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당신이 싫었던 이유(1)
절망을 보았다. 이미 늦은 후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울지 마, 베릴.’
저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는 있어도 그 눈물을 그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나는 어차피 네가 아니었다면 쫓기다가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가. 내 숨은 마지막까지도 너를 위해 바쳐져야 마땅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되돌려 줄게.’
내가 네 행복이 될 수 없다면, 너를 위한 연결로라도 되고 싶어. 행복으로 향하는 예정된 문을 알려줄 길잡이라도.
그게 내가 검에게 바란 단 하나의 염원이었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별다른 치료 방법은 없었어요.”
베를리아의 명령에 따라 리리카는 그녀가 붙여 준 마법사와 함께 그리사 왕국에 다녀온 참이었다. 그의 말에 그녀가 침음을 삼켰다.
하긴, 현대에서도 천연두의 예방법은 있었지만 특별한 치료제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나을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는.
‘신관들한테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나….’
곤란한 일이었다. 천연두 자체가 워낙 감염성이 높은 질병이었기에 신관들도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성력으로 무조건 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병의 차도에 따라서 몇 번의 치료를 더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은 찾았어요.”
베를리아의 곤란하다는 표정을 바라본 리리카가 해맑게 말했다. 매우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것부터 진즉에 말했으면 될 일 아닙니까.”
메리쉬가 불만스럽게 말을 꺼냈다. 생글생글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리리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말 안 하면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베를리아 양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 거 같아서요.”
그 말에 메리쉬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걱정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던 사내치고는 하는 행동들이 죄 탐탁지 않았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지긋이 리리카를 향했다.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고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에도 없는 남자. 그런데 하는 행동은 분명히 그녀를 향한 호감 그 이상의 것을 보이는 남자.
“리리카, 선을 넘으면 곤란해요.”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와 침착하고 우아한 동작. 담담한 시선이 그에게 경고했다. 리리카의 호감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메리쉬가 그것을 불편해 한다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막는 게 당연했다.
순간 늘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던 남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광대처럼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그 한마디에 한순간에 추락했다.
“…잘못했어요, 베를리아 양.”
그건 아주 찰나였다. 곧 아무렇지 않게 다시 미소 지은 남자는 두 손을 들며 메리쉬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 보였다.
“자꾸 반응하니까, 괜히 놀리고 싶어서 심술을 부렸어요. 미안합니다.”
깔끔한 태도였다. 그 뒤로 베를리아는 리리카에게서 정도 이상의 호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베를리아에게 보였던 감정들이 오히려 연극이었던 것처럼. 기이한 남자였다.
어쨌든 베를리아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당장에 리리카를 내칠 수는 없었다. 메리쉬는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리리카가 내놓은 대비책은 꽤 쓸 만했다. 다만 그 방법은 신성력을 다른 방식으로 다를 줄 아는 그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리리카도 무한정으로 신성력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좋아요, 그러면 그렇게 하죠. 비밀리에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해 둘게요.”
리리카의 존재 자체는 아직 외부에 비밀이었다. 대비가 필요했다. 에루아트의 유산들을 찢어 먹은 자들은 신관 중에서도 권력자들에 속했다. 그러니 뼛속까지 먹히지 않으려면 조심해야만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베를리아와 메리쉬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자리를 뜨는 두 사람의 모습이 지독하게도 잘 어울렸다.
***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상황을 직접 목격한 안젤라가 직접적으로 신관들의 현장 투입에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요한 신관은 저쪽으로 가세요.”
“마리아 신관은 이쪽부터 맡아 주세요.”
소설에서 서술되었듯이 치료받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를 자주 다녔다는 설정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듯 안젤라는 이 복잡한 현장에서 꽤 능숙하게 신관들을 다루고 있었다.
확실히 안젤라가 신관들을 불러들인 이후로 전염병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마치 허투루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짜증 나는 원작 같으니.’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안젤라와의 거래를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제 좋을 대로 하고 나중 일은 나 몰라라 하는 카를로스 에덴버 식의 일 처리는 질색이다.
“잠깐 나 좀 봐요, 성녀님.”
혀를 찬 베를리아가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베를리아의 능력은 치유 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는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신 물적 자원들은 모두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어쨌든 여기서 가장 바쁜 건 안젤라였다는 뜻이다. 이제야 한숨 돌리는 듯했다. 그랬으니 이전까지는 말 걸 틈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뭐에요?”
베를리아가 물었다. 저쪽은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있었다. 성녀의 이마에 바쁘게 뛰어다닌 흔적으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겨우 카를로스 에덴버 따위가 무어라고. 괜히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아 눌렀다.
“…네?”
베를리아의 말에 안젤라가 멍하니 반문했다. 마치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베를리아가 한 번 더 설명했다.
“난 성녀님이 말한 대로 그 권한을 이용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내가 당신의 말을 들어 줄 차례 아니던가요?”
므시아는 에덴버 내 최악의 범죄 집단이었다. 그런 이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안젤라가 신전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성녀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들이 이런 식으로 신관들을 투입했더라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안젤라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을 유지하더니 말을 꺼냈다.
“저는 아직 리들턴 백작님과 아무 거래도 하지 않았어요.”
그건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원작은 분명히 베를리아로부터 주인공들을 도와주게 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터트린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게 순수한 호의라는 말인가요?”
베를리아는 제 의구심을 참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순수한 호의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노골적으로 황태자를 등지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호의도 아니에요.”
안젤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베를리아의 표정에 의아함이 가득 서렸다.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성녀의 얼굴에는 오직 긍지만이 존재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안젤라 애거스틴의 긍지였다.
“저는 에덴버의 성녀이고 내 나라의 백성들을 구했어요. 그런 것으로 제가 왜 리들턴 백작님에게 대가를 받겠어요?”
그녀는 나고 자라는 매 순간을 성녀로 살아왔다. 헌신과 봉사는 그녀에게 숨 쉬듯 익숙했다. 안젤라 애거스틴은 성녀의 삶에 짜 맞춘 듯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능력이 있다고 모두가 옳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안젤라 애거스틴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회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신이 그냥 여주인공이어서 싫었던 것일지도도 모르겠다는. 대다수가 주인공의 반대편에 서 있는 캐릭터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좋아요, 이번에는 내가 졌어요.”
그녀는 자신의 오만을 인정했다. 사람은 한 면만 보이는 2차원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안젤라 애거스틴이 지독하게 밉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좋아할 구석을 찾지 못했으니까.
온실 속의 화초. 안젤라에 대한 첫 인상은 그랬다. 그래서 당신이 빛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너무 쉽게 간과했다. 누구나 스스로의 빛을 갖고 있다는 것을.
“…무슨 말씀이시죠?”
안젤라는 스스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므시아의 사람들이 베를리아에게 중요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녀는 그것을 갚아 줄 능력이 있었다.
모른 척 싹 입 닦아 버리기에는 찜찜할 만큼의 양심도.
“성녀님이 원하는 것을 들어 줄게요, 단….”
“제국의 작은 태양,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베를리아의 말이 묻힐 만큼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로 들어오는 소란스러운 인사말들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왔어, 카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이 안젤라가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이 상황이 못마땅한 것은 오직 베를리아뿐인 것처럼. 안젤라를 본 카를로스가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네 몸 좀 챙겨가면서 하라니까, 앤지.”
안젤라는 움직이기 편한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병자들 사이를 돌아다닌 까닭에 꽤 지저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특유의 분위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환한 햇살 아래 빛나는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처럼, 그들의 들러리가 될 생각 따위 없었다.
“태자 전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고아한 목소리가 안젤라와 카를로스 사이를 갈라놓았다. 황태자도 최대한 간편한 옷을 입은 터라 격식 있는 옷을 갖춰 입은 베를리아는 그들과 더욱 대조되어 보였다.
“하여간 저 여자는 이런 곳에서까지….”
아까는 없던 수군거림이 들려 왔다. 이건 전적으로 카를로스가 만들어낸 분위기였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껏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곱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력이 부족할 듯해서.”
황태자의 말대로 황궁에서 나온 의원들이 황태자의 뒤로 대기하고 서 있었다. 확실히 버티는 방법밖에 없는 천연두는 이런 간호가 필요했다.
“그러면 사람만 보내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러나 베를리아는 냉정하게 황태자를 책했다. 그녀가 주변을 쭉 둘러보더니 다시 시선을 카를로스에게로 돌렸다.
“태자 전하께서 오신 덕분에 일하던 모든 이들이 이렇게 멈춰 서 있군요.”
아무리 암행을 나온다 한들 여기에 있는 신관들은 애초에 황태자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성녀에게까지 미리 알렸던 듯했다. 한심했다. 두 사람이 함께하면 시선이 몰릴 것은 뻔하지 않은가.
“…너는, 호의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건가?”
제 등장이 달갑지 않은 듯한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호의라면 호의였다. 어찌 됐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내 사람들이 걸린 일에 1분 1초가 중요한데 이런 식의 시간 낭비가 어찌 달가울까요?”
아직도 멈춰 있는 이들을 향해 베를리아가 날카로운 시선을 빛냈다. 그제야 주춤한 이들이 다시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날 선 말에 카를로스가 여전히 찌푸려진 얼굴로 함께 날을 세우고 덤벼들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차려입을 시간은 있었군?”
[“많은 이들이 가뭄으로 굶고 있는데 너는 항상 너 자신밖에 치장할 줄 모르는군.”]
익숙한 비난이었다. 이유는 묻지 않는, 그저 그런 여자이기에 그랬으리라는 것을 못 박아 둔 채 내리꽂히는 비난. 그럴 때마다 ‘진짜’ 베를리아는 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리라. 그녀가 삐뚠 웃음을 머금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하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아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