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너는 절대 이길 수 없다(3)
뒤를 돌아보니 베를리아의 손목을 낚아채려고 했던 카를로스의 손을 메리쉬가 막고 있었다.
“베릴, 어떻게 할까요?”
메리쉬는 침착하게 베를리아와 카를로스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고 물었다. 감히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대려 한 황태자를 어떻게 할지.
메리쉬의 악력이 상당해서 고통이 뒤따를 텐데도 카를로스는 눈에 핏줄을 세우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녀를 노려봤다. 그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 멋대로 내게 맹세한 건 너였잖아!”
그 순간 카를로스의 왼쪽 얼굴에 붉은 낙인이 타올랐다. 그것을 알아본 베를리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것은 그녀가 지난번에 제 얼굴에서 봤던 낙인과 한 치의 틈 없이 똑같았다.
‘저게 왜, 황태자한테…?’
원작에서도 나온 적 없는 모습이었고 이해할 수도 없는 전개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베릴?”
“그런데, 네가 날, 배신해?”
베를리아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메리쉬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제 안의 감정을 토해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베를리아를 강타했다.
“헉…!”
심장을 통째로 잡아 옥죄는 느낌. 베를리아의 신형이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그것을 재빠르게 받아든 메리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베릴…!”
“…베릴?”
온 주변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자신을 불러오는 메리쉬의 목소리조차도 이명에 더해져 삐이이익- 귓가에 시끄럽게 번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토해내던 카를로스 또한 그녀에게 놀라 다가왔다.
주변의 사물이 일그러졌다. 공간이 늘어났다가 분리되고 뒤틀리며 그녀를 이 세계로부터 밀어냈다.
***
‘카를.’
어딘가에서 여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드니 어린 베를리아 리들턴이 눈앞에 보였다. 작은 소녀는 작은 소년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머릿속이 어질거렸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은 제멋대로여서 이렇게 불쑥불쑥 그녀를 찾아들곤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결연한 얼굴로 아이가 맹세했다.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네가 어떻게.’
소년은 넋을 놓고 울고 있었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저를 지켜 주던 유모를 방금 막 잃었다. 아니, 소년이 죽였다.
왜냐하면, 소년이 믿었던 그 유모가 방금 소년을 독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소년의 입가에는 붉은 핏물이 여실히 묻어 있었다.
일찍이 개화한 소년의 핏줄을 따라 내려오는 이능이 아니었더라면 소년은 그것을 마시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소년에게는 독이 든 음식을 감별해 줄 시종조차도 없었으니까.
소년의 얼굴에는 불신이 어려 있었다. 탁. 제 눈물을 닦아 주려는 소녀의 작은 손을 소년이 매섭게 쳐냈다.
‘그래, 지켜 준다 치자. 그럼 언제까지?’
아이답지 않은 비소가 소년의 얼굴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소년의 곁에 서 있던 자들도 결국 등을 돌렸다. 지금 이 싸늘한 바닥에 생을 잃고 누워 있는 한 여인처럼.
말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함께 흘러가 버렸다. 끝내는 이렇게 그 가치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지금 이 순간부터 믿지 않기로 했다. 설령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눈앞의 소녀일지라도.
그러나 소녀가 입을 여는 순간, 소년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주신 에를니아의 이름 앞에 맹세컨대, 나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를….’
***
“베릴!”
파도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덮쳐 오던 환상들 속을 뚫고 들어온 목소리가 절박하게 그녀를 불렀다. 목소리가 내어 준 길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 건 본능적인 일이었다.
“베릴, 베릴. 정신이 듭니까? 베릴-”
메리쉬가 그녀의 뺨을 보듬으며 울고 있었다. 베를리아가 멍한 시선으로 그의 손에 들린 정제 포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입 안에 까끌까끌하게 부서진 알약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저 때문에 울고 있는 녹빛 시선. 자신이 삐뚤어진 인간이라서일까. 너의 슬픔에 너의 사랑을 느껴 버려서, 우습게도 그게 좋았다. 베를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
메리쉬가 잠든 베를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원래도 온기가 없는 손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그 손을 제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여기까지 베를리아를 무슨 정신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리들턴 저택으로 귀환하는 전용 스크롤을 떠올리는 데만 해도 시간이 소요됐다. 갑자기 쓰러진 베를리아로 인해서 패닉이 왔기 때문이었다.
“베를리아는 괜찮은 건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죽하면 저자가 이곳까지 따라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베를리아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다급했으니까.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의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 준 메리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순간적으로 목이라도 졸린 듯 카를로스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기 시작했다.
메리쉬의 주변에서 보라색의 짙은 마력이 일었다. 그게 카를로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더불어 내리깔린 살기가 마치 최상위 포식자라도 만난 듯이 카를로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리들턴에 상주하는 의원이 진찰한 결과 그녀의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뿐.
“네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서야, 베릴이 갑자기 쓰러졌을 리 없어. 그 전까지 이 사람은 괜찮았으니까.”
베를리아가 한 번 죽을 뻔한 뒤로 메리쉬는 시시각각 그녀에게 촉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까 불안했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베를리아의 건강 상태는 메리쉬가 가장 잘 알았다.
최근에 베를리아는 네멘 리들턴의 실험으로 인한 부작용도 겪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근래에 들어 이토록이나 베를리아의 상태가 안정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쾅!
메리쉬의 손이 옴짝달싹 못 하는 황태자의 목을 틀어쥐고 벽으로 처박았다. 폭주하는 마력이 카를로스를 죽일 듯이 짓눌렀다. 메리쉬가 살벌한 음성으로 짓씹듯이 물었다.
“말해. 무슨 짓을 했지?”
“하, 그러니까 지금 베릴이 쓰러진 게 나 때문이라는….”
큭, 목이 졸린 황태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뒤늦게 오러를 일으켜 저를 압박하는 메리쉬의 마력을 밀어냈다. 신성력마냥 새하얀 순백의 오러가 서서히 제 영역을 넓혀 갔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러나 그것을 비웃듯 다시 보라빛의 마력이 공간을 장악했다. 겨우 숨 쉴 틈만을 내어준 악력, 자신을 짓눌러오는 마력. 그 무엇도 카를로스보다 우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카를로스가 아득 이를 악물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는 사내였다. 그전까지 존재조차 제대로 몰랐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그렇게 궁금한가?”
카를로스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메리쉬를 도발하는 것처럼. 아까처럼 황태자의 왼쪽 얼굴에 붉은 낙인이 떠올랐다.
데니안의 앞에서 보여줬듯이, 베를리아의 얼굴에 있던 낙인과 똑같은.
“말해 주면 네가 알 수는 있고?”
빈정거리는 어조는 마치 자신이 베를리아와 특별한 사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제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를로스와 만나기 이전에 베를리아는 외톨이였다. 네멘 리들턴의 실험 재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너, 당장 그만두지 못해? 생각이 없는 건가? 네가 그런 행동을 한 이후 베릴이 쓰러졌다는 최소한의 자각이라도 없나?”
그러나 메리쉬가 분노한 것은 카를로스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메리쉬는 황태자의 저밖에 모르는 안일함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이 베를리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화를 냈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제 얼굴에 새겨진 붉은 낙인을 메리쉬의 말대로 감추면서도 불쾌함이 그의 속을 채웠다.
특별한 사이였다. 베를리아와 메리쉬는. 누가 봐도 그러했다.
그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메리쉬는 생각해냈다. 결국에는 메리쉬가, 베를리아가 선택한 그녀의 연인이었다.
자신을 기어코 돌아보지도 않던 베를리아의 등. 그게 왜 지금 생각나는지 카를로스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선명한 것은 불쾌함뿐.
팍, 메리쉬의 손을 내친 카를로스가 서늘하게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베를리아가 일어나면 묻던가. 이유는 나도 모르니.”
툭, 더러운 것이라도 놓듯이 메리쉬가 카를로스의 목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베를리아가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이 세상에 오직 그녀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잠시 베를리아를 살피러 들어왔던 재스민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했다. 마치 카를로스에게 단 하나의 유감도 없는 것처럼 정중한 어투였으나 사실 축객령이었다. 한낱 하녀조차.
“감히…!”
“여기는 리들턴 저택입니다, 황태자 전하.”
분노를 표하는 황태자에게 재스민이 차분히 말했다. 그 말의 의미가 모든 것을 전달했다. 리들턴의 영역에서 그곳의 황제는 리들턴이었다. 그러니 카를로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메리쉬는 황태자의 존재는 이제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하녀인 재스민조차 지극히 태연한 반응만을 보이자 입을 꾹 다문 황태자의 턱이 꽉 악물어 떨려 왔다.
리들턴의 저택에서 베를리아의 사람을 해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감정이 사그라드는 건 아니다. 분노가 머리를 달궜다.
결국 카를로스가 거친 걸음으로 리들턴의 저택을 나섰다. 굳이 홀로 앞서가는 황태자를 아무도 배웅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세요, 베릴.”
메리쉬가 고요하게 잠든 베를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인내심은 이미 그녀가 한 번 죽을 뻔한 뒤로 닳고 닳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메리쉬는 만 하루가 안 되는 시간조차 버틸 수가 없었다.
아니, 버티기 싫은 것이다.
“당신이 내 욕망의 전부인데.”
그 누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두고 참을 수가 있겠는가.
“당신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닌데.”
메리쉬의 눈이 베를리아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단 1초의 깜박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내 구원, 내 사랑, 내 욕망.”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줍기 전에 그는 쓰레기장에 버려진 쓰레기였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아무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해 주지 않았다. 스스로조차도.
이 여자가 이 남자의 모든 처음이었다.
한 번 매달리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메리쉬는 앞으로 나아갈 생각조차 없었다.
음습한 녹빛 시선이 잠든 여자를 응시한다. 남자는 그저 꾸준히 참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가여운 척하는 것이 더 사랑받기에 용이하니까.
그러니까 빨리 깨어나서 날 사랑해 줘. 그 남자의 모든 것이 그 여자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