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7)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자리와 중앙의원석 사이에 놓인 단상에 서류를 쭉 늘어놓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곳에는 죽은 자의 신상 명세와 그녀의 말을 뒷받침할 증거들이 죄 적혀 있었다.
원작은 바란다. 주인공들이 행복하기를. 그래서 별거 아닌 단역들을 움직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러니 당신들이 무엇으로 인해 움직였든지 상관없었다.
“태자 전하.”
귀족들을 한 번 쭉 훑어본 베를리아가 뒤돌아서 카를로스를 마주했다.
“감히 제국 백성들의 목숨을 고의로 위협한 파렴치한 만행에 대한 수사권을 제게 주시길 요청합니다.”
그들이 원작에 의해 움직인다면, 감히 원작조차 움직일 수 없게 제가 그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되리라.
***
“아무리 그래도, 베를리아 너에게 곧바로 수사권을 줄 수는….”
회의가 끝난 후 베를리아를 따로 불러들인 황태자가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서렸다.
“누가 네 허락이 필요하댔어?”
베를리아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그것을 갈취할 생각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생각이나 사정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베를리아 리들턴.”
“짜증나니까 네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녀의 신경은 온통 곤두서 있었다. 빌어먹을 원작 때문에 저 인간을 진짜로 도와줘야 할 지경이었으니 짜증이 안 날 수가.
“…대체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반응하는 거지?”
카를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기가 차는 일이다. 이래서 저 새끼는 개자식이었다.
개가 짖는데 인간이 같이 짖으랴. 베를리아가 본 회의에서는 꺼내 놓지 않았던 또 다른 서류를 황태자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네가 내놓을래, 내가 잡아 족칠까?”
시트론 백작가. 황태자를 지지하는 쪽에 새로 편입된 귀족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마침 카를로스 또래의 미혼 여식을 두고 있었다.
황태자비를 간택하는 문제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건국제에 연이어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인해 인력난에 시달리는 까닭이었다.
많은 황녀와 황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따르던 귀족들도 대거 물갈이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연인이 있다고 했음에도 귀족들의 견제에 불을 붙인 건 건국 연회 날, 베를리아를 향해 보인 황태자의 태도였다.
“만약 내가 네게 수색권을 주면?”
왜 제가 싫으냐고 방금 물었으면서도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서 호의를 살 행동이라고는 보이질 않는다. 물론 사형될 뻔한 이후 내내 황태자를 적대해 온 베를리아에게 다짜고짜 수사권을 내줄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확실한 사항은 아니나, 만약 시트론 백작가가 이번 일의 배후가 맞다면 황태자는 이후에 곤란해질 게 뻔했다. 제 세력을 지키지 못한 대가로 새로운 이들의 영입이 더욱 어려워질 테니까.
‘쪼잔한 놈, 베를리아 리들턴이 자기한테 해 준 게 얼만데.’
그러나 이미 카를로스 에덴버 자체가 아니꼬운 입장에서는 뭔들 눈에 찰 것인가.
“뜯어내는 선에서 그쳐 줄게.”
원래의 베를리아였다면 감히 제 것을 건드린 대가로 바닥까지 처박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꽤 물러선 셈이었다.
그건 카를로스로서도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애초에 그는 귀족들 중 황태자비를 맞아들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베를리아가 그들의 힘을 빼놓는다면 황태자로서도 후에 그들을 제 입맛대로 다루기 더 쉬워질 터였다.
“…그것으로 너는 충분한가?”
사실상 여기서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끝이었다. 카를로스는 자기 손해를 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부족하다고 하면, 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있고?”
그것을 아는 그녀가 다시 비웃음을 띄웠다. 그 알량한 마음의 출처가 어디든 거기에 부응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한테 기대 같은 거 안 하니까 하라는 거나 해.”
베를리아가 뒤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굉장히 굳건해 보였다. 카를로스는 그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눈에 담았다. 언젠가는 그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 적도 있었다.
“베릴.”
우뚝.
베를리아가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딱히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때는 이게 본디 베를리아 리들턴의 몸이라는 사실이 와 닿는다, 불쾌하게도.
“만약 내가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너는 내게 돌아올 건가?”
[“네가 필요해, 베릴.”]
[‘…를.’]
들릴락 말락 제 주장을 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이제는 알았다. 기억은 때로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괴물이 되고는 한다.
이제야 알았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괴물이었다. 추억에 기대어 베를리아 리들턴을 잡아먹어 온.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멘 리들턴의 실험체가 아닌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모든 기억은 카를로스 에덴버가 하나같이 기워 온 것들이었다.
‘제발 저를 미치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괴물에 잡아먹힌 것은 너였다, 베를리아 리들턴. 나를 이곳에 베를리아 리들턴으로 있게 하는 것은 너의 괴물이 아니었다.
“난 네가 필요하지 않아, 카를로스 에덴버.”
필요에 의한 관계라는 것은 등가교환이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줄 수 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그 하나뿐이었다.
때와 상대에 따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건네기 만만할 그것.
그 쉬운 것도 못 했던 네가 어려워진 지금에 와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베릴, 손 주세요.”
그녀가 마차에 오르자마자 메리쉬가 입을 열었다. 얌전히 두 손을 건네니 그 위로 포션이 쏟아 부어졌다.
“그런 건 시종들 시키시지.”
그런 병마는 베를리아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메리쉬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병에 걸린 자의 시체를 그녀가 직접 만졌다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메리쉬는 늘 베를리아와 관련되기만 하면 이런 식이었다. 그의 태도는 과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이렇게 한결같은 메리쉬의 모습이 좋았다.
“음…. 빨리 끝나야 빨리 너랑 단둘이 있지.”
기다리는 동안 메리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전전긍긍했을 게 뻔했다. 그래서 베를리아가 짐짓 애교스럽게 말을 건넸다. 미약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그것만으로도 쉽게 풀려 버렸다.
그녀는 쉬운 사랑이 좋았다. 쉽고 가볍지 않은 사랑.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눈앞의 남자는 지독히도 완벽했다.
“걱정하지 마, 멜.”
베를리아의 입술이 메리쉬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쪽. 숨결처럼 가볍고 또 선명한 온기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네가 언제든 마음껏 내게 미칠 수 있게.”
한껏 사랑스러운 것을 향한 손길이 메리쉬의 뺨을 감싸왔다. 제게로 끌어당겨 속삭이는 목소리는 한없이 달콤했다.
“언제든 네 곁에 존재할 테니.”
녹빛 시선이 빤히 베를리아를 향했다. 그의 손이 제 뺨을 감싼 베를리아의 손 위로 겹쳐졌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메리쉬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마차 안에 순식간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이미 그 작은 행동만으로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의 숨결이 서로를 간지럽혔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닿고자 했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바닥과 제 손바닥을 맞대어 깊숙이, 깊숙이 손가락을 얽어왔다.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하나만 말해 주세요, 베릴.”
“무엇을?”
메리쉬가 잠시 침묵했다. 마치 꺼내기 어려운 말인 것처럼. 그러나 그 잠깐의 침묵을 다른 이가 파고들었다.
똑똑똑.
마차 문을 통해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를리아 양.”
어느덧 마차는 저택에 도착해 멈춰 있었다. 그저 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몰랐을 뿐. 마차의 문이 열리자 그 앞에서 리리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메리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게 생긴 그의 눈에 살기가 등등했다. 그것을 모른 척하며 리리카가 말을 이었다.
“베를리아 양께서 제게 말씀하셨던 것을 찾아냈답니다.”
리리카의 말에 베를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를 시험해 보고자 한 일이었으나 이렇게까지 빠르게 답을 가져올 줄은 생각지 않았다. 의외의 수확이었다.
“전 괜찮아요.”
베를리아가 메리쉬와 완전히 시선을 마주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대답을 내놓았다. 한참 베를리아와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음에도 양보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에게 그녀를 기다리는 일이야 무엇이 어려우랴.
그러나 눈앞의 거슬리는 상대를 그저 참고 넘어갈 만큼 메리쉬가 또 고운 성미는 아니었다. 그의 두 팔이 느릿하게 베를리아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만약 그녀가 이러한 과시가 싫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만큼.
그 집착적이면서도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속내가 꽤 귀여워서 베를리아는 메리쉬의 팔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하던 걸 마저 밤에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요.”
그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누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메리쉬는 리리카 에루아트가 거슬렸다. 베를리아는 그녀가 보고 있는 곳 외에는 무심하고 둔한 경향이 사실 강했다. 그러니 저 사내를 참아 주는 것뿐이었다. 베를리아가 미소 지었다.
“너에게만 허락된 것인데, 새삼스럽긴.”
메리쉬는 원래부터가 질투심이 강했다. 함께 밤을 보내고 나서부터는 재스민이 베를리아의 시중을 드느라 두 사람의 공간에 끼어드는 것조차 싫어했으니 리리카는 오죽하랴. 그것을 상기하며 베를리아가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제야 만족한 짐승이 배부른 얼굴을 하고 떨어졌다. 쪽. 그 와중에도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음험한 속내를 담은 애교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들어갈까요.”
마차에서 내린 베를리아가 우아하게 저택 안으로 걸음 했다. 그 모습을 쫓는 리리카의 시선을 메리쉬가 부러 제 몸으로 가리며 그를 견제했다.
뒤돌아본 메리쉬의 시선이 선명하게 리리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에 리리카가 능청스레 미소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입 모양으로 전해진 그 말에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차라리 그냥 꺼져 주는 게 명답이었다.
휙 돌아선 메리쉬와 베를리아의 뒷모습을 리리카가 번갈아 바라봤다. 그가 바라는 것은 결국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