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뱀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다(4)
카를로스와 리암은 쫓겨나듯 리들턴의 저택을 떠나게 되었다. 베를리아가 제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리리카와 마주 앉은 베를리아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젯밤 늦게 잠이 든 덕에 피곤했다. 특히 앞선 영양가 없는 대화로 아침도 못 먹고 기력을 낭비해서 더더욱.
“으음… 보시다시피 저는 평범한 소시민이랍니다?”
능청스레 웃음을 지은 남자가 두 손을 들며 무해하다는 듯 자신을 설명했다. 그것을 들은 베를리아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잘 가요.”
“자, 자자잠깐! 잠깐만요!”
리리카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토록 단칼에 잘라버릴 줄이야 몰랐다. 적어도 정제 포션을 가져온 이에게 어느 정도 흥미를 보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메리쉬는 그를 쫓아낼 준비를 완벽히 마치고 있었다. 메리쉬에 의하여 그대로 뒷덜미를 붙잡혀 끌려 나갈 위기에 처한 리리카가 외쳤다.
“제 이름은 리리카 에루아트에요!”
베를리아의 걸음이 멈추고 메리쉬가 아쉬운 얼굴로 그를 놓아주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리리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은?”
아직 그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베를리아가 도로 앉지 않고 물었다. 만약 리리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갑자기 하루 만에 정제 포션을 가져온 이유도 설명될 수 있었다. 그것도 4개씩이나.
‘정말, 이러기 싫었는데….’
곧바로 증명하라는 그녀의 태도에 리리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단호하기가 단호박 버금가는 상대였다.
품에서 평범한 컴팩트 거울로 보이는 것을 꺼내든 그가 그것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거울이 아닌 투명한 돌과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 드러났다. 에루아트의 것이었다.
곧 리리카가 작은 단검도 꺼내 들었다. 베를리아는 그 과정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진짜 에루아트의 핏줄이라면.
‘도움이 될까, 방해가 될까?’
그녀가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리리카가 단검으로 제 손바닥을 그었다. 그가 퐁퐁 솟아나기 시작하는 피를 그대로 투명한 돌 위로 떨어트렸다.
곧 투명한 돌이 피를 머금었다. 투명함을 잃고 순식간에 핏빛이 번진 돌이 순간 눈부시게 빛났다. 그 빛이 가시고 나자 다시 선명하게 투명해진 돌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증명된 건가요?”
두 손을 들어 보인 리리카가 물었다. 그의 손바닥은 피를 보았냐는 듯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이 세계에서 에루아트의 문양을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리리카는 진짜인 셈이었다.
“좋아요, 그럼 다시 묻죠. 여기는 왜 찾아온 거죠?”
그제야 다시 자리에 앉은 베를리아가 리리카를 향해 물었다.
“그냥 찾아왔다고 하면….”
“그럼, 잘 가세요.”
“아니, 아니, 아니! 농담 한 번 했다고 그렇게 매정하시기 있는 거예요?!”
무려 그 에루아트의 이름을 팔았음에도 차갑기가 정말 한겨울의 서릿발보다 더했다. 리리카는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던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슬퍼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데.’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기세였다. 게다가 전부 다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에루아트의 핏줄이 십여 년 전 모두 사라진 건 알고 계시겠지요.”
성 에루아트, 에덴버의 오랜 신전 귀족 중 하나. 신전 귀족이란 대대로 고위 신관을 배출해내는 가문을 뜻했다. 신권과 황권이 비등비등한 이 나라에서는 신전 귀족만큼 확실한 권력도 없었다.
신력은 대대로 혈통을 통해 전해졌고 그로 인해 대를 이어갈수록 공고한 권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전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특수한 혈통 감별법을 가지고 있었다. 리리카의 혈통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이유였다.
“에루아트의 마지막 혈통이 사고사로 죽은 지 꽤 됐으니까요.”
리리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베를리아가 답했다. 통칭, 에루아트 후작가의 비극. 당시 단 하나뿐이었던 후계자의 갑작스러운 사고사. 그로 인해 후작 부부까지 연이어 충격으로 병을 얻게 된다. 마음의 병은 신성력으로도 낫게 할 수 없었다. 후작 부부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제 자식의 뒤를 따랐다. 후계자부터 주인까지 순식간에 모두 잃은 가문은 마지막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그 에루아트의 마지막 핏줄이라니….”
혈통을 확인했음에도 베를리아가 약간의 의심이 담긴 눈으로 리리카를 바라봤다. 머릿속에 든 지식에 의하면 리리카가 그 혈통임에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허나 신전 귀족이란 신전의 권력이자 에덴버의 소중한 재원이었다. 그런 가문이 멸문하게 생겼는데 나라에서건 신전에서건 찾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모두가 찾던 존재가 이제 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도 어릴 적에는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신관이셨으니까요.”
그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이 리리카가 답했다. 신관은 신께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존재. 당연히 결혼도 불가했다. 그런 이가 아이를 낳았으니 교황청에서 파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 얼마나 굴욕이었겠는가.
리리카는 태어난 적 없는 아이여야만 했다. 그건 부모의 선택으로 태어났을 아이에게는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날카롭게 빛낸 베를리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이야기를 못 들은 것으로 해야겠네요.”
신관에게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 자체로 부정의 존재였다. 그러니 제 혈통을 드러낸다고 한들 에루아트의 것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에루아트의 유산들은 그 이권에 따라 나라와 신전에서 각자 찢어먹은 지 오래였다. 리리카가 쫓기는 연유 또한 그러했다. 이미 그것으로 제 배를 불린 자들이 토해내고 싶어 할 리가.
그런 이들에게서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거든 절대 쉽지 않을 것이었다. 한데 되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모험에 굳이 동참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권력이 어떻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자라는 내내 지척에서 봐온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에루아트의 핏줄 따위 굳이 거두지 않아도 베를리아에게는 충분한 권력이 존재했다.
“제가…! 다음 대 교황이 될 수 있다면요?”
리리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베를리아를 붙잡았다. 그만 그를 돌아가게 하려던 그녀의 행동이 멈칫했다.
리리카가 품에서 무언가를 더 꺼내놓았다. 작고 투명한 병 안에는 6개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단박에 알아본 베를리아의 시선이 다시 리리카를 향했다.
“이것들을 어떻게 가지고 왔냐고 하셨죠.”
정제 포션이었다. 메리쉬가 리리카의 정체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제가 지난밤 만들었다고 하면 증명이 되겠습니까?”
단 하룻밤에 정제 포션 10개. 베를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에루아트의 핏줄이라고 해도 저 정도의 신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바였다.
그제야 베를리아는 리리카에게 마력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마력 저항이 선천적으로 강한 것도, 어릴 적 마법에 자주 노출되어 내성이 강해진 것도 아니었다.
리리카의 성력이 아실의 마력을 압도할 만큼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필요하시다면 증명하겠습니다.”
에루아트의 핏줄이 아니었어도 그녀는 기꺼이 거두었을 것이다. 리리카는 정제 포션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용 가치는 상당했다. 단, 신성력이 그토록 높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에 속하지 않은 수상한 자를 언제까지 품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면 이제 베를리아 양의 곁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리리카가 어딘지 간절해 보이는 눈으로 베를리아를 보며 물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다.
***
“…하아.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찌 되었든 리리카는 리들턴의 저택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다. 마른세수를 한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솔직해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처음에는 베를리아에게 들어 먹힐 법한 적당한 거짓들을 둘러대려고 했다.
그런데 베를리아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단호했고 자신은 그녀의 앞에서 제 생각보다 다급했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갔다. 어쭙잖은 거짓은 통하지 않을 것을 안 탓이었다.
드러내야 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지나치게 너무 많이 드러내 버렸다.
“위험한 건 아니겠지…?”
리리카의 목소리에 걱정이 서렸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목숨 걱정 없이 드는 잠이었다.
***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신관이 말을 전해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평소만큼 두근거리지 않았다. 안젤라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다른 신관들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공을 들여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의 얼굴은 분명 평소보다 그리 설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카를, 카를.’
왜? 사랑하는 연인이 고대하던 말을 들고 찾아왔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도 왜 이런 기분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성녀님?”
제 형제자매를 모두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황태자였다. 아무리 현재 그 세가 공고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전의 입장에서 괄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의 연인인 성녀가 황태자가 왔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초조함에 신관이 그녀를 재촉하듯이 불렀다.
“…아.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카를로스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멋있었다. 짙은 금발과 선명한 푸른 눈. 누구라도 그릴 법한 황태자다운 모습.
그가 안젤라를 보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향하여, 사랑하는 연인이.
“앤지.”
그래, 달콤해야 할 텐데. 어쩐지 카를로스가 다가올수록 까맣게 죽어 가는 심장이 느껴졌다. 안젤라가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쩐지 울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성녀답지 않게 소리를 바락 치고 싶은 기분도 일순 들었다.
“건국제의 연회에서 내 파트너가 되어 주겠어?”
오늘은 건국제가 시작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카를로스는 항상 그렇듯이 안젤라에게 연회에서 어울릴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보내왔다.
서로가 연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다른 파트너를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카를로스의 파트너로서 당연히 제가 함께하리란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카를로스가 안젤라를 찾아오지 않았던 동안에도 그 모든 것을 보내왔다. 늘 그랬듯이. 그저 오직 그의 얼굴만 비추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