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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31)화 (31/148)

31화. 사람은 변할 수 있다(1)


 

<성녀가 아직도 황태자에게 파트너 요청을 못 받은 모양이던데.>

누구의 이름으로 온 서신인지 적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받았을 때 데니안 론델은 누가 보낸 것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사이가 틀어졌다고는 해도 베를리아와는 함께해 온 시간이 있었다. 필체 정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째서 내게 이 서신을?’

데니안은 베를리아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 욕심이 적나라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데니안은 곧 자신이 해야 할 일만은 알 수 있었다. 이미 건국제는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황태자는 성녀에게 파트너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명확한 사실이었다.

‘설마, 카를.’

그래도 긴가민가한 것은 황태자가 자신이 인정한 주군이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를 믿었다. 그를 선택한 자신을 믿었다. 안젤라 역시 카를로스가 보잘것없는 4황자였을 때도 그의 옆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이제 와 달라지면 안 되는 거라고.

카를로스가 태자궁에서 집무로 계속해서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안도했었다.

“태자 전하께서 오늘 갑작스러운 외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또한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음을, 태자궁에서 나간 적 없던 카를로스가 갑자기 외부에서 궁으로 돌아왔을 때 데니안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리암이 이미 리들턴의 저택에서 카를로스를 봤다고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를 다녀왔는가는 분명했다. 그래서 부하 기사로부터 전해들은 말 하나로 모든 추측이 가능했다.

눈앞이 깜깜하다는 게 그런 느낌이었을까. 카를로스는 왜 베를리아를 남들 몰래 찾아갔을까? 리암도 알았는데 안젤라는 모를 수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를 계속 자극하는 행동에 화가 났었다. 그뿐이야.’

베를리아를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했던 일. 그것을 단순히 충동적인 실수로 치부하던 카를로스.

지금은 건국제 기간이었다. 건국제는 워낙 큰 행사다 보니 자국의 백성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축제를 잡음 없이 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당한 인력이 필요했다. 때문에 모두가 즐기는 기간이긴 했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이 바쁠 때였다. 특히 그 당시 중앙 회의에 참석했던 귀족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현재 귀족들 사이에서 황태자비 후보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이 없는 것뿐이었다. 건국제가 끝나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다시 그 문제를 들이밀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카를로스는 자신이 베를리아를 추천한 일에 대한 대책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가 귀족들의 생리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증오해.’

분명 카를로스는 진심으로 베를리아의 죽음을 바랐었다. 그건 꽤 케케묵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때조차도 카를로스는 베를리아를 내치지 않았다.

왜? 필요했으니까.

“카를로스 에덴버, 넌 결국….”

데니안이 눈을 내리감았다. 적어도 그의 안에서 난 결론은 하나였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사이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

물어 보면 그는 아니라고 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사실 이제 문제는 카를로스의 답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데니안, 자신이 그의 말을 더 이상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문제였을 뿐.

그래서였다.

“이번 연회에서 성녀님께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황태자를 믿지 못하고 그 길로 달려가 안젤라에게 파트너 신청을 한 것은.

“…기꺼이요, 론델 기사단장님.”

물론 안젤라가 잠깐의 머뭇거림을 끝으로 요청을 수락한 것은 데니안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성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베를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귀족들의 표정이 점점 더 형용할 수 없이 변했다.

그 베를리아 리들턴과 성녀가 저렇게 평온한 모습으로 인사 나누는 장면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 모습은 베를리아 리들턴이 전과 달라진 까닭이 가장 커 보였다. 항상 성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은 베를리아 리들턴이었기 때문이다.

‘…달라졌네?’

귀족들과 달리 베를리아는 눈앞의 안젤라가 신기했다.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갱생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변할 수는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안젤라는, 비록 약간 평소의 밝은 느낌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베를리아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의 분은?”

안젤라가 메리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메리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불편한지.

“제 연인이에요.”

“메리쉬라고 합니다.”

그는 베를리아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굳이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메리쉬는 안젤라에게 한 치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제야 안도감이 흘렀다. 이렇게 두 사람을 대면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는 게 너무 다행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메리쉬 님.”

“연인…?”

안젤라가 인사를 건네자마자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암.”

“오랜만이야, 리암.”

“…아, 데니안, 안젤라.”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그제야 인지한 듯이 그들을 돌아보는 리암의 반응이 느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베를리아에게로 돌아갔다.

“그자가 네 연인이라고…?”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머뭇거림을 가득 담은 목소리였다. 리암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신지?”

가만히 있던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어깨를 제 팔로 감싸 안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직접 대면한 적만 없을 뿐, 늘 베를리아의 그림자로 살았던 메리쉬가 리암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묻는 이유는 하나였다.

“베릴에게 들은 적이 없는데, 그 이름.”

리암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그에게 인지시켜 주기 위해서.

“…리암 로베르 후작이라고 한다.”

“후작님, 제 연인입니다.”

당연하게, 혹은 일부러 메리쉬를 하대하는 듯한 리암에게 베를리아가 말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직시하는 시선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리암이 움찔했다. 전과 같았으면 베를리아가 어떻게 굴든 그래도 제멋대로 했을 것이다. 그는 눈앞의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들을 아끼는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면 넘어가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암은 베를리아가 데니안을 망설임 없이 칼로 찌르는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었다.

“메리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결국 리암이 물러서야만 했다. 왜냐하면, 베를리아가 아끼는 사람에게 함부로 굴었을 때 그녀가 어떻게 매서워지는지는 그도 알았으니까.

자신이 그 테두리 안에 있을 때는 그저 독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밖으로 내쫓기고 나니 알 것 같았다. 그게 베를리아의 테두리에 속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안온한 것인지를.

“그런데 두 사람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리암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베를리아를 다시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를로스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주려던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빨리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니.

“왜? 안 믿겨?”

리암의 입이 다물렸다. 믿기지 않는 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거였다. 베를리아에게도 그게 빤히 보였다.

베를리아가 순간 메리쉬의 목에 두 팔을 걸어 그에게 기댔다. 메리쉬가 자연스럽게 그런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쪽, 두 사람의 입이 닿았다 떨어지는 것은 찰나였다.

그 찰나의 순간은 슬로우 모션처럼 주변에서 힐끔거리던 이들부터 두 사람의 앞에 있던 이들에게까지 확연하게 각인되었다.

“더 진하게 해야 믿으려나-”

베를리아의 손끝이 간지럽히듯 메리쉬의 뺨을 맴돌았다. 자안이 요요한 빛을 품고 샹들리에의 반짝임을 따라 빛나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어딘지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싼 것은 순식간이었다. 꿀꺽,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하면.”

그때 메리쉬의 목소리가 그 분위기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베를리아를 안은 손은 조심스러우면서도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제가 멈출 자신이 없습니다, 베릴.”

그는 베를리아 외의 모든 이를 주변 풍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이미 메리쉬의 시선에 여기서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는 건 베를리아뿐이었다.

맹목적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은 기묘한 황홀함이 되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한층 은밀해진 목소리로 베를리아가 속닥였다.

“난 안 멈춰도 상관없는데.”

“베를리아 리들턴.”

누군가가 그 위험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깨트리며 말을 걸어왔다. 베를리아가 짜증스럽게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봤다.

“카를.”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보라빛 시선과 푸른 시선이 마주쳤다. 황태자를 먼저 아는 척 한 것은 안젤라와 리암이었다. 데니안은 묵묵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연회장에서 뜨거운 감자라고 불릴 만한 인물들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안 그래도 따갑던 시선들이 이제는 대놓고 그들만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앤지.”

이 연회장에서 황태자인 카를로스에게 공식적으로 말을 놓을 수 있는 건 성녀인 안젤라뿐이었다. 신권과 황권이 동일한 나라에서 실질적으로 그녀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카를로스는 존댓말을 써야만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황태자가 성녀를 애칭으로 부를 수 있었던 까닭은 안젤라가 먼저 살갑게 애칭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안젤라가 에스코트하던 데니안의 팔을 놓고 먼저 카를로스의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분, 잘 어울리시지?”

그 상냥한 얼굴에 위화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게 어쩐지 카를로스에게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그는 결국 베를리아에게 물으려던 질문의 첫 마디도 떼지 못했다.

“…그래.”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의 난입으로 어쩐지 조금 살벌해졌던 분위기가 풀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자애로운 성녀를 언제나와 같이 경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화사하게 웃음 지었다.

“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쁜 말이네요.”

겸손은 없었다. 그 얼굴에는 이미 서로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아는 듯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볍게 말을 건넨 메리쉬와 카를로스의 시선이 서로에게 사납게 오갔다. 황태자를 보고 있는 짧은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고개를 돌린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베릴에게 더 어울리는 남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지만요.”

“넌 이미 내게 충분해.”

그에 보답하듯 베를리아 역시 메리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겨우 두 사람의 손이 가로막고 있는 그 좁은 틈 사이, 그게 참 아슬아슬해 보였다.

안젤라로 인해 겨우 돌아갔던 카를로스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적의 어린 시선. 그것을 안젤라가 바라보고 있었다.

[‘…지 마.’]

그때였다.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순간 이명이 삐이익 귀를 울렸다. 베를리아가 반사적으로 메리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제 두 귀를 틀어막았다.

“베릴?”

갑작스러운 베를리아의 행동에 메리쉬가 그녀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명과 함께 날아든 두통이 대답할 수 없도록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지 마.’]

‘그 목소리야.’

분명했다. 그녀는 이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데니안 론델을 칼로 찔렀던 그 날, 제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던 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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