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당신이 싫었던 이유(3)
그녀는 뒤늦은 의문을 가졌다. 그녀는 꽤 오래 전부터 황태자가 싫었다. 미웠다. 그건 확실했다.
‘왜?’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하는 카를로스 에덴버의 행동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에게 공감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는 걸까? 그녀 안에 존재하는 미움은 단순히 인물의 심정에 공감해서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짙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죽을 뻔했던 건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지, 그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싫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끔찍하게.
“네가 한 행동들을 내가 언제까지 참아 주길 바랐어? 뭐, 영원한 사랑이라도 기대했니?”
카를로스의 시선은 여전히 베를리아를 향해 있었다. 그것을 느낀 그녀가 빈정거리며 빠르게 휙 돌아섰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러게, 난 왜 이렇게 네가 싫을까.’
빙의 전에 부모님의 사랑을 모두 앗아갔던 동생이 떠올라서? 늘 내게 더한 이해만 바라던 부모님에 대한 억울한 심정 때문에?
그때 알아차렸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을 미워하는데 이유가 없는 건 단순한 아집이라는 것을. 그게 아집이 아니었다는 걸.
그러나 어쩐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메리쉬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게 척 보기에도 드러났다. 마차에 함께 앉아 있는 메리쉬의 얼굴을 살피던 베를리아가 결국 조용히 그를 불렀다.
“멜.”
음울해진 녹빛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음울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가 베를리아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상하죠, 베릴.”
그녀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로 베를리아를 올려다보며 메리쉬가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왜 당신이 요즘 따라 낯설게 느껴질까요?”
그 순간 메리쉬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주던 손이 멈칫했다. 손끝이 바르르 떨리려던 것을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틈을 타 감추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베를리아가 모른 척 미소를 띠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아무렇지 않은 척 평이한 어조로 말을 건넸으나 불안감이 치달았다. 왜냐면 그녀는 메리쉬가 얼마나 베를리아 리들턴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던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제 영혼을 바칠 만큼 베를리아 리들턴밖에 모르던 메리쉬 리들턴. 그는 제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베를리아 리들턴만을 떠올렸다.
[‘당신을 증명해내고 싶었는데.’]
베를리아 리들턴의 존재가 잊히는 게 끔찍해서 그렇게라도 그녀가 존재했음을 증명해내고 싶었던 메리쉬 리들턴.
그녀가 애초에 사랑할 상대로 메리쉬를 고른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라면 절대로 베를리아 리들턴을 등지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쉽게 생각했었다. 이제 제가 베를리아 리들턴이니까.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의 감정들은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것일진대.
두려움이 물씬 몰려왔다.
그녀는 사랑이 옮겨가는 과정을 알고 있었다. 믿었던 상대일수록 그 고통이 크다는 것도.
‘믿어…?’
이제 그녀의 눈동자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자신이 생각보다 메리쉬를 믿었다는 사실을 또 이렇게 깨닫는다.
“베릴?”
베를리아는 저도 모르게 겁을 먹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하려던 말도 잊은 채로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사실은 황태자의 앞에서 나오지 말라던 그녀에게 심술이 나 던진 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지만 남들 앞에서 제멋대로 베를리아의 손목을 잡아채던 그 자를 떳떳이 나타나 제지하지 못 한다는 사실이 퍽 억울해서.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단순한 심술이니 개의치 마세요.”
전과 달리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굳이 숨기지 않는 베를리아는 성녀와 다른 느낌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것을 그녀만이 몰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메리쉬는 마치 자신만 알던 베를리아를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베를리아의 모습을 알아주지 않고 그녀를 미워하는 이들이 어리석어 보이고 분했는데.
그런데 또 이제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자신만 알고 싶어졌다.
“자꾸 사람들이 당신을 쳐다보니까 그게 싫어서.”
황태자와 성녀와 함께 서 있는 베를리아의 모습은 결코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건 옅은 색채를 가진 그들이었는데도 베를리아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허리를 곧추세운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래서 메리쉬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은 그들이 베를리아의 아름다움을 모르기를 바랐다는 걸.
‘…정말 그뿐일까?’
자신을 달래는 말에도 그녀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가 메리쉬가 정말로 진실을 알게 될까 봐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쪽, 쪽, 쪽.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을 메리쉬는 그녀를 달래듯이 눈가에, 뺨에, 입술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래도 어쩐지 여전히 그녀는 불안정해 보였다.
“베릴, 사실 제가 청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 궁금함이 조금 떠올랐다.
기이한 만족감이었다. 제 의도대로 흔들려오는 베를리아를 보는 건.
‘이제는 내가 당신한테 꽤, 중요한 사람이구나.’
죽음 앞에서도 저를 부르지 않으려고 했던 베를리아.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음습한 감정들이 덕지덕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제 당신에게 이만큼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지나치게 기꺼웠다.
“당신의 그림자를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조곤조곤, 그가 부러 말을 느릿하게 꺼내놓았다.
“…뭐?”
베를리아의 얼굴이 자동으로 굳었다. 다정한 키스들에 풀렸던 긴장이 불현듯 찾아왔다.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베릴의 뒤가 아니라 옆에 서고 싶어요.”
쪽. 달래듯 다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제야 그녀는 메리쉬가 부러 천천히 내뱉은 말 속에 짓궂은 장난기가 들어 있음을 알아챘다.
메리쉬 리들턴에 대해 그녀가 아는 건 책을 통해 읽은 것뿐이었다. 그 속에서 메리쉬는 항상 분노에 차 있었다. 그녀는 메리쉬를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아는 것은 책 속의 메리쉬 리들턴뿐이었다.
책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기에 아까부터 보란 듯 심각하지 않았던 메리쉬의 표정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 번 새겨진 인식이라는 게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벌을 주듯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메리쉬는 도리어 그대로 입술을 꾹 눌러오며 혀를 얽어 왔다.
아까와는 다른 긴장감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쌌다.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가 어디든 가보려고 하는 것처럼 막 욕망을 깨우친 메리쉬는 시시각각 무엇이든 해 보려 했고 달라졌다.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여린 살을 뭉근하게 문지르는 혀가, 어느덧 달아올라 서로를 덥히는 숨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되게 빨리 배우네.’
그녀가 멍하니 키스를 나누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메리쉬가 약하게 베를리아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
아프진 않았다. 다만 늘 유리 다루듯 행동이 조심스러웠던 메리쉬인지라 새삼 놀랐을 뿐이었다.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베릴.”
기묘하게 빛나는 녹빛 시선이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떠올린 것조차 잡아낼 정도로.
“이제는 나한테 명령도 하는 거야?”
베를리아의 눈매가 요요하게 휘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절대 모를 메리쉬의 모습이 매우 기꺼웠다.
“베릴이 원하는 만큼 해 보라고 하시길래.”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워서 마치 귓가에 속닥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 입을 맞춰서인지 습한 숨결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대로 목선을 따라 입술을 문질러 올라온 메리쉬가 미소했다. 무해한 것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었으나 그 녹색 눈동자에 탐욕이 그득그득 차 있어서 설득력은 없었다.
“갈 데까지 가 보고 싶어서요.”
메리쉬가 요요하게 눈매를 휘었다. 그녀의 웃음을 쏙 빼닮아 있었다. 타고 나기를 맹수 같은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그리 웃으니 등골을 타고 짜릿한 감각이 흘렀다.
베를리아의 검지가 메리쉬의 턱선을 따라 흘렀다. 그대로 그의 턱을 들어 올리고 마주 웃었다.
“좋아, 허락해 줄게.”
그림자를 벗어나겠다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말인지, 진득하게 얽혀드는 탐욕을 허락하겠다는 말인지 헷갈릴 법했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못 이루어 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
“메리쉬가 오늘은 따라오지 않은 모양이네요?”
어두운 밤중이었다. 계획된 바를 실행하려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리리카의 물음에 베를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리리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오늘은 그 살벌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길래요.”
그가 우물로 손을 뻗었다. 포션은 주로 신관들이 특수처리를 한 병에 신성력을 담아낸 것들이었다. 하급 포션조차도 시장가가 적지 않다. 실체가 없는 것을 머물게 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신관들은 그런 식의 신성력 운용밖에 알지 못한다. 신관 또한 나라의 재산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성력이 발현된 순간부터 신전으로 들어와 교육을 받는다.
그러니 알려 준 방법밖에 모르는 것이다. 원작에서 서술되었던 것처럼.
그러나 리리카는 달랐다. 그가 신성력을 운용하는 방법들은 무궁무진했다. 그의 신성력이 우물의 물에 스며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아는 거죠?”
베를리아가 물었다. 마시면 단번에 낫게 해 주는 포션과는 달리 신성력이 깃든 우물의 물은 마치 현대의 비타민이나 링거처럼 작용할 터였다.
특히 버텨야만 낫는 천연두 같은 경우, 면역력을 높여 주는 방식은 탁월한 효과를 불러 올 것이다. 게다가 일일이 사람들을 직접 대면해야 하고, 신관들의 체력도 고려해야 하는 치유 방법들과 달리 그런 제한도 없었다.
실제로도 그리사 왕국의 몇몇 환자들에게 실험해 본 결과 이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베를리아 양 덕에.”
“…?”
그 의문 어린 얼굴에 리리카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가 검지를 제 입가로 가져와 쉿, 하고 소리를 내며 베를리아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무언가를 말해 줄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