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32)화 (32/148)

32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2)


 

“베를리아?”

“리들턴 백작님…?”

의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주변 이들도 말을 걸어 왔다. 그러나 마치 귀에 장막이라도 하나 씐 것처럼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채로 다시 튕겨 나갔다.

[‘카를의 앞에서 그러지 마…!’]

마치 제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처럼 머릿속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삐이이이익- 아까보다 더 긴 이명이 들렸다. 신경질적인 소리가 머릿속을 찌르는 날카로운 고통이 되어 그녀를 강타했다.

“베릴!”

휘청,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베를리아를 메리쉬가 받쳐 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걸 본 메리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카를의 앞에서 다른 사람과 그러지 마!’]

집착이 드러나는 날카로운 목소리. 그녀는 이제 제 머릿속을 헤집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베를리아 리들턴…!’

진짜였다. 진짜가 죽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것도 제 안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마치 의식을 놓아 버릴 것처럼.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토록 갈망하던 카를로스 에덴버의 관심. 그게 눈앞에 있었기 때문일까? 이제껏 잠잠하던 베를리아 리들턴이 왜 갑자기 제 모습을 드러내려는지 알 수 없었다.

[‘카를, 카를, 카를, 카를…’]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 리들턴의 빛이었다는 건 알겠다. 그건 원작에서부터 꾸준히 나와 있었으니까. 죽을 뻔해 놓고도 여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목소리 역시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제 와, 넘겨 줄 거 같아…?’

그 순간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쨍그랑!

파열음이 들리자 일순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잠시 휘청거리던 베를리아가 끝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깨고야 만 것이다.

“베릴, 손이…!”

메리쉬가 안주머니에서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베를리아의 손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괜찮아.”

머릿속이 다시 뚜렷해졌다. 정신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를 헤집으며 제 의지를 강요하던 목소리는 고통에 묻혀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베를리아는 충분했다. 이깟 손이야, 얼마든지 치료받으면 될 일이 아닌가.

“하지만, 다쳤어요.”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메리쉬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니, 차라리 제가 다쳤더라면 이렇게까지 사색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잠깐만, 메리쉬.”

그의 부축을 받고 있던 그녀가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베를리아의 모습에 눈앞의 네 사람이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베를리아, 괜찮은 거야?”

“친한 척 하지 말아 줄래?”

하여간 리암 로베르는 틈만 나면 제멋대로 이름을 불러 댔다. 아직도 제 주제를 모르고.

“…빨리 치료를.”

“궁의를 부르겠습니다.”

상처 치료야 신성력으로도 할 수 있었으나 손에 박혔을지도 모를 유리 조각은 직접 제거해야만 했다. 성녀의 말에 데니안이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로 말했다.

“아니요, 몸이 좋지 않은 거 같으니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런 그들을 딱 잘라 거절하며 베를리아가 말했다. 어차피 당장 이곳에서는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방을 따로 내줄테니 치료 받고 가도록.”

표정이 굳은 황태자가 말했다. 그는 베를리아가 이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네멘 리들턴이나 므시아 외에 그 사실을 맨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 하필 카를로스 에덴버였다.

‘베릴, 괜찮아?! 빨리, 빨리 치료 받아야…’

또, 또 떠올랐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놓지 못하는 카를로스 에덴버에 관한 기억.

네멘 리들턴의 실험으로 베를리아는 어릴 적부터 남들과 다른 힘을 갖게 되었다. 그 힘으로, 당시에는 아직 어린 아이였던 카를로스와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했던 데니안의 몫까지 베를리아가 해야만 했다.

나이차 많은 형제들을 두고도 카를로스 에덴버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까닭은 베를리아가 대신 희생했기 때문이었다.

‘신관을, 신관을…’

‘안 돼, 카를.’

베를리아의 몸은 신성력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관을 부를만한 충분한 부와 권력이 있음에도 포션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네멘 리들턴은 흑마법사였고 그가 사용하는 것은 금지된 힘이었다. 그 힘이 베를리아의 몸에 돈다는 것을 신전에서 알게 되면 그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설령 신전이 베를리아를 살려 둔다고 해도 네멘 리들턴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 나 때문에…. 미안해, 내가 약해서.’

뚝, 뚝. 어린 카를로스의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무수한 살수들의 위협에서도 담담히 버티던 아이는 베를리아로 인해 울고 있었다.

오늘따라 떠오르는 잔상이 길었다. 심지어 그 감정까지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내가 원한 거야, 카를.’

‘그렇다고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너, 아프잖아.’

베를리아 리들턴은 하얀 뺨을 적시는 그 눈물방울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소녀는 누군가가 저로 인해 우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괜찮지 않아, 베릴.’

이런 고통이 괜찮지 않다고 말해 주는 것도.

‘아냐, 난 익숙해.’

그래서 베를리아는 그런 상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웃으며 괜찮다는 것을 피력하는 수밖에는.

네멘 리들턴의 실험은 지독했다. 그가 베를리아에게 행한 실험은 인간의 몸에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을 쑤셔 넣는 일이었다. 네멘의 고된 실험 탓에 베를리아와 함께 므시아에 속했던 아이들은 이제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반절 중 반 이상이 정신을 놓았다.

‘독하구나, 마음에 들어.’

그 중에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네멘 리들턴은 그제야 흡족해하며 베를리아에게 리들턴이라는 성을 주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소녀에게 익숙했던 것이다. 이쯤이야, 아무렴.

그러나 소녀의 말에 소년의 얼굴은 더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눈물이 가랑비처럼 흘러내렸다.

‘익숙하다고 해서 그게 당연한 건 아니야, 베릴.’

우는 카를로스의 앞에서 베를리아 리들턴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작은 소녀에 불과한 베를리아 리들턴이 힘을 쓸 때면 므시아의 모두가 소녀를 숭배하듯 바라봤다. 므시아에서는 오직 강한 힘만이 최고였고 그러다 얻은 상처쯤이야 훈장이었다.

모두가 베를리아 리들턴을 숭배하고, 소녀에게 아부하며, 거짓으로라도 미소 지었다.

‘…아플 때는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거야.’

‘카를, 혹시 어디 다쳤어?’

계속해서 울고 있는 소년을 보며 소녀가 걱정에 가득 차 물었다.

‘아픈 건 너야, 베릴.’

소년의 대답에 소녀의 얼굴이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변했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가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멘 리들턴은 소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쳤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계속 울어, 카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소년이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 눈물을 그치고 평소처럼 웃어줬으면 했다.

‘네가 너를 위해 울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않았지만 베를리아 리들턴이 지독한 사랑이란 열병에 걸린 이유는 하나였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 많은 순간에.

‘네가 다치면 나는 슬퍼, 베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준 건 처음이었다. 그 순간을 소녀는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그 후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베를리아 리들턴이 자신을 위해 울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치료만 받으면 보내줄 테니, 받고 가라.”

치고 들어오는 기억들 때문에 그녀가 말이 없자 카를로스가 덧붙였다. 황태자는 그녀가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억 속의 감정들이 알려 주고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다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정말, 이제 와서.’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그 기억과 황태자가 보이는 모습 때문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짜증이 치밀었다.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겨우 손을 다치니 걱정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싫습니다.”

“…베를리아.”

단호한 거절에 나직하게 카를로스가 그녀를 불러왔다. 마치 그렇게 부르기라도 하면 그녀의 태도가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속이 뒤틀렸다.

“베릴, 어서 가요.”

그때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부축해왔다. 다친 건 손뿐이지만 마치 다른 것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보였다.

어쩌면 눈앞의 카를로스 에덴버로부터.

“제가 태자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실 줄 알고 황궁에서 치료를 받겠어요?”

카를로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당신은 일그러진 얼굴이 잘 어울린다. 그제야 조금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자, 메리쉬.”

홱 고개를 돌린 그녀가 오롯이 메리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두 사람이 연회장을 벗어날 때까지 시선은 떨어지질 않았다.

***

“…카를!”

안젤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제야 어딘가 넋을 놓고 있던 카를로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맞춰졌다.

‘제가 태자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실지 알고 황궁에서 치료를 받겠어요?’

베를리아 리들턴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 그 한 마디가 지워지지를 않았다.

“…미안, 앤지. 다시 한 번만 말해 줄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한숨을 참은 카를로스가 말했다. 그 반응에 그를 빤히 보던 안젤라가 평정심을 애써 유지하며 답했다.

“리들턴 백작님이 필요하냐고 물었어.”

“뭐…?”

말을 꺼낸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잠시 안젤라의 말이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지금 앤지가 뭐라고 한 거지…?’

카를로스가 안젤라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잔뜩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안젤라는 제 연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의지였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