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당신이 싫었던 이유(4)
그러나 기껏 리리카의 의도대로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던 그녀에게 들려온 건 힘 빠지는 한 마디였다.
“나머지는 비밀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리리카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괜히 기대감을 갖게 한 그가 얄미워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리리카는 매번 그랬듯이 능청스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솔직히 제게 도움이 되었으니 베를리아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메리쉬에게는 귀족 작위를 줄 셈인가요?”
그러나 그 기분도 리리카의 말에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베를리아가 그를 돌아봤다.
에덴버의 국법상 귀족과 결혼할 수 있는 것은 귀족뿐이었다. 당장 혼인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공식적인 사이로 인식시키려면 그것만큼 적당한 게 없었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곁을 비운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결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었다. 즉, 리리카가 알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확신이 있었다. 마치 그 일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리리카가 곤란한 듯 눈을 데구르르 굴리면서 다른 소리를 했다.
“황태자가 가만히 있겠어요?”
나란히 걷던 베를리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물론, 이 에덴버의 귀족이라면 베를리아와 카를로스 사이의 관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리리카는 지금까지 도망 다니던 신관의 사생아였다. 누가 그에게 협조하고 있지라도 않은 이상 이런 사실들을 어찌 안단 말인가.
“…그, 베를리아 양?”
리리카가 잔뜩 굳은 채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무형의 기운이 자신의 목을 감싸고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 자리에서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죽으리라는 사실을.
“누가 당신과 손을 잡고 있죠?”
이상하기는 했다. 버려진 사생아. 그런 자가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것만 봐도 단순히 운이라기에는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없다고 해도 안 믿으시겠죠?”
“뭘 당연한 걸 물어요?”
눈앞에 드리운 위협에도 리리카는 웃고 있었다. 그게 기가 막혀서 베를리아가 그를 타박했다.
“지금 뭐가 좋다고 웃어요. 내가 당신 위협하고 있는데.”
“그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마치 정말 모르겠는 사람처럼 물어 오는 리리카에 당황한 건 베를리아였다. 분명 그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분위기는 우습게 되어 버렸다.
이 남자는 정말 이상한 면이 있었다. 한결같이.
“적어도 이런 때는 웃는 거 아니에요. 인간 얼굴이 무슨 가면도 아니고.”
그가 순간 손을 들어 올려 제 입꼬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찰나에 그녀는 봐 버렸다. 웃고 있지 않은 그 얼굴이 어떤지를.
“리리카는 그냥 웃는 게 낫겠네요.”
베를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웃음 뒤의 그 얼굴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생글생글 미소한 리리카가 답했다.
“그렇죠?”
“다른 말 말고 내 말에 답이나 해요.”
“지금은 알려 줄 수 없어요, 다만.”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흘러나온 대답에 무형의 기운을 다루던 베를리아의 손에 힘이 풀려 버렸다.
“난 앞으로도 베를리아 양의 편이에요. 당신 안의 무엇이 달라졌든.”
자유로워진 남자는 여전히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이 그녀를 마주하며 웃고 있었다.
***
돌아오던 길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조용했다. 리리카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녀가 말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 또한 입을 다문 것이리라.
리리카는 여러모로 베를리아에게 있어서 변수였다. 원작이 만들어 내지 않은 캐릭터, 그녀가 모르는, 어쩌면 그녀에 대해 알고 있을 상대.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베릴.”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뒤에서 그녀를 안아왔다. 베를리아가 그 익숙해진 품에 기대며 위를 올려다봤다.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
“빨리 보고 싶어서요.”
막 돌아온 메리쉬에게서는 밤바람의 향이 났다. 복잡한 머릿속을 익숙한 온기가 진정시켰다.
“어려운 것도 없었고요.”
므시아는 사실 온갖 차명으로 소유한 영지가 많았다. 이 나라는 썩어 있었다. 돈과 힘이 있으니 범죄 조직이 영지를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을 만큼.
도리어 이런 나라의 주축인 신전에서 어떻게 안젤라 같은 성녀가 나왔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황제와 귀족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한 짓을 묵과해 주고 아닌 척하기 일쑤였다. 세금을 멋대로 올린 것은 허다했고 나라의 영지들도 그렇게 상당수가 팔려 나갔다.
그런 것들을 므시아가 사들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한 까닭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메리쉬는 그 영지 중 하나에 가서 그가 귀족이 되기 위한 명분만 적당히 준비하면 되었다. 메리쉬의 말대로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사실 다른 것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조심해요, 베를리아 양.’
저택으로 돌아와 방으로 가기 전 막 꺼냈던 리리카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한 경고에 관해 설명해 주지 않은 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베를리아는 리리카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를 나눠봐야 제 페이스대로 끌고 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편이라던 그 말을 모두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베를리아가 아무리 우습게 여겨도 카를로스 에덴버는 원작의 주인공이며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
므시아의 그림자들은 본디 신분조차 없던 이들이었다. 그래야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추적하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네멘 리들턴을 죽인 후 베를리아 리들턴은 메리쉬에게 신분을 주려 했으나 그가 거부했다. 귀족이 된다는 건 명확한 신분이 생기는 것과 더불어 황족을 받들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이전처럼 황태자에게 검을 들이댈 수도 없었고 어쩌면 그가 부당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받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베를리아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멜, 차라리 네가 황제 할래?”
그녀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름뿐인 권력이라도 권력은 권력이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있으니까. 그조차 빼앗아 버릴까, 잠깐의 충동이 들었다.
“베릴은 원하지 않잖아요.”
“…맞아, 그런 거 딱히 필요 없어.”
메리쉬가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려다보며 말했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돈 많고 힘 있고 능력 있고 연인도 있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기 충분한 인생이었다.
게다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머릿속에는 황태자의 집무실도 들어 있었다. 거기에 쌓여 있는 서류의 산이 얼마던가. 그녀는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원작의 주인공답게 그런 쪽으로는 탁월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러했다. 황제는 이 나라의 정점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그녀에게는 딱히 가치가 없었다. 그랬으니 베를리아는 굳이 일거리를 떠맡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 하나로 인해 자신을 끝나지 않을 서류 지옥으로 밀어 넣기에는 제 생이 아깝지 않은가.
‘자고로 인생은 놀고먹는 게 최고지.’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앞으로 취해 올 행동은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원하지도 않는 길을 택하기는 싫었다.
“괜찮아요, 베릴.”
그가 오늘따라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의 뺨을 감싸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눈꼬리를 휘어 웃은 메리쉬가 낮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만 하면 돼요.”
사락사락, 그대로 타고 올라가니 굵은 손가락에 걸리는 것 없이 미끄러지는 암녹색 머리칼의 느낌이 좋았다. 메리쉬의 손이 다정하게 베를리아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베릴이 원하는 것 속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달래는 듯한 목소리는 욕망을 담은 목소리로 손쉽게 탈바꿈한다. 그 다정하면서도 은밀한 목소리에 다른 생각을 날려 버린 베를리아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건 너야.”
입술이 겹쳐지자 그녀는 곧 고민을 훌훌 털어 버렸다. 맞닿는 온기는 선명하고 먼 거리에 있을 것만 같은 상념은 희미해졌다.
그래, 그녀에게는 권력도, 재력도, 능력도 있었다. 그러니 하지 못할 것이 뭐 있다고 미리 걱정하겠는가.
방해하면 전력을 다해서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
오늘의 안건은 당연하게도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전염병에 관한 것이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발생한 전염병이니만큼 그 사안이 중대했기 때문이다.
수도는 이 넓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제국민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 다른 지역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전염병은 회의의 가장 중요한 논제였다.
물론 이 논제로 인해 회의장이 시끄러워지는 만큼 중간에 저들의 사심을 날치기로 채우려 드는 자들도 있었지만.
‘…뭐, 오늘은 나도 그걸 이용할 테니까.’
이왕 준다면 메리쉬에게 그저 그런 변방의 작은 작위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예정대로라면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와 다른 자들의 사심 채우기 사이에 메리쉬의 작위와 관련된 사안을 살짝 끼워 넣는.
그러나 회의의 시작을 알린 황태자가 곧바로 말을 꺼내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 건너 가버렸다.
“요즈음 라우드 지방이 다시 소란스럽다지.”
그곳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커다란 물줄기가 있는 라우드 유역은 에덴버와 네이르의 분쟁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번에 먼저 미간을 찌푸린 것은 그녀였다.
“젊은 귀족들에게 침입자의 토벌을 명할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개자식이….’
의도가 명확한 그 말에 아득 이를 가는 소리가 베를리아에게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