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4)
리리카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베를리아의 단호함에 금세 백기를 든 그가 시인했다.
“신성력으로 앞을 지키던 이들을 잠재웠어요. 잘못했어요.”
벌 서는 아이처럼 두 손을 들어 보인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눈치를 봤다. 그녀가 다쳤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서 와 보고 싶었지만 메리쉬의 기색이 워낙 살벌했었기에 다가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 마음과는 별개로 사람이 자는 사이에 그 방으로 몰래 숨어들었다는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신성력을 그런 식으로도 응용할 수 있다는 말이야…?’
한편 베를리아는 놀라 리리카를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 같은 건 원작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
베를리아가 생각하느라 말이 없자 리리카가 허리를 깊게 숙여 왔다. 그녀에게 미움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방금 나한테 한 것도요?”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의 사과보다 당장 제 궁금증이 우선이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베를리아가 물었다. 리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을 꾼 것 같길래.”
베를리아는 턱을 톡톡 두드렸다. 이건 의외의 발견이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또 통하는 모양이었다.
‘원작에서 서술되지 않은 방식이라 그런가?’
리리카의 존재는 여러모로 원작을 뒤틂으로써 일어나는 커다란 변수였다. 원작은 베를리아 리들턴의 몸을 신성력으로 치유할 수 없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방식을 바꾸니 통했다는 건 원작의 허점이 드러난 것과 같았다.
문득 메리쉬가 생각났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제 몸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치면 감각을 곤두세우고 예민해지는 그가.
어쩌면 메리쉬를 안심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리리카.”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일순 사근사근해졌다. 리리카의 몸이 움찔했다. 그로서는 들어 본 적 없는 어조였다. 그녀는 필요하다면 목소리쯤이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는 약은 면도 지니고 있었다.
“나를 도와줘야겠어요.”
“…무엇을요?”
전과 같은 단호함은 없었지만 역시 무언가를 요구하는 베를리아는 그 성격대로 당당했다. 요요하게 휘어지는 자안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리리카가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에 고정된 것처럼 굳어 선 채로 물었다.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알려 줄게요.”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리카 쪽으로 다가섰다. 침대 바로 옆에 서 있었던지라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졌다.
뒤로 물러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로 리리카가 베를리아를 내려다봤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 한 마디가 손쉽게 리리카를 묶어 놓았다. 애초에 그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말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아무도 원치 않는 자신을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필 베를리아였다. 그러니 리리카로서는 불가항력인 셈이었다.
“도와줄 거죠?”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리리카를 향해 그녀가 확인하듯이 다시 물었다.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얼마든지요.”
***
리리카를 내보내고 홀로 남은 베를리아는 자신이 꿨던 꿈을 떠올렸다. 불유쾌한 기억들을.
왜 갑자기 이런 걸 꿈으로 꿨는지 몰랐다. 그녀가 전혀 그리워한 적 없는 시절의 기억일 텐데.
‘넌 왜 그렇게 애가 너밖에 몰라?!’
분노한 목소리가 소녀의 귓가에 들려 왔다. 그건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아버지의 얼굴은 사납게 변해 있었다.
‘제가 양보하면요?’
그런 아버지의 얼굴에도 기가 죽지 않은 소녀는 곧바로 대꾸했다.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은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런 동생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번에 양보하면, 다음에는 당연하게 더 양보하라고 하실 거 아닌가요?’
소녀는 어린 날부터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제 몫은 무조건 챙겼고 더 가질 수 있으면 망설이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들었다.
그게 외동이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동생이 태어나자 문제가 되었다.
‘너, 말대꾸 그런 식으로 할 거야!’
소녀의 생각은 그랬다. 하나를 내어 주면, 둘도 내어 주어야 했다. 사람은 만족이라고는 모르는 생물이어서 둘을 내어 주면 어느덧 열을 바랐다. 그렇게 내어 주면.
‘그러면 제가 갖지 못한 건 누가 보상해 주죠?’
‘누나가 되어서 그 정도도 양보 못 해?’
‘네, 못 해요.’
소녀는 어린 아이답지 않았다. 침착하고도 되바라진 말들에 소녀의 아버지는 결국 매를 들었다. 그러나 종아리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소녀는 양보하겠노라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소녀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면, 자신의 것을 빼앗거나 줄여서 해 줄 것이 아니라 부모가 더 노력하여 새 것을 주면 될 일 아닌가.
‘그만해요, 여보! 그러다가 애 잡겠어요!’
보다 못한 소녀의 어머니가 기를 쓰고 말려서야 아버지는 던지듯이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저건 도저히 내 자식 같지가 않아!’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를 않는 소녀를 보며 질린 듯이 소녀의 아버지가 소리쳤다.
‘다음부터는 거짓말이라도 해, 응?’
‘싫어요.’
소녀의 단호한 거부에 어머니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때 도리어 어이가 없었던 건 소녀였다. 거짓말이라도 하라니. 그렇다면 다음에는 거짓말을 했다며 혼나게 될 터였다. 제 어머니는 진실로 그를 모르는 것인가.
소녀는 제 동생을 싫어했다. 언젠가는 저것이 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노리던 것들은 어느 순간 하나, 둘 당연하게 동생에게로 향했다. 정말 싫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은 사절이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어쩌면 지금의 베를리아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기억이 안 나.”
베를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꿈 속 소녀의 키는 작았다. 그녀가 소설 속 인물에게 빙의하기 전에도 현실에서 그녀는 어른이었다. 자신의 어릴 적 얼굴을 일일이 되새기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옛날 얼굴 따위야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뭐가 이렇게 찜찜하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어느 한구석이 불편했다. 베를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빙의하기 전, 내 이름이….’
똑똑똑.
베를리아가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스민이었다.
“주인님, 성녀가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한 방문자의 정체에 그녀의 상념은 그대로 잊혀져 버렸다.
***
안젤라는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베를리아의 행동이 호의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할 만큼 미워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순식간에 바뀐다는 건 사실이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카를로스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베를리아의 도움을 받는 것뿐이었다.
사랑은 사람을 손쉽게 바보로 만든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황제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성녀인 안젤라가 그에게 아쉬울 이유 따위 없었다. 그러나 사랑이 이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면 역사 속에 수많은 성군이 폭군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말 찾아가실 생각입니까?”
안젤라가 망설이는 것을 느꼈는지 곁에서 데니안이 물었다. 리들턴의 저택은 기이하게도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는 데도 도움이 필요했다.
안젤라를 바라보는 데니안의 시선은 묘했다. 그는 사랑 앞에서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다. 7황녀를 사랑했지만 결국 자신과 제 주군을 택했던 과거만 보아도 그랬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단장님.”
그의 말에 도리어 망설이던 마음을 다잡았는지 안젤라가 말했다. 신전과 황실은 늘 애매한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서로의 권력을 침범하지 않을 것. 그게 그들이 권력을 두고 공생할 수 있던 이유였다.
안젤라가 여기서 노골적으로 카를로스를 지지한다면 일시적으로 그의 발언에 힘이 실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신전에서 황태자를 견제하게 될 게 자명했다. 그건 역효과에 불과했다.
똑똑똑.
숨을 크게 들이켠 안젤라가 결연한 얼굴로 저택 대문의 도어 노크를 두들겼다. 자신을 본 베를리아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랑이 무모한 한 걸음을 나아가게 했다. 안젤라는 카를로스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서 카를로스를 마주할 수 있는 삶을 원했다.
“누구십니….”
곧 문이 열리고 저택의 하인이 나왔다. 성녀를 발견한 하인의 말이 끊기며 우뚝 멈춰 버렸다. 이 저택의 그 누구도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구에서부터 피부로 느껴졌다.
“리들턴 백작님을 뵈러 왔어요.”
애써 하인의 반응을 모른 척하며 안젤라가 말했다. 잠시 무례할 정도로 성녀를 바라보던 하인이 곧 잠시만 기다리시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찰나의 시간이, 일분일초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만약 아직도 베를리아가 그녀를 미워하고 있다면 오늘 여기서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작스레 바뀌어 버린 베를리아 리들턴. 그것 하나만 믿고 무모하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성녀께서 웬일로 제 저택을 찾으셨는지요.”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리고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직접 마중 나올 줄은 몰랐던 안젤라가 잠시 당황한 얼굴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게….”
베를리아에게는 누군가의 위에 서 있는 자들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전까지도 베를리아 리들턴은 스스로가 원하던 사랑 빼고는 애초에 부족할 것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만한 당당함까지 몸에 두르고 있으니 황제에 준하는 성녀라 할지라도 대하기가 어려웠다.
‘성녀가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베를리아는 간만에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솔직히 굳이 상대해 줄 필요야 없었지만, 그녀도 성녀가 찾아온 까닭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안젤라는 온실 속의 꽃이었다. 귀하디귀하게 길러져 자연히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자란. 그러나 그 밖으로 던져 버리면 힘없이 시들.
안젤라 애거스틴이 제 저택을 스스로의 발로 찾아올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베를리아의 시선을 애써 마주하던 안젤라가 제 치맛자락을 꼭 쥐며 말했다.
“리들턴 백작님과 거래를 하러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