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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35)화 (35/148)

35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5)


 

“그래서 무슨 거래를 원하는데요?”

안젤라를 응접실에 들인 베를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하하 호호 사이좋게 티타임을 나눌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이번 한 번만 카를을 도와주세요.”

안젤라도 알았다. 베를리아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과 카를로스가 그녀를 배신한 건 별개의 일이었다. 성녀를 죽이려 했으니 법적으로 처형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걸 지시한 게 황태자라는 건 베를리아에게 있어 다른 문제일 터였다.

“그 말, 뻔뻔하네요.”

베를리아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성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도통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안젤라는 고민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과거에 대한 용서 같은 건 베를리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그녀가 갖지 않은 것을 줄 수 있어야만 했다.

“…성녀의 권한을 원하시는 데 빌려 드리는 조건이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마침내 안젤라가 입을 열었다. 베를리아는 성력이라던가 그런 같잖은 것을 제안하면 단칼에 쳐낼 생각이었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어쨌든 지금은 리리카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안젤라가 내건 제안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 쓸 줄 알고요?”

베를리아가 다리를 꼬며 오만하게 등받이에 기대 말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안젤라가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는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어디에 쓰시든 그건 제가 감당할 일이니까요.”

“신이 내린 성녀가 사사로이 그 힘을 사용한다, 라…”

베를리아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비웃듯이 성녀를 바라봤다. 안젤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라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대체 카를로스 에덴버의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일까?

벌컥!

갑자기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침입자가 아니고서야 이 저택에 베를리아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상대는 없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상대의 존재감은 너무 익숙한 것이었다.

“메리쉬?”

베를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메리쉬와 무례함이라니, 그녀는 그와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메리쉬가 아주 드물게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의 표정에 다급함이 선명했다.

“큰일 났습니다, 베릴.”

성녀의 존재에 잠시 몸을 움찔한 메리쉬가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곧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질 일이었다.

“수도의 레밀튼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베를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

재난의 현장에 도착한 베를리아는 욕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 처먹을 원작.’

전염병은 한참 뒤에 터졌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것도 므시아의 본거지가 있는 레밀튼 지역이 아니라 이 수도에서 가장 더러운, 이름 없는 구역에서.

모든 것이 버려지는 뒷골목, 불릴 이름조차 없는 곳. 그곳의 관리 소홀로 책을 잡힐 게 두려웠던 행정 관리 책임자인 귀족이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서야 등장하는, 그런 곳.

베를리아 리들턴은 제 것에는 아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 덕에 므시아가 있는 레밀튼 지역은 평민들이 사는 지역 중에서도 꽤 부유한 편에 속했다. 레밀튼 지역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베를리아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작은 바라는 것이다, 그녀가 이 세계의 주인공들을 돕기를.

“베를리아 님…!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베를리아를 발견한 여인 하나가 그녀의 발치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처절하게 매달리는 여인은 열이 펄펄 끓는 아이 하나를 안고 있었다. 작게 피어난 붉은 반점들이 아이의 몸을 점령하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에는 보통 전조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의원까지 상주해 있는 므시아에서 갑자기 전염병이라니.

‘게다가 원작에서 발생한 것과 달라.’

원작에서 발생한 건 흑사병이었다. 더러운 설치류들이 옮기고 다니는 전염병. 딱, 버려진 그곳에 어울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연했다. 그녀는 현대 문명을 누리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전염병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스치듯이 들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사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보다 이런 것에 더 문외한이었다.

게다가 하필 이곳이 에덴버였던 까닭도 컸다. 에덴버는 신전의 뿌리, 교황청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높으신 분들은 아프면 의원보다 신관을 찾았다. 그게 훨씬 더 빠르고 확실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의학의 발달은 현저히 느렸다. 무엇이든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발전할 텐데, 그것을 쥐고 있는 자들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염병은 터지고 나면 더욱 답이 없었다.

“베릴…!”

망연해져 있는 베를리아를 부른 건 메리쉬였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현대에 살아왔다고 해서 보지도 못한 병에 대한 대처법을 모두 꿰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의사가 아니었으니까.

베를리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다른 방법을 모른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을 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성녀인 안젤라에게로 향했다.

안젤라는 몸을 떨었다. 아무리 늘 성녀로서 가엾은 백성들을 돌보아 왔다지만, 안젤라가 가는 곳은 주로 신전에 의해 선별된 곳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런 처참한 풍경을 그녀라고 보았으랴. 베를리아와 함께 굳어 있던 안젤라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신전에 연락할게요.”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해요, 성녀님.”

빌어먹을 원작. 치사한 원작. 거지 같은 원작. 그녀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저 생목숨들을 눈앞에서 그저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이곳은 마탑에서 금기하고 신전에서 적대하는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네멘 리들턴의 본거지였다. 모두가 므시아를 역대 최악의 범죄 집단이라 불렀다.

그런 므시아에 콧대 높은 신전의 양반들이 그냥 행차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녀가 직접 연락을 한다면 당연히 다를 수밖에.

베를리아가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어차피 한 번쯤은 카를로스 에덴버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더 완벽하게 그 잘난 황태자의 뒷통수를 쳐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원치 않게 원작에 멱살이 잡혀 끌려가는 건 역시 썩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

“갑자기 전염병이라니…!”

전염병은 주로 벌레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위생 관리가 힘들어지는 한여름에 터지고는 했다. 그러나 건국제가 끝난 지금 이미 날은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래서 평민들이란 불결….”

쾅!

“이런, 실례.”

모두가 아우성이었다. 모두가 당황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기에 갑자기 전염병이 터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원작의 내용을 모두 아는 베를리아조차 몰랐던 일인데.

그렇다고 한들, 뚫렸다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입을 가만히 둘만큼 그녀는 성질이 온화하지는 못했다.

서로서로 입을 모아 떠들던 모두의 시선이 베를리아가 떨어트린 묵직한 것으로 향했다. 황상의 맞은편에 디귿자 형태로 둘러싸인 중앙 의회석들의 정중앙에 떨어진 그것은 일부러 던진 것이 자명해 보였다.

“이 무슨 무례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대다수가 입을 다물었을 때 누군가 말을 꺼내왔다.

“무례라….”

“무례는 그대가 먼저 범했을 텐데.”

베를리아의 말을 먼저 끊어 내고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황태자를 향했다.

‘지금 저게 왜 내 편을 드는 거야?’

황태자의 시선이 방금 말을 꺼낸 귀족에게로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아까부터 주제도 모르고 되는대로 지껄이던 그자를 향해.

“그대들이 언제 한 번 백성들의 생태에 관심을 가진 적이나 있던가.”

카를로스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찌 제 죄를 덮으려 백성들을 불태워 죽인단 말인가!”]

카를로스 에덴버가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있어 얼마나 쓰레기였던지 간에, 그는 적어도 올바른 위정자였다는 것을.

“그들이 썩은 물을 마시든, 배를 주려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주워 먹든 관심도 없던 자들이 지금 그들을 탓해?”

황태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장내를 압도했다. 무능했던 선황의 부덕한 집권으로 인해서 나라의 이권은 온갖 이들에게 갈가리 찢겨나갔다. 수도 사업이나 구민 사업 등, 백성들이 살아감에 있어 절박한 사항들 또한 전부.

“허나 태자 전하, 천연두는 오직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만 전염되는 것이옵니다. 그들 중 문제가 없었다면….”

“그게 바로 이상한 점이지요.”

베를리아가 날카로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병에 걸린 혹은 보균자인 외부인이 갑자기 침투하지 않은 이상 천연두가 갑자기 번질 리가 없었다.

레밀튼 지역은 수도의 누구나 아는, 므시아의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 어느 누가 감히 함부로 걸음 한다는 말인가?

“혹시 마녀의 농간일지 누가 알겠는가.”

베를리아의 서늘한 시선이 그 말을 꺼낸 상대를 향했다. 그 말이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는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뱀과 같은 시선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애써 헛웃음을 감췄다.

‘이 일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래서야 그 의도가 너무 명백하지 않은가.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방금 들린 발언에 맞장구를 쳐왔다.

“마녀가 벌인 짓이라면 충분한 일이지. 게다가 그 지역이야 워낙 유별나지 않은가. 신께서 아무리 굽어 살피신들….”

이곳은 제국의 수도인 만큼 제국에서 가장 많은 신관이 존재한다. 그들이 두루 수도를 살피니 응당 수도에서는 전염병이 터지는 일이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이 터졌다.

레밀튼은 수도에 속했으나 므시아의 힘 아래 놓인 지역이었다. 즉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신의 축복조차 소용없을 그런 종자들이란 뜻이었다. 므시아를 이끄는 베를리아를 포함하여.

저 뱀과 같은 시선들은 어떻게든 여기서 베를리아를 주저앉히고 싶은 것이다. 마녀 재판을 받을 뻔했다가도 손쉽게 중앙의원석에 복귀한 그 권력이 더 커지기 전에.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테지.’

베를리아를 잡기 위해 저들은 기꺼이 레밀튼을 그 제물로 던져 버렸다. 저들 멋대로.

머리가 싸하게 식었다. 진짜 베를리아와 그녀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것을 건드리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이 된 이상 므시아는 자신의 것이었다.

“지금 제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 말입니까?”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뱀이 누구인지.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건 저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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