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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42)화 (42/148)

42화. 너는 절대 이길 수 없다(1)


 

카를로스가 메리쉬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건 만에 하나의 일이었다. 베를리아는 처음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메리쉬에게 작위를 주는 일은 비밀리에 진행될 터였다. 설사 혹시라도 카를로스가 안다고 한들 지가 어쩌겠는가.

‘황태자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렇게 안도하고 있을 즈음 그 말이 거슬렸던 까닭은 하나였다. 숨길 게 많아 보이는 리리카로서는 굳이 의심을 살 만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의도야 뻔했다. 라우드 지방의 상류에 가까운 지역들은 분쟁도 적고 커다란 물줄기가 있는 덕에 여러모로 발전해 있었다. 그곳에 주요 귀족들의 영지가 많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귀족들의 경우 지방에 머물지 않고 수도에 따로 타운 하우스를 마련하여 살았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주려고 했던 영지인 리아세 영지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것을 노린 것이다. 만약 그 근처에서 토벌이 이루어진다면 라우드 지방 근처의 귀족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태자 전하.”

재빠르게 백작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베를리아의 기억 상 황태자파였다. 황태자파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라우드 강 유역은 황태자의 지지 기반이 가장 약한 곳이었으니까.

카를로스가 말을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동의를 표하는 뜻이야 뻔했다.

‘미리 작당이라도 했나 보지.’

베를리아가 삐뚜름한 웃음을 입가에 내걸었다.

“그리하시지요. 어리석은 이들에게 무력보다 효과적으로 통하는 게 있겠습니까.”

그녀 역시 태자와 그 일파들의 작당 모의에 끼어들어 말을 거들었다. 처형당할 뻔한 이후로 줄곧 황태자의 반대편에 서 온 베를리아였다. 모두가 무슨 꿍꿍인지 궁금하여 그녀를 바라봤다.

“애초에 감히 덤벼 올 수 없게 씨를 말려 버리는 게 좋겠군요.”

매끄럽게 미소한 그녀가 폭탄 발언을 던져 놓았다. 그러자 곧바로 반발이 들려왔다.

“경솔한 발언은 삼가시오, 리들턴 백작.”

“왜요, 못 하시겠습니까?”

명백한 도발이었다. 상대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많은 이들이 동시에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흔히 정의되는 악녀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악인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녀는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주저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를 황태자위에 올리기 위하여 모든 후계 후보를 죽였듯이.

무려 황족들을 쓸어버린 베를리아 리들턴의 그런 행위가 과연 처음이었을까? 그랬다면 갑작스레 이 전쟁에 난입하여 황태자가 된 카를로스를 귀족들이 얌전히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백성들을 전쟁으로 밀어 넣자는 것인가?”

카를로스가 냉엄해진 표정으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황태자의 말과 베를리아의 말은 그 무게 자체를 달리했다. 씨를 말려 버리자는 건 네이르를 침범하자는 소리였다.

네이르는 엄연히 한 국가였다. 대륙은 오래도록 평화를 유지해왔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에덴버가 그 평화를 깨는 것이 되어 버린다.

“먼저 전쟁 이야기를 꺼내신 건 태자 전하십니다.”

베를리아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제 발언에 대한 무게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토벌과 전쟁이 어찌 같단 말이냐!”

“토벌에 나설 이들은 태자 전하의 백성이 아닙니까?”

황태자의 입이 다물렸다. 베를리아가 이런 식으로 백성을 걸고넘어지면 카를로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원작의 남주인공이었다. 베를리아에게 어떤 사람이었든, 주인공의 역할에 어울리는 어진 군주였다. 백성의 목숨이 몇이든 그 무게를 두고 논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베를리아는 솔직히 말해서 제 사람이 아닌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이기적이었고 카를로스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애먼 이들을 험한 곳으로 내몰 수도 있었다.

‘잘 봐. 메리쉬를 그곳으로 내몰면 누가 먼저 죽는지.’

베를리아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귀족의 작위를 받은 메리쉬가 전장에서 먼저 앞장설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버의 라우드 강 유역을 침범한 이들을 몰아내는 정도가 아닌 본격적인 전쟁으로 변질한다면? 그 앞에 설 것은 가장 힘없는 자들이 될 것이다.

황실이 지키지 못하는 그의 백성들.

“…토벌에 관해서는 추후 다시 논하도록 하지.”

무언가를 지키는 데 선과 악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더 힘을 가졌느냐, 그것뿐. 베를리아는 메리쉬를 지켜냈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베를리아에게서 휙 거둬졌다. 그의 말을 통해 이곳의 모든 귀족은 황태자가 먼저 백기를 들었음을 알았다.

다음이라고는 했지만 결국 결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침입당한 인근 영지의 기사단을 보내어 압박하는 정도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솔직히 현대의 삶을 살던 그녀에게 전쟁이란 까마득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무리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이라고 해도 전쟁을 밀어붙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잔혹함을 믿는다는 건 알았다.

황태자가 물러난 것은 베를리아라면 정말로 그런 짓까지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황태자위까지 올리는 동안 무고하지 않은 자들만이 유명을 달리했을 리 없었으니까.

“태자 전하의 뜻을 받듭니다.”

한 발짝 나서 있던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일어났다. 그 자세는 매우 공손했으나 태도는 감히 황태자를 두고 겁박한 셈이니 실상 참으로 오만불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라우드 지방에 못 보던 이름이 있군.”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려던 찰나 카를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베를리아가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황태자가 말한 ‘못 보던 이름’이 무엇일지는 자명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겠다는 건가? 그래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작위 양도는 이미 황제의 대리를 통해 인증이 이루어졌다. 작위 수여를 위해 감히 황제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이 넓은 나라에 작위를 인정받기 위해 매번 귀족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대리를 통해 인정받는 것은 흔한 절차였다. 이미 메리쉬의 이전 신분은 만들어 뒀다. 즉, 메리쉬의 작위 수여 과정에서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괜한 토벌 이야기를 꺼내 베를리아를 도발한 것은 지금의 발언을 위한 포석일 것이라는.

“하긴 이번에 각 영지의 영주들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

카를로스가 내뱉기에는 썩 뻔뻔한 말이었다.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황태자위에 오르면서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행정 처리에 빈틈도 많이 생긴 것 같더군.”

물론, 괜한 트집이었다. 선황부터가 그 모양이었던지라 애초에 이 나라의 국정에는 구멍이 곳곳에 송송 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가 버텨 온 것은 신전도, 황궁도 그리고 귀족도 서로의 이권 하나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지로 감찰 관리를 보낼까 하는데.”

순간 카를로스와 베를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태자는 간만에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딴 식으로 나오시겠다?’

“아니면 영주들을 불러들여 직접 얼굴을 보는 법도 있고. 내 나라의 영토를 다스리는 이들인데, 내가 무심하게도 한 번을 못 살펴봤군.”

말투는 더없이 자애로운 군주 같았다. 그러나 감찰을 보낸다는 황태자의 말에 반박하려던 귀족들은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이에게 날치기로 영지와 작위를 주는 방식은 베를리아가 처음이 아니었다. 나라의 허가 없이 팔 수 없는 영지가 귀족들의 멋대로 사고 팔리는 것은 돈이 꽤 있다는 자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다.

엉뚱한 자가 영지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곳의 영주를 마주하는 순간 들통날 터였다. 예컨대 그 가문의 특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남이라 할 만한 혈연 같은.

“공사다망하신 태자 전하께서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차라리 감찰 관리를 내려 보내시어 영지를 살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저마다 찔리는 것이 한가득한 자들이 앞 다투어 카를로스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면 이 건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지.”

황태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확정지었다. 여기서는 베를리아도 더 말을 보탤 수 없었다. 모두가 잊고 있었으나 영지 감찰은 건국제가 끝난 이 시기마다 매해 항상 있던 일이었다.

귀족들과 결탁하여 은근슬쩍 그것을 미뤄 왔던 황제는 병환으로 드러누웠다. 시기나 상황이나 참으로 적절하기 그지없었다.

‘…원작에는 있었는데.’

베를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 보니 원작의 중반부에 카를로스가 이런 방식으로 귀족들을 휘어잡는 에피소드가 서술되었던 게 떠올랐다.

그것을 간과했다. 왜냐하면,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는 영지 감찰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큰일은 아니었다. 그저 영지 감찰이 시행되는 동안에는 메리쉬가 리아세 영지에 머물러야 할 뿐.

발에 불똥이 떨어진 자들과는 달랐다. 카를로스가 언제 그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의식을 가진 이상 베를리아는 그 방면으로 단 하나도 허투루 준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스스로가 훨씬 더 베를리아에게 동화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제가 기억하고 있는 원작보다 베를리아의 기억을 우선시하게 되어 버린 걸까?

‘이래선 안 돼.’

그녀가 이 세계에서 주인공들보다 유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가 나아갈 방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와 맞서려면 그것을 잊어 버려서는 곤란했다.

‘너만은 절대 그 자리에서 행복하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카를로스 에덴버가 싫었다. 그가 황태자로서 공고히 기반을 다지고 훗날 황제가 되어 성녀와 행복한 엔딩을 맞는 결말 따위를 보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가라앉은 자안이 어둡게 빛났다. 그것을 발견한 카를로스가 순간 멈칫할 만큼 어둡고, 어둡게.

***

“멜-!”

또각또각 소리가 조급하게 났다. 베를리아가 황궁 회의실 앞에서 당당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제 연인에게로 다가가 덥석 안겼다.

“회의는 괜찮으셨습니까, 베릴?”

“음…. 뭐, 조금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다정한 메리쉬의 물음에 샐쭉하니 어딘가로 눈을 흘기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베를리아의 몸을 단단히 받아든 그가 미소하며 그녀가 원할만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베릴이 바라셨던 것을 들고 왔습니다.”

메리쉬가 바랐던 대로 베를리아의 입가에 산뜻한 미소가 내걸렸다. 이것으로 황태자가 하려 했던 수작 따위 무의미해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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