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6)
“흠흠, 내가, 그, 언제…!”
베를리아가 그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상대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신전은 마녀를 부정했다. 사특한 흑마법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마녀사냥은 존재했다. 썩 우스운 일이었다.
베를리아가 싸한 미소를 머금고는 좌중을 쭉 둘러봤다. 사실 어느 정도 예측하던 바였다. 이자들이 므시아의 지역에서 전염병이 터진 사실에 안도하고 있으리라는 건.
그렇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그들이 아무리 베를리아를 견제하고 싶었다 한들 지금 죽어 나가는 이들 또한 산목숨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소.”
넬리 자작이 말을 꺼냈다. 베를리아의 서늘한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자작의 딸 엠마 넬리는 황태자측의 황태자비 후보였지.’
베를리아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저들은 정말 그녀만 없으면 엠마 넬리가 황태자비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엠마 넬리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황태자 측에 나쁠 것은 없었다. 황태자비를 핑계로 자작가에 불과한 넬리 가문을 키워 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비의 외척이 자작가에 불과하니 성녀를 다시 황태자비로 내세우고자 한다면 내치기도 쉽지.’
여러모로 이용하기 좋을 터였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미 실패한 수를 또 가지고 올 만큼 카를로스가 멍청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묵인할 수는 있지.’
베를리아가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카를로스의 의도가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황태자의 쪽으로는 시선 한 자락 던지지 않았다. 그 의중을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만약 제가 마녀라면.”
베를리아 리들턴이 되기로 했더니 진짜로 동화되기라도 했나, 눈앞의 작태에 진심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그녀를 건드린 것에? 아니, 자신 하나를 이기자고 레밀튼의 수많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것에.
“제가 마녀가 아니라고 증명한 신전 또한 이단이 되는 것이겠군요.”
“그 무슨, 그런 비약을…!”
은근히 베를리아를 견제하던 이들부터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이들까지 모두 사색이 되었다. 신전이 이단이겠는가, 감히 신전을 이단이라 하는 자들이 이단이겠는가.
신권과 황권이 동등한 이 나라에서 이단으로 몰리면 살아 나오기는커녕 죽음조차 평온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마녀재판에 회부되어 살아 나온 건 저 베를리아 리들턴이 유일했다.
“그만. 그 문제는 고발한 이를 무고죄로 벌함으로써 결론 난 일이 아니던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카를로스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결국, 카를로스 에덴버는 타피나 남작가를 버려야만 했다. 신전이 이미 정한 결과에는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벌써부터 신전과 등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기묘한 침묵이 돌았다. 넬리 자작가를 필두로 한 황태자파가 베를리아를 이길 만한 명확한 패를 가졌다면 몰랐다. 그러나 베를리아에게는 신전이라는 방패가 있었다.
게다가 전처럼 여론으로 베를리아를 몰아가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본디 평민임에도 백작이 되어 중앙 의원에 발을 디딘 베를리아는 이제 공공의 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귀족파의 수장인 아를레나 공작과 손을 잡았으니 그 또한 이제는 무의미했다.
황태자로써는 이 주제가 계속 언급되어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일부러 타피나 남작가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남작가가 누구의 명으로 베를리아 리들턴을 고발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버려졌는지.
베를리아의 시선이 그 침묵 속에서 좌중을 면밀하게 살폈다. 삐뚠 미소가 입가에 내걸렸다.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짐작이 간 까닭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다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베를리아가 연극배우 같은 말투로 말을 꺼냈다. 당장이라도 제게 그런 말을 지껄인 자들을 밟아 버릴 것 같았던 그녀의 기세가 갑자기 수그러들자 다들 의아한 표정이었다.
특히나 그녀가 제 말에 동조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카를로스는 더더욱.
“시종, 저 자루를 열어 보게.”
베를리아가 방금 자신이 중앙에 내던졌던 것을 가리켰다. 묵직한 것이 들어 있던지, 바닥에 떨어지며 쿵 소리가 났다. 보따리 안에 담긴 게 무엇인지 순식간에 모두의 호기심이 쏠렸다.
베를리아의 명에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앙으로 다가왔다. 마법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루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히이이익!”
그리고 그것을 연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시종이 보따리를 내팽개치고 달아나듯 뒷걸음쳤다.
“쯧,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혀를 찬 베를리아가 중앙으로 직접 걸음 했다. 다시 오므려진 자루의 입구 덕에 모두의 궁금함만 커져갔다.
쑤욱.
“으아아아악!”
베를리아가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다가 지척에서 그것을 목격한 귀족들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또각또각.
모두가 토할 것 같은, 혹은 겁에 질린 얼굴로 한 걸음씩 물러난 것과 다르게 베를리아의 얼굴은 태연했다. 잘 보존된 덕분에 그것은 살아 있을 때와 별 다를 바 없었지만, 그 특유의 모습 때문에 당장이라도 악취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 베를리아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이제는 숨이 멈춰 버린 사람의 목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자리에서 오직 베를리아의 구두굽 소리만 선명했다.
기어코 황태자의 앞까지 도달하여 이를 툭 내려놓은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염병의 원인입니다.”
이 자리에서 태연한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베를리아의 몸은 외적인 상처에는 취약했으나 대부분의 병마에는 끄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멘 리들턴의 온갖 실험을 감당해 내야 했던 베를리아 리들턴의 신체는 일반인의 신체와 달리 유별난 부분이 많았다.
“…그것이, 전염병의 원인이라고?”
황태자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린 날부터 수많은 위협을 당해야 했던 카를로스 에덴버는 이곳의 곱게 자란 귀족 나리들에 비해 그래도 침착한 편이었다.
“감히 신성한 회의장에 그런 것을 들고 오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리들턴 백작!”
마침내 공황 상태에서 빠져나온 작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병에 걸리면 득달같이 신관을 불러 치료하라 야단법석을 떨어댈 치들이 거참 시끄러웠다.
“여기까지 들고 오지 않았다면 저런 것을 보러 귀하신 분들이 발걸음 하셨겠습니까?”
베를리아가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천연두로 인해 피부에 붉은 반점들과 발진이 일어난 시체의 머리는 누가 보아도 절대 곱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째서,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말인가.”
황태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베를리아의 눈에 담긴 선명한 분노를 읽어냈다.
그녀는 제 것을 건드리는 일에는 한 치의 용서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카를로스가 가장 잘 알았다. 한때 베를리아 리들턴의 가장 소중한 것이 그였으므로.
이건 누군가가 일부러 베를리아와 므시아를 노리고 한 짓이었다.
“요즘 그리사 왕국 쪽에 천연두가 유행이라지요.”
처음부터 전염병의 원인으로 사람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현대에 천연두는 사라진 질병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것에 관련된 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보통 전염병이 물, 공기, 오염된 것, 가축, 사람 등으로 인해 번진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모든 것이 상당히 철저하게 관리되는 레밀튼 지역에 전염병을 몰고 올 대상은 사람뿐이었다.
베를리아가 내놓은 사람의 머리는 마법으로 처리된 덕에 그 외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에덴버 제국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 계열의 피부색, 그에 반해 대조되는 밝은 계열의 머리칼.
그건 누가 봐도 남북에 극단적인 환경이 존재하는 그리사 왕국의 사람이었다.
“얼마 전 건국제가 열렸으니 제국에 다양한 이들이 있는 것이야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요!”
“전염병이 도는 나라의 사람이 말인가요?”
“그 전에 들어와 있었겠지!”
천연두는 여름이 몹시 건조하고, 겨울에는 여름보다 습윤하고 온난한 온대기후를 가진 그리사 왕국의 남부에서 처음 나타난 풍토병이었다. 사실 그게 제국에서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 전에 병원체를 지닌 왕국인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그 지역이 레밀튼이란 걸 밀어두고 의심스러울 건 없었다.
“그러게요, 그게 참 이상하던데.”
그러나 우연으로 상황을 가정하고 넘어가리라 생각한 건 그들이 베를리아 리들턴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뜻이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려.’]
‘감히 나를 건드려?’
므시아는 베를리아의 힘을 이루는 근원이었다. 수많은 권력을 쌓아 온 지금, 베를리아는 므시아가 없다 하여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므시아를 건드린 게 누구를 겨냥한 건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그것을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기어오른다면 두 번 다시 생각조차 못 하도록 철저히 밟아 주는 게 베를리아의 방식이었다.
“이 자가 그리사 왕국에서 출국한 시기가 건국제 이후더란 말입니다.”
만약 베를리아를 노렸다면 마냥 허술하게 굴었을 리는 없었다. 그들도 권력이 있으니 에덴버로 밀입국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곧바로 그리사 왕국으로 사람을 보냈다. 어려울 건 없었다. 리들턴에는 신관이 없어도 충분히 버틸 최상급 포션이 즐비해 있었으니까.
“알아보니 이 자는 천연두가 이미 발병한 지역에서 왔더군요.”
이미 천연두가 발병했다는 지역까지 사람을 보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천연두는 30~90%의 확률로 죽는 병이었다. 꽤 거리가 있는 왕국과 제국을 오가다 정보가 도달하기도 전에 사람이 먼저 숨을 거두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베를리아를 우습게 봤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마법사를 고용하고, 그 정도의 포션을 들이붓는 일 따위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아직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자가 제국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베를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이 자리에서 웃고 있는 자는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