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메리쉬였다.
사랑이든 욕망이든 그건 살아남은 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살아남았고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죽음을 택했다. 그러니 베를리아 리들턴의 잔재 따위가 그녀에게서 차지할 공간은 없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이 제게 심어 놓은 감정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감히, 제 인생을 뒤흔들려 든다면 몇 번이고 이렇게 죽이리라.
마침내 그 부산물을 모두 밀어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멜, 할 말이 있어.”
“말씀하세요, 베릴.”
“카를로스 에덴버를 죽이지 못할 것 같아.”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이에게 이런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참,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카를로스 에덴버가 끔찍하게 싫은 자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