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33)화 (33/148)

33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3)


 

안젤라 애거스틴이 이런 말을 꺼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또렷하게 카를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리들턴 백작님을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안젤라는 그저 벙해져 있었다. 안젤라 애거스틴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카를로스 에덴버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녀는 사랑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으니까.

탄생이 축복 그 자체인 존재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이 어떤지, 평생을 봐 왔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너는, 내게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가.

카를로스를 사랑했다. 그가 보잘 것 없던 4황자일 적에나 제국의 황태자가 된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했다.

사랑에는 기묘한 면이 있었다. 사랑을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스스로의 안에서도 그게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가 제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하고, 제 사랑으로 점점 물들어 가는 것을 보는 기쁨에 안젤라는 점점 젖어 들었다. 중독적이었다.

그녀는 신의 딸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처음이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을 나눈 존재는.

‘그렇잖아요, 왜 황태자한테 안 묻고 그걸 나한테 물어요?’

그 말이 옳았다. 안젤라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실 베를리아가 아니라 카를로스를 찾아가야만 했다는 것을.

아니, 카를로스가 먼저 와서 그녀에게 어떤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고 그녀 역시 먼저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지금까지도 황태자비 후보에 관한 일은 일단락되지 않은 채로.

비참했다.

‘이번 연회에서 성녀님께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싶던 상대는 따로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 상대는 안젤라의 기다림이 끝으로 향할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건국제의 연회에서 내 파트너가 되어 주겠어?’

카를로스를 거절했던 이유? 대단할 것 없었다. 그저 오기였을 뿐이다.

‘저런, 여기에 대체 성녀님은 어디 있나요?’

베를리아가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스스로를 잃지 않고 당당한 것을 안젤라는 처음 보았다.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은 안쓰럽지 않았다.

이전에 안젤라는 베를리아가 안쓰러웠었다. 그토록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절대 보답 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건 안젤라의 오만이기도 했다. 카를로스가, 그들이, 저를 두고 베를리아를 더 사랑할 리 없으리라는. 가장 사랑받고 살아 왔던 자의 오만.

그런데 스스로 당당한 베를리아의 앞에서 정작 작아지는 것은 누구였던가.

베를리아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제가 살아온 길이 모두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젤라는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딴 자리 따위 안 줘도 난 잘났거든.’

베를리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만큼은 달랐다. 빛이 그쪽으로 내리뻗는 느낌이었다. 온기 없는 그림자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안젤라는 자신이 못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성녀였다. 그녀는 남들을 위한 삶을 살기를 주저 하지 않았고 그녀가 받은 칭송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무조건 참아내야 할 만큼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야.’

베를리아의 말이 안젤라의 마음속 한구석을 건드렸다. 처음 해 보는, 사람 대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달콤했지만 그 사랑을 받겠다고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이번 연회에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욱하는 마음에 내뱉은 오기였다. 그런데 마침내 그 말을 꺼냈을 때, 안젤라는 깨달았다. 그 말을 꺼내도 사실 아주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자신은 사실 카를로스에게 이 말이 하고 싶었다는 걸. 아니 그보다 다른 말이 더욱 하고 싶었다는 걸.

사랑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저 지기에는 안젤라는 자신을 너무 사랑했다.

“리들턴 백작님이 필요한 거 아니야?”

안젤라가 침착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카를로스가 자신을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쉽게 떨쳐 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존재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어떤 이유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떻게 하려고?”

다시 안젤라를 바라보는 카를로스의 시선이 선명해졌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의외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안젤라의 말에 갈팡질팡했던 것이 확연히 뚜렷해졌다. 카를로스는 아직 베를리아 리들턴이 필요했다.

“너와 리들턴 백작님의 사이가 나빠진 건 나와 네가 연인이 되고 나서였지.”

베를리아 리들턴은 안젤라 애거스틴을 증오했다. 그건 싫어한다는 수준으로 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었다면 베를리아 리들턴은 제 온몸을 바쳐서라도 성녀를 저주했을 것이다.

“그때는 날 너무 싫어 하셔서, 잘 지내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고.”

그러나 베를리아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변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게 호의를 보이시니까.”

어째서 드레스를 선물로 줬는지, 그 호의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게 호의의 탈을 쓴 다른 불순한 의도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것에 기대어 최선을 다해 볼까 해.”

그래도 안젤라는 카를로스를 사랑했다. 그 의심스러운 일말의 호의에조차 기대고 싶어질 만큼.

***

“메리쉬.”

“….”

“멜?”

돌아오는 내내 마차에서 아무 말도 없던 메리쉬는 저택에 도착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드물게도 그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가 물었다.

“화났어…?”

그 말에 계속 베를리아를 비껴가던 메리쉬의 시선이 드디어 그녀에게로 되돌아왔다.

“제가 베릴을 걱정한다는 말은, 주인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나요?”

마침내 메리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시선 안에 슬픔으로 가득 차다 못해서 걱정이 흘러넘치는 것이 보였다.

“그게 아니라….”

“베릴이 일부러 다쳤다는 걸 압니다.”

메리쉬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는 베를리아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메리쉬는 범람하는 감정의 파도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평생을 그림자로 살았다. 그래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다채로운 감정들은 메리쉬를 막 걷기 시작한 아이처럼 서툴고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특히나 그의 감정이 베를리아에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베를리아의 입이 꾹 내리 닫혔다. 일부러 다친 게 맞으니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유리 조각도 모두 제거했고, 포션을 들이부은 덕분에 상처는 모두 다 나았다. 그러나 그 상처가 메리쉬에게는 아직 남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 어떤 명약도 마음에 남은 상처를 낫게 하지는 못하리라.

“저는 당신이 스스로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게 무섭습니다.”

메리쉬의 말끝이 미묘하게 떨려 왔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신관에게 곧바로 치유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기존의 포션에 흑마법을 더해야만 그녀에게 쓸모 있는 약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항시 준비되어 있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

베를리아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메리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베를리아가 다치고 나면 소용없었다. 그녀가 다치면 그는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지독한 무력감은 메리쉬를 슬프고, 화나게 만들었다.

“그랬다가 또 베릴을 잃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같이 길을 잃은, 그럼에도 오직 자신만을 향한 녹빛 시선. 그녀는 그 두 눈에 사로잡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법이 있다면 이런 걸까,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을 본 적 없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발 저를 미치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건 절박한 애원이었다. 메리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어쩌면 베를리아가 사형당할 뻔했던 그때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그제야 떠올렸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잃었던 메리쉬 리들턴이 얼마나 절망했는가를.

그녀는 자신이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고 자신했다. 원작의 내용부터 인물들의 감정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일종의 게임 치트키를 손에 쥔 셈이었다.

그래서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 초조하지도 않았다. 원작에 표현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은 여전히 그녀에게는 책 속 인물에 가까웠다.

그런데 점점 그것이 얼마나 그들을 기만한 짓이었던가를 강제로 깨닫는다. 원작에서 자신이 죽을 때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메리쉬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미안해, 잘못했어.”

이번에는 그저 웃으며 대답할 수 없었다.

***

마차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등 뒤에 푹신함이 느껴지는 것이 침대인 듯했다. 아마도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옮겨준 듯했다.

“…리아 양, …를…아 양.”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느리게 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베를리아 양, 무슨 꿈을 그렇게 험하게 꿔요.”

누군가의 손이 이마에 닿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제 앞에 있는 이를 베를리아가 똑바로 응시했다.

“리리카? 당신이 왜 여기에.”

리리카의 손에서 하얀빛이 사라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몸에는 신성력이 통하지 않을 텐데, 의아함이 일순 떠올랐다.

“이걸 전해 주려고 왔어요.”

그의 손에 저번과 같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마 그 안에는 정제 포션이 들어 있으리라. 아직 지난번에 준 것을 전부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신성력의 양이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문득 베를리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메리쉬는요?”

잠들 때는 분명 메리쉬가 옆에 있었다. 게다가 그의 성격상 베를리아만을 두고 외출할 리 없었다.

“무슨 일인지 급하게 나갔어요.”

“그럼 내 방에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베를리아의 곁을 비우면서 메리쉬가 아무 조치도 취해 놓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리들턴의 저택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심지어 흑마법까지 잔뜩 걸려 있는 이곳에서 리리카는 이렇게 평탄하게 베를리아의 방에 멋대로 침입했다. 단순히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저택에서 내쫓을 거예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