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39)화 (39/148)

39화. 당신이 싫었던 이유(2)


 

[모두가 황실의 명에 따라 사치를 지양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베를리아 리들턴의 옷차림만큼은 그 전과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지독하게 싫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사치스러운 베를리아 리들턴을 싫어했다. 그녀도 진짜 베를리아가 상당히 많은 것들을 누렸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소설 속 베를리아는 진짜로 그만큼 돈이 많았으니까.

[“그런다고 네가 앤지가 되지는 못해.”]

[황태자의 옆에 눈부신 모습으로 서 있는 안젤라와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온통 반짝이는 듯한 안젤라의 모습은 신이 온갖 사랑을 쏟아 부어 만든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이제 그 자랑하던 돈도 다 떨어졌나 보죠?’

‘그것 말고는 잘난 것도 없을 텐데, 어쩌나….’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매번 저딴 식으로 들으란 듯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소설 속 지문에는 없었어도 베를리아의 기억에서는 선명했다.

카를로스에게 다정한 단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제게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갔던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날 얻은 것은 수치뿐이었다.

카를로스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베를리아가 그토록 반짝이고 화려한 것들로 자신을 꾸몄던 이유를. 그게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워 제 몸집을 부풀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을 안쓰럽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진짜 베를리아는 사랑에 눈이 멀어 가장 멍청한 방법을 택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향한 비난에는 항상 정도가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남들의 비난에 스스로 계속해서 땔감을 넣어주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저 그녀는 원작 속 베를리아가 여태까지 그랬듯이, 무작정 저 비난에 입을 다물어 줄 생각 따위 없었을 뿐이다.

“이렇게 입지 않으면 고매하신 태자 전하의 황실 행정관들이 제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베를리아는 수색 권한과 더불어 이 현장의 책임자까지도 맡았다. 치유의 능력이 없는 그녀로서는 현장에 있을 일보다 일에 필요한 담당자들을 만날 일이 더 많았다.

“모두가 말하지 않던가요, 제게 있는 건 돈뿐이라고.”

그러니 그들은 범접하지 못할 재력으로라도 찍어 누를 수밖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입이 다물렸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어쩐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악을 쓰고 자신을 봐 달라 발버둥 치는 베를리아의 모습은 익숙했다. 그러나 저렇게 침착하게 자신을 적대하고 비난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미워하는 대상은 언제나 카를로스가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성녀님, 제가 방금 성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들어 주겠다 약속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문득 안젤라를 불렀다. 황태자와 베를리아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굳어 있던 안젤라가 그녀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이 있답니다.”

카를로스에게 힐끗 시선을 준 베를리아가 요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안젤라에게 말했다.

“그 누구도 아닌 성녀님, 자신이 원하는 것이어야만 해요.”

그게 베를리아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안젤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녀가 베를리아와 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부터가 처음부터 카를로스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를리아가 저런 조건을 걸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성녀님이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라면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니 속일 생각은 마세요.”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면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즉 황태자의 원을 어설프게 성녀의 것으로 둔갑시키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안젤라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불렀다.

“앤지…?”

아주 잠깐이었다. 그 찰나의 침묵에 카를로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베를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났다.

‘카를, 난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카를, 난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아.’

‘카를,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 리들턴을 증오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그녀를 믿었다는 것을. 그는 어찌 됐든 황태자의 자리까지 오른 사내였다. 멍청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베를리아가 모두 힘을 잃었다고 믿게 된 것은 그녀가 여태까지 항상 행동으로 그 믿음을 증명해왔기 때문이었다.

약소국의 왕녀를 어머니로 둔 4황자. 심지어 그 어미조차 숨을 거둬 저를 지지해 줄 사람이라고는 궁 내부에 아무도 없었던.

그렇기에 어린아이는 살아남은 게 기적일 정도로 태어날 적부터 온갖 위협에 시달렸다. 솔직히 카를로스 에덴버가 원작의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카를로스는 의심이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단 순간에 황태자와 성녀는 견고한 사랑을 이루게 된 거지?’

막상 되짚어보니 허점이 많았다. 그저 원작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에 운명 같은 사랑을 했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떤 소설에나 그렇듯이 주인공들은 그들을 흔드는 사랑의 시련을 맞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와 성녀 역시 무수한 시련을 겪고 또 그것을 이겨낸다.

[“사랑해, 앤지.”]

[“사랑해, 카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사랑을 맹세했다. 영원히 지속될 순결한 사랑의 서약. 마침내 그들은 완벽해졌다.]

원작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은 베를리아 리들턴의 죽음 이후였다.

그래야만 진짜 악역인 메리쉬 리들턴이 각성할 테니까.

‘그렇다는 건….’

지금의 카를로스 에덴버는 원작에서만큼 안젤라를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베를리아가 죽지 않음으로서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뀌어 버렸다. 원작의 이야기는 제대로 시작도 되지 않은 채.

‘시험해 볼 가치는 있지.’

베를리아가 요요하게 웃음 지었다. 자꾸만 알짱거려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저 황태자의 얼굴을 구겨 줄 생각을 하니 또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싫어하는 놈을 엿 먹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성녀님이 원하는 걸 말하세요.”

그녀가 완전히 안젤라의 쪽으로 몸을 돌린 채 확정 짓듯이 말을 꺼냈다. 카를로스의 눈가가 파들거렸다. 그가 일순 무언가를 참지 못하겠는 듯 휙 베를리아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카를…!”

휙 베를리아의 손목을 낚아챈 카를로스가 그녀를 억센 힘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낮지 않은 굽을 신고 있던 베를리아는 휘청거리다 거친 바닥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그는 배려 하나 없이 그녀를 끌고 갔다. 순간 한구석에서 살기가 일었다. 그것을 베를리아가 눈짓으로 잠재웠다.

뒤로 안젤라가 놀란 얼굴로 카를로스와 베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참 쉽게 간과하고는 한다. 뒤에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를.

***

탁!

안젤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베를리아가 곧바로 카를로스의 손을 쳐냈다. 그러나 이미 억센 힘에 붙잡혀 온 손목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외부의 충격에 약한 그녀의 몸을 생각하면 멍이 들 것이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 때문에 손목에 멍들게 생겼잖아.”

카를로스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베를리아가 말을 잘라냈다. 그녀가 그의 앞에 적나라하게 빨개진 손목을 들이밀었다.

“한 번 다치면 잘 낫지도 않는데 너 때문에 또 내가 다쳐야 해?”

베를리아가 틈을 주지 않고 그를 쏘아붙였다. 그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신경질적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를 막 다루는 것은 습관적인 일이었다.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한 번 인식이 그렇게 박히고 나면 두 번 그렇게 행동하는 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녀의 오른팔을 타고 붉은 낙인이 흉흉하게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베를리아의 팔에는 열이 올랐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네멘 리들턴이 아꼈던 아이, 즉 실험체였던 만큼 외부에 드러나는 흉터는 없었다. 단 그가 남긴 ‘벌’이 존재할 뿐.

“이거 너 때문에 생긴 거야. 이것뿐이게? 여기도, 여기도.”

몸 곳곳에 붉은 낙인들이 타오른다. 그건 베를리아 리들턴이 카를로스 에덴버를 지키겠답시고 네멘 리들턴의 명을 거역한 대가였다.

“최소한의 양심은 좀 가지는 게 어때? 네가 감히 날 다치게 해?”

처음으로 온전히 카를로스의 입이 다물렸다. 황태자인 그가 금지된 저주의 낙인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 에덴버가 뻔뻔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리아 리들턴이 괜찮은 척 하며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 텐데.

“…다음부터는 이럴 일 없도록 하지.”

카를로스가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간과해 왔던 사실을 상기한 까닭이었다.

제가 누구 덕에 살아남았는지를. 그걸 새삼스럽게 인지하자 베를리아를 보고 있는 게 불편해졌다.

“다음에 또 너랑 마주하자고? 됐으니까 할 말이나 해.”

그녀의 날 선 말에 뚫어져라 베를리아를 바라보던 황태자가 물었다.

“넌 대체 나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카를로스 에덴버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감정이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말에 베를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황태자는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기가 찼다.

“…너 참 뻔뻔하구나?”

한숨을 푹 내쉰 베를리아가 말했다. 이제야 궁금해진 거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첫날 그에게 그렇게 행동했을 때 물었어야 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에 관해서는 딱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는 반증 같아서 기분이 불쾌해졌다.

‘정말 이것도 재주지.’

그녀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마주하기만 해도 속을 뒤틀어 놓는 게 그것도 재주라면 이토록 뛰어날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곧바로 질문을 바꾸어 다시 말을 꺼냈다.

“어떻게 감정이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뀔 수 있었냐고 묻는 거다.”

베를리아가 멈칫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방금까지도 멀쩡히 대화하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욕지거리하며 태도를 싹 바꾼 셈이니까.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녀는 카를로스 에덴버의 마음까지 고려해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와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이 순전히 본인이 궁금해서 묻고 있는 저 뻔뻔함을 상대로는 더더욱.

“그걸 내가 굳이 설명해야 해?”

“이상하지 않나.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미움이 그렇게 한순간에 생길 수 있다는 게.”

“누가 한순간이래?”

그녀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대로 황태자를 무저갱으로 끌고 내려갈 것처럼 음습했다.

카를로스의 말에 대한 반박은 그녀의 생각을 거치고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말을 꺼내는 순간 마치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툭 튀어 나갔다.

“그러면 네가 원래부터 나를 미워했다고?”

“그래, 난 네가 원래부터….”

그녀의 행동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래, 그녀는 원래부터 카를로스 에덴버가 미웠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되기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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