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너는 절대 이길 수 없다(2)
“일을 잘 처리하고 왔으니 상을 주세요, 베릴.”
그렇게 말하는 메리쉬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달콤했다. 착각은 아닐 것이다.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닿아 오는 시선이 있었으니까.
“무슨 상을 줄까?”
메리쉬가 보란 듯이 시선의 주인에게 과시했다. 베를리아는 제 사람이라는 것을. 이 정도쯤이야 장단 맞춰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일평생 무언가를 제대로 바란 적 없는 남자가 오직 저만을 이토록 바란다는 건 일종의 짜릿함까지 선사했다. 그녀도 그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황궁에서는 품위를 지키도록.”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기어코 방해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베를리아가 쯧 하고 대놓고 혀를 차며 메리쉬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정중하되 결코 비굴하지 않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는 빤히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치 그를 압박하듯이. 그러나 메리쉬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내였다. 그의 몸은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도 전혀 미동 없이 굳건했다.
“됐다. 고개를 들라.”
의미 없는 소모전임을 금방 깨달은 카를로스가 명했다. 겨우 한 방 먹인 걸로 회의장에서는 당당했었던 황태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도 기사이기 때문에 알 터였다. 메리쉬가 얼마나 강한지를. 그리고 자신은 메리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도.
“리아세 백작이라.”
탐탁지 않은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메리쉬를 불렀다. 고개를 든 메리쉬가 감히 정면으로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옆에 서 있던 황태자의 호위기사가 그것을 보고 앞으로 나섰다.
“감히 태자 전하께 무례한…!”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메리쉬의 기세가 그 기사를 향하자 그는 한 발짝도 더 나오지 못했다.
황태자가 이를 악물었다. 베를리아와 메리쉬. 두 사람의 존재는 이 자리에서 그가 당장 죽어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뜻했다. 그들의 무력은 그럴 만큼 강했으니까.
“지금 누구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옴짝달싹 못 하는 제 기사를 보던 카를로스가 메리쉬에게 경고했다. 아무리 두 사람이 강하다고 한들 이곳은 황궁이다. 그들이 귀족의 작위를 때려치우고 저들끼리 살겠다면 상관없겠지만 계속 귀족으로 남겠다면 황족의 명은 절대적이어야 했다.
“송구합니다, 태자 전하.”
그제야 메리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으나 그 태도에 묻어나오는 여유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의 경고 따위 그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함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태도였다.
“그보다 멜이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는군요.”
“내게 전할 말?”
“예, 전하.”
느긋하게 흐름을 제게로 가져온 베를리아가 서두를 던졌다. 그 말을 알아들은 메리쉬가 삐뚜름한 미소를 걸고 황태자의 물음에 답했다.
“지난밤, 제 영지에서 간자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그곳이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참으로 여상한 태도로 메리쉬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리아세 지방은 분쟁이 자주 일어나는 라우드 강 유역에 있는 곳.”
메리쉬의 말에 카를로스의 턱이 긴장으로 굳는 것이 선연히 보였다. 그와 별개로 메리쉬의 발언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간자를 발견했으니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이리 전하를 찾아뵈었습니다.”
베를리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메리쉬 쪽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얌전히 지켜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간자라. 어째서 그렇게 판단했지?”
“간자를 생포한 결과 그자가 지니고 있던 것들은 평범한 이가 소지할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황태자가,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리아세 지방을 주리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백작위를 얻기 전까지 메리쉬는 이 나라에서 어떤 신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건 황태자가 따로 손을 쓰지 않는 한 메리쉬를 공적으로 공격할 방법은 없다는 뜻이었다.
황실의 권력이라도 이용하지 않으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사람인 메리쉬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했다.
그렇다는 건 황태자는 메리쉬를 두고 무언가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황실의 권력을 움직이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카를로스가 간자를 보내어 메리쉬가 어떤 영지를 받을지 캐내리라는 건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간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므시아에 파고들었는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기다렸을 뿐.
“한 나라의 왕실이나- 황궁이라면 또 모를까.”
메리쉬가 말한 베를리아가 바라던 것. 그는 유능하게도 그 짧은 사이에 받은 영지를 돌보고 간자를 잡아 증거까지도 무사히 가져온 모양이었다.
메리쉬가 황태자의 앞에 가져온 증거를 내밀었다. 재질이나 모양새가 확실히 평범한 사람의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표정이 굳은 황태자가 말했다. 메리쉬의 팔에 팔짱을 낀 베를리아가 미소를 머금고 그 뒤를 따랐다.
‘그래, 이 자리에서 그 간자가 누구의 사람인지 밝혀지면 얼마나 곤란하겠어.’
키득키득. 숨죽인 웃음소리가 목구멍 아래로 울렸다. 금세 즐거워진 베를리아의 표정을 보며 메리쉬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여 다정하게 속닥였다.
“이제 기분은 나아지셨습니까?”
“기분이야 널 봤을 때부터 좋아졌지.”
쪽. 베를리아의 입술이 메리쉬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앞의 황태자는 심각한 데에 반해 두 사람의 분위기는 봄바람이 살랑 이는 것만 같았다. 황태자야 귀가 없지는 않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
“왕실이나 황실의 간자라고 확신한 이유는?”
자신의 집무실로 와 호위까지도 물린 황태자가 말했다. 정보상이나 암흑 길드일 경우 귀족들의 의뢰일 가능성도 있었다. 카를로스는 지금 그것이 아닌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냐고 묻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그것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간자가 어둠의 경로에서 흘러들어왔다면 이 문자를 제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태자 전하.”
그녀는 속으로 황태자를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답했다. 베를리아가 손가락으로 메리쉬가 가져온 증거품 중 양피지를 가리켰다. 양피지의 안쪽에는 암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베를리아는 므시아의 주인. 암흑가의 황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이 자리에서 굳이 그녀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 능력은 사실 황태자가 가장 잘 알 테니.
“타국에서 첩자를 보내 온 것이라면 중대한 문제이니 회의에 안건으로 올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베를리아가 물었다.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굴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나라마다 각국에 첩자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륙의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어느 나라나 그렇게 한다. 그러나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들키지 않았을 때뿐이었다.
들켰다면 그로 인해 지울 수 있는 책임만 수십 개가 넘을 것이다. 응당 안건에 올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첩자를 보낸 나라에 뜯어 올 것들’을 논해야 했다.
그러니까 실상 메리쉬가 발견한 것이 정말로 다른 나라의 첩자에 대한 증거라면 에덴버에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공을 치하 받을 일이다.
단,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 간자가 카를로스가 보낸 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었다.
“그만하지, 베를리아 리들턴.”
이제는 완전히 냉해진 표정을 숨기지 않은 황태자가 말했다. 나라 간에도 그렇듯이 첩자는 들키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
“무엇을 원하지?”
황실에서 귀족들을 감시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게 수면으로 드러났을 경우 황태자는 귀족들의 질책을 피할 수 없었다.
“무엇을 원할 것 같은데?”
황태자가 먼저 백기를 들자 베를리아는 느긋하게 의뭉을 떨었다. 이제 막 황태자위에 오른 카를로스는 지금도 귀족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책을 잡히면 곧 약점이 될 것이다.
“그자의 영지에 대한 감찰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면 되겠나?”
황태자가 곧바로 말을 꺼냈다. 베를리아의 성격상 대화를 길게 끌어봤자 자신만 불리해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말은 즉 메리쉬가 리아세 영지에 직접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겨우?”
“또 무엇을 바라서.”
베를리아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며 탐탁지 않은 듯 되물었다. 그로 인해 카를로스의 얼굴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넌 참, 그 얼굴이 잘 어울려.”
대화를 나누다 말고 뜬금없이 내뱉어진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의 시선이 지긋하게 그녀를 향했다.
“무엇 하나 네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그러진 표정.”
조곤조곤 내뱉는 베를리아의 말에는 악의가 선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태자의 불행을 바라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았다.
“베를리아.”
“말했잖아,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카를로스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에게만은 한없이 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 앞에서 이런 악의를 보이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여전히 낯설었다.
“그리고 내 사람은 여전히 지독하게 행복하길 바라.”
그녀가 고개를 돌려 메리쉬에게로 손을 뻗었다. 오직 메리쉬만을 향하는 그 시선. 그건 카를로스가 아는 베를리아였다. 다만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만이 바뀌었을 뿐.
“전 당신만 있으면 행복합니다, 베릴.”
“그래도 난 너에게 더한 걸 주고 싶은데?”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베를리아의 손을 정중히 잡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메리쉬가 그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베를리아가 웃었다. 오직, 메리쉬를 향해서.
“네가 그걸 방해했어, 카를로스 에덴버.”
카를로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자신을 두고 방해라 일컬으며 한 치의 틈도 없이 흔들리지 않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겨우 그것으로 만족할까?”
감히 베를리아 리들턴의 사람을 건드리려던 대가는 컸다. 그 대가를 모두 치른 자들은 이 땅 위에 없었다. 그건 카를로스 에덴버가 아주 잘 아는 일이었다.
“협상은 네가 유리할 때나 하는 거야, 황태자 전하.”
베를리아가 뭘 모르는 아이를 가르치듯 조곤히 말했다. 그건 웃음이 담기지 않은 비웃음이었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에게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리려 한 대가를 치르라고 강압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카를로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봐, 네가 뭘 해야 내 입이 다물릴지.”
그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카를로스를 등지고 나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약속은, 네가 먼저 했잖아.”
무언가의 감정을 꾹 눌러 담은 듯한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