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뱀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다(6)
‘아직은 베릴의 뒤를 조금 더 지키고 싶습니다.’
귀족의 성을 달게 되면 당당히 베를리아의 옆에 설 수 있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불편한 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귀족이 되면 의무가 생긴다. 게다가 공식적인 이름이 생기면 비공식적인 일에 분명히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예를 들어 저번처럼 황태자의 방에 숨어 들어가는 짓 같은 일에는 필시 제한이 걸릴 터였다.
어디서나 베를리아의 곁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더 좋았다. 이제야 겨우 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녀로서는 메리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방법은 만들기 나름이 아니던가. 방법은 차고 넘쳤다. 방법이 부족하다는 건 애초에 그 방법을 실행할 능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건국제는 만민이 평등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아니었던가요?”
초대왕은 건국일을 기념하여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이때만큼은 황실이 아낌없이 베풀게 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도 그 기간만큼은 배를 곯지 않도록.
그건 초기 불안정했던 나라에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끌어들여 그 세를 늘리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럴싸한 포장이 중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베를리아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그 뜻을 받들어 이번부터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황실의 초대장이 있다면 연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죠.”
“황태자인 나도 모르게 황실법이 바뀌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카를로스가 기가 차 소리쳤다. 자신은 황태자였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황실법의 개정이라니, 아무리 베를리아라지만 억지였다.
“왜 말이 안 되나요?”
“법안 개정이 나를 통과하지 않고 될 수 있을 거라 생각….”
“전하는 황태자이시지, 폐하가 아니시잖아요.”
베를리아의 말투는 나긋나긋했고 부채를 살랑이는 손길은 나붓나붓 나비의 것 같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에는 악의라고는 한 점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 순간 카를로스 에덴버는 더욱 우스워졌다.
그녀의 말은 이 법안의 개정이 황제의 칙령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하고 있었다.
“저런, 태자 전하께서는 모르셨나 봅니다.”
턱을 치켜든 베를리아가 부채를 펼쳤다. 그녀가 그 뒤로 웃음기를 숨기며 말했다. 마치 안타깝다는 듯 말했으나 구태여 그 어조에 묻어 있는 즐거움까지는 지워내지 않았다.
황태자는 모르는 황제의 칙령.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음조차 모르는 황태자.
카를로스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분노인지 수치인지 모를 것이 타올랐다.
‘베를리아 리들턴이라고 하옵니다, 폐하.’
작금의 황제는 황태자를 불신했다. 권력 투쟁이란 것이 그런 것임을 알면서도, 제 형제자매를 모두 도륙하여 이 자리에 오른 자가 자신까지 죽일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 황제를 카를로스 몰래 알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황궁에는 애초에 사방이 황태자의 적으로 즐비해 있었다.
‘그대가 왜 날 찾아왔더냐.’
베를리아가 황제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국정을 운영하는 일에는 재능이 없던 황제는 적어도 강자와 약자를 가릴 줄은 알았다.
황제의 귀가 될 자는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는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황태자의 자리까지 올려놓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황태자가 그녀의 세력을 쳐내는 것에 실패했다는 사실도.
‘소신, 그동안의 불충을 만회하고자 합니다.’
‘불충?’
황제는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하긴 이전의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면 절대 황제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충정, 아니 사랑은 오직 카를로스 에덴버의 것이었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요즘 폐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니 염려되어….’
돈이고 권력이고 아쉬울 게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남발하기란 너무 쉬웠다. 베를리아가 황제의 시종에게 문서 하나를 건넸다.
‘황제 폐하께서 요양하시기에 적절한 휴양지를 하나 진상할까 하옵니다.’
네멘 리들턴이 마탑의 마법사들에게서 빼앗은 다프네섬, 그곳은 온갖 방어 마법의 집약지로 천의 요새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 옛날 마법이 사술로 핍박받던 시대에 마법사들의 은신처가 됐던 곳이기도 했다.
베를리아가 건넨 문서에는 그곳에 있는 가장 위대한 성의 소유권이 명시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 이름이 ‘가장 위대한 성’이었다. 그 섬의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만들었다는.
그 섬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그 성의 소유주를 해칠 수 없었다.
‘내게 이걸 주는 이유는?’
섬은 리들턴의 것이니 므시아가 지킬 것이다. 성의 존폐는 섬과 함께한다. 즉, 리들턴이 건재한 이상 리들턴조차도 그 성의 주인을 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시시각각 제 목을 걱정하고 있는 황제로서는 안성맞춤의 선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섬의 주인은 황가가 아니라 황제 개인의 앞으로 되어 있었으니 이보다 적절할 수가.
‘어찌 감히 폐하께 진상을 올리는 데 대가를 바라겠나이까.’
베를리아가 황제의 앞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면 귀한 것을 진상했으니 내 그대에게 상을 내리고 싶은데.’
확실히 황제의 발 빠른 대처는 능력보다 눈치 하나로 그 자리를 유지해 온 자다웠다.
‘그렇다면 소신의 작은 청 하나만 들어 주시옵소서, 폐하.’
그게 바로 어젯밤 일이었다. 이런 작은 것 하나 바꾸는 데 귀족원장의 동의를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황제는 국새를 찍어 주었다. 그러니 카를로스가 모를 법도 했다.
“그런 자 따위… 그자가 황실의 초대장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황태자가 조잡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제의 칙령을 내리게 한 장본인이 베를리아였다. 그러니 초대장을 보낸 이도 짐작이 갔다.
그런 메리쉬에게 ‘그런 자 따위’라고 말할 순 없었다. 다급히 말을 바꾼 카를로스의 행동은 더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였다.
“초대장을 보여드릴까요?”
베를리아가 미소 지으며 사근사근하게 물어왔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기만이었다.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그럴 필요 따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됐다.”
휙 고개를 돌려버린 황태자가 그제야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표정은 아닌 척도 할 수 없게 굳어 있었다.
사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어제 황실 연회의 출입 자격에 대한 법이 바뀌었다는 것을 지금 알았지만, 망신이 아닐 수가 없었다. 백작인 베를리아가 알고 있는 황제의 명령을 황태자인 카를로스는 몰랐으니까.
“…이만, 연회를 즐기도록.”
건국제를 맞아 황태자가 짧은 축사와 함께 말을 마쳤다. 그러나 기실 그 자리에서 황태자의 말에 집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의 딸 안젤라 애거스틴 성녀님과 데니안 론델 황실 기사단장님 드십니다!”
그리고 카를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온 시종이 목소리는 그 분위기에 정점을 수놓았다.
연회장 안 모두의 고개가 일순 입구 쪽으로 휙 돌아갔다. 황태자의 시선이 기름칠한 지 오래된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문을 향했다.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남색의 빛깔로 코드를 맞춰 입은 선남선녀가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그대로 크게 손뼉 치며 박장대소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두 분, 잘 어울리십니다.”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야 할지 여타 귀족들이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베를리아가 먼저 방향을 정했다.
안젤라와 데니안에게 다가간 그녀가 매끄럽게 말을 꺼냈다. 물론 그 말의 여파는 절대 작지 않아서 주변의 이들이 도리어 크게 숨을 들이켜는 결과를 자아냈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리들턴 백작.”
데니안의 시선이 잠시 빤히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의 안젤라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난번의 굴욕이 언제였냐는 것처럼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제게 쏙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황태자가 선물한 것은 아니었다.
“리들턴 백작님.”
안젤라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베를리아와 메리쉬를 제외하면 연회장의 그 누구보다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 등장 후 한 차례도 떨어지지 않은 황태자의 시선조차 넘겨버리면서.
제 치맛자락을 잡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핀 성녀가 말을 이었다.
“보내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들 아닌 척해도 이 무리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온 성녀의 말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베를리아로서도 안젤라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온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안젤라 애거스틴은 카를로스가 기르는 온실 속의 화초,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신전에 이런 고급품들을 보내실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죠.”
성녀가 입고 있는 것은 단순히 고급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거기에 세트로 맞춘 듯한 귀금속들의 세공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성녀가 황태자의 연인이고 그 파트너가 황태자의 검인 상황만 아니었다면 황실에서 보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녀와 기사단장은 시종일관 황태자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고, 그에 반해 황태자는 그들 쪽을 싸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즉 절대 카를로스가 의도한 바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저 엄청난 것들을 누가 보냈을까?’
그건 사실 모두가 품고 있던 궁금증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리들턴 백작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안젤라가 다시 한번 인사를 전했다. 그제야 좌중은 저들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또 다른 의문만이 커졌을 뿐이다.
‘어째서 베를리아 리들턴이 성녀에게 저런 것들을 선물했는가?’
‘게다가 그렇다면 어째서 성녀는 그것을 받아들였는가?’
모두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얼굴에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