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뱀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다(5)
겨우 그뿐이었는데. 안젤라는 카를로스에게서 파트너 신청을 듣는 순간 자신이 이미 그 대답을 정해놓았음을 깨달았다.
파트너 신청은 적어도 연회의 일주일 전에 하는 것이 관례였다. 건국제의 경우 5일에 걸쳐 진행되었으니 적어도 카를로스는 10일 전에 안젤라를 찾았어야만 했다.
그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안젤라는 이래봬도 성녀였으니까.
이제 막 황태자 위에 올라 바쁜 카를로스가 얼굴을 비추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큰일은 아니었다. 일전에도 종종 그랬으므로.
그저 납득할 수도 있었고 알아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카를로스의 행동을 당연하게 납득하거나 굳이 성녀의 힘을 행사하여 행적을 캐내기 싫었다. 그렇게까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태자 전하.”
제 연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달디단 애칭이 아닌 딱딱한 호칭이라는 것을 인지한 황태자의 표정이 굳어갔다.
“죄송하지만 이번 연회에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상치도 않은 답을 들었을 때, 카를로스의 표정은 형용할 수 없이 구겨져 버린 뒤였다.
***
“그자를 믿어도 될까요?”
베를리아를 품에 안고 있던 메리쉬가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베를리아는 적이 많았다. 그녀가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권력에 정도란 없고 그 자리를 어떻게 차지하느냐 그뿐이니까.
이미 제국의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므시아의 주인이 바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황태자까지 그 자리에 올려 놓았다. 복수하기를 원하는 자들도, 견제하는 자들도, 탐이 나 빼앗고자 하는 자들도 셀 수 없었다.
그러니 세작을 들이려는 자들도 무수히 많았다.
“안 믿는데?”
메리쉬를 돌아본 베를리아가 가볍게 답했다. 그녀의 말에 그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찼다. 리리카를 무려 리들턴의 저택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던가.
“일단 필요하니까.”
베를리아가 정제 포션들이 든 약병을 가리켰다. 당장 어떤 의도로 이곳에 발을 들였건 그 신력 하나만은 진짜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상태를 생각하면 그 진짜는 반드시 필요했다.
“내가 그런 자한테 당할 거라고 생각해?”
물음이었으나 그 속에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오만에 가까운 확신. 베를리아가 쉽게 당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메리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베릴이 단 한 치의 해도 입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목숨 걸고 나를 지킬 텐데, 무엇을 걱정하겠어.”
그 다정한 염려에 웃은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을 쫓아 다시 제 입술을 내리며 메리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 베를리아를 지켜야 하니까. 그게 지금까지 메리쉬의 숨이 이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있는 한 베를리아에게 위험이 닿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강한 것과는 별개로 그건 스스로에 대한 맹세였다.
그러니까 베를리아의 말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질투 납니다.”
“뭐…?”
입술 위를 지분거리던 메리쉬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와 맥이 뛰는 자리에 닿았다. 베를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그가 제 자국이 남기를 바라는 것처럼 입술을 꾹 누르며 작게 말을 이었다.
“전 베릴의 가까이 있는 모든 것에 질투가 나요.”
당신의 주변을 맴도는 모든 것들이 싫다. 나 홀로 독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그림자로서 사는 것에 불만을 품어본 적은 없다. 나를 알아봐 주는 건 당신이면 그것으로도 족했다. 내 존재는 처음부터 오로지 당신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렇지만 당신을 볼 수 있는 게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꾸만 싫어진다.
“그렇지만 베릴은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메리쉬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베를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제 욕심껏 쥐기라도 하면 그녀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을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눈길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충만감으로 차오르던 마음이 멈칫했다.
그녀는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메리쉬부터 재스민까지, 단 몇 명일지라도 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충분했다. 애초에 많은 이들이 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건 복잡해서 싫어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겠죠, 제 욕심을 누르는 수밖에.”
메리쉬가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상관없었다. 메리쉬가 제게 더 욕심을 부리든, 얼마나 질투를 하든. 그런데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은? 아니, 원작이 조명하지 않은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실제로 현재 그녀를 따르는 므시아에 속한 자들을 끌어 모은 건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도 버려진 자들을 주워 그 능력에 맞는 곳에 활용한 것이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런 베를리아 리들턴이 외로움을 타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섬세한 부분들까지 충분하지는 못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지는 않듯이.
‘네가 만약 알게 되면…?’
왜 지금에야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몰랐다.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누가 완벽한 베를리아 리들턴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녀를 의심하겠는가.
그런데 원작에서는 알려 주지 않던 베를리아에 대해 메리쉬는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이. 원작과 남아 있는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게 불안감을 부추겼다. 메리쉬가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거짓을 말할 리 없다는 것에 기인하여 그저 믿어야 할 뿐.
‘그래도 나를 사랑할까?’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이곳에서의 생활에 왜 갑자기 불안감이 스며드는 걸까. 그녀가 가진 힘과 돈이 주는 권력은 공고하고, 메리쉬는 처음보다 더욱 맹목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이곳은 그녀의 현실도 아니니 그저 즐기면 그뿐인 것을.
“베릴?”
그녀가 한참을 말이 없자 메리쉬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혹시라도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려 그녀가 안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걱정이 가득했다.
‘…그래, 저런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철석같이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이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진짜는 이곳을 버렸고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무슨 그런 걱정을 해, 멜.”
그녀가 요요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메리쉬의 목에 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한 치의 틈도 없는 거리에서 그녀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나를 주는 건 너뿐인데.”
오직 제게만 향하는 녹빛 시선. 그것을 믿으면서도 차마 외로움 따위 느끼지 않으니 너만 있으면 된다는, 그가 안심할 말은 해 주지 못했다.
***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와 랭스턴 백작 영애 드십니다!”
황태자의 등장으로 조용해졌던 주변에 일순 다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견한 베를리아의 입꼬리가 부채 뒤에서 노골적으로 올라갔다.
지금은 오래전으로 느껴지는 그때, 카를로스 에덴버가 황태자가 아니었을 때부터, 그가 마침내 무도회에 발을 들이게 될 수 있던 그 날부터. 카를로스의 파트너는 성녀가 아닌 적이 없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던 4황자가 맨 처음 황실 무도회에 당당히 발을 디딜 수 있던 이유도 성녀 때문이 아니었던가.
‘개자식, 지 필요할 때만 찾지.’
베를리아가 속으로 빈정거렸다. 카를로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신전 귀족들이 수군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번에는 성녀님과 파트너가 아니신 거지…?”
“두 분 사이가 설마 틀어지신….”
“쉿! 경거망동하지 말게.”
머리가 있다는 자들이 입단속을 하고 있었으나 이미 목격한 광경에 대해 말이 퍼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황태자가 귀족들에게 세가 밀림에도 불구하고 제 뜻을 관철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신전의 지지를 받는 까닭이 컸다. 그러니 그의 표정이 좋을 수 있을 리가. 만약 이대로 성녀와 틀어지게 된다면 카를로스는 저의 커다란 지지기반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카를로스라고 귀가 막힌 것은 아니었으니 그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을 리 만무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으나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 베를리아와 마주쳤다.
“멜.”
그 순간 그녀가 메리쉬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뚝, 아주 찰나에 황태자의 걸음이 멈춰 섰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녀를 지탱했다. 자연스럽게 기울여진 고개,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연인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
황태자에게 미친 것처럼 굴던 베를리아 리들턴의 변화, 세상 둘도 없는 연인 같던 황태자와 성녀의 틀어짐. 단번에 생겨난 가십거리들에 그 자리에 있는 수많은 귀족들의 눈이 즐거움으로 번들거렸다.
“예, 베릴.”
달콤한 메리쉬의 목소리가 그녀의 애칭을 부르며 답했다. 그 순간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인간에게서도 날 수 있었다면 카를로스에게서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릴.’
‘…베릴?’
‘…애칭으로 불리는 거, 싫어?’
입양이었든 무엇이든 어린 날부터 네멘 리들턴의 자식으로 살았다. 그러니 누군가가 베를리아의 애칭을 부른 적 있을 리 만무했다.
거리에서 살 적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을 받은 뒤에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네멘 리들턴 뿐이었다. 그러나 그 냉정한 흑마법사는 애초에 베를리아에게 애정 따위 품지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아. 정말 좋아. 고마워, 카를.’
그랬었다. 그러니 그 어린 날의 작은 한 마디에 베를리아 리들턴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 후로도 베를리아의 애칭을 부를 수 있는 것은 단 셋뿐이었다. 카를로스가 알기로는.
애칭. 겨우 그까짓 것이 뭐라고. 그런데도 이상한 감정이 그를 침범했다. 휙 돌아선 황태자가 성큼 베를리아의 쪽으로 다가왔다.
“그자는 여기 들어올 자격이 안 될 텐데?”
황제는 오늘도 건강의 문제로 불참한 터였다. 최소한의 이성이 있었다면 카를로스는 앞까지 나아가 제 자리에서 연회의 시작을 알렸어야 했다. 그러니 이건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뜻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메리쉬의 쪽을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베를리아 리들턴의 옆에 연인처럼 서 있는 처음 보는 사내가 다들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저 감히 다가가 누구냐고 물을 수 없었을 뿐.
“그자는 귀족이 아니지 않나.”
카를로스가 이쪽을 향한 이목에 들으란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였다. 카를로스의 눈을 속이고 귀족의 자리를 늘릴 수는 없었다. 그는 확신했다. 저자는 여전히 평민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베를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정말로 의아한 듯 말했다. 마치 카를로스가 전혀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